원래는 교황의 방한에 맞춰 ‘교황의 경제학’에 관해 쓰려고 했다. 몽골 출장 길, 비행기 안에서 읽은 자료도 그랬다. 작년 11월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낙수경제학(부자들의 돈이 넘치면 가난한 이들도 잘 살게 된다)은 엉터리”라고 선언한 이래 경제학자나 저널리스트들이 뭐라고 언급했는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온갖 험담이 쌓여 있다.하지만 불과 3박 4일 만에 돌아온 이 땅에서 경제 얘긴 그저 한담에 불과했다. 세월호 특별법 여야 합의,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의 인터뷰, 그리고 이른바 ‘486 정치가들의 조선일보 인터뷰(8월 9일자)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절망스러웠다.이들은 ‘중도’에서 회생의 길을 찾았다. 선거에서 중도를 취하는 건 분명한 이론적 근거를 가진다. 4㎞ 쯤 되는 골목에 살림살이가 고만고만한 집들이 100m에 하나씩 있다고 하자. 여기에 어슷비슷한 두 개의 상점이 동시에 들어선다면 어디에 가게를 세울까?답은 골목의 정중앙, 즉 2㎞ 지점에 나란히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건의 종류와 질이 비슷하다면 가까운 가게에 들를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호텔링의 주장이다. 정치학자 다운스는 중위투표이론에 연결시켰다. 선거도 마찬가지여서 좌우의 정당들은 가운데 쯤 위치하는 유권자를 유혹하기 위해 중도의 정책을 내 놓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src=”http://www.pdjournal.com/news/photo/201408/52910_44093_1318.jpg”>▲ <조선일보> 8월 9일자 8면 기사.
그래서 그런 것일까. 임종석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야당은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 있다”며 “과도하게 사회·정치적 문제에 집착하고 국가 운영과 관련된 의제에는 소홀하다”고 말했다. 투쟁현장에 신출귀몰해서 홍길동으로 불렸던 전대협 의장, 34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미 재선 국회의원을 한 바로 그 사람 얘기다. <조선일보> 기자가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냐”고 확인하자 그는 “선명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진단 자체가 작위적이고 엉터리”라고까지 했다. 과연 그가 몸을 담았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통합민주당’, 그리고 ‘새정치민주연합’이 ‘중도’가 아니라서 그 동안 연전연패했다는 말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그리고 안타까운 죽음에 의한 승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486자신들이 톡톡히 덕을 본 그 승리가 중도 때문이었다는 말인가. 정치와 정책에는 뚜렷한 방향이 있기 마련이다. 만일 정당들의 방향이 일치한다면 호텔링과 다운스의 모델이 설득력이 있겠지만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리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의 희망을 북돋았기 때문에, 비스듬한 운동장에서도 이길 수 있었다.▲ 세월호 가족대책위가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정치민주연합 당사에서 새누리당과 합의한 세월호 특별법 철회를 요구하며 점거농성을 하고 있다. ⓒ노컷뉴스
임 부시장은 “민생만 얘기하고 성장을 말하지 않는다”, “안보에도 관심이 없다”고 탓한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성장과 안보 면에서 더 나았다. 노 대통령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등으로 더 오른쪽으로 가서 재신임을 못 받았을 뿐이다. 나아가서 현재와 같은 장기 위기 때는 민생을 살리는 길이 곧 경제를 살리는 길(소득주도성장)이요, ‘햇별정책’, ‘동북아 구상’이 곧 우리의 안보를 지키는 길이다. 아서라, 말아라, 이런 커다란 정책기조를 구상할만한 능력은 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세월호 협상에서 중도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적어도 세월호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는 알아야 대책을 세우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유가족들이 이 정도면 우리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알 수 있겠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13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을 가지고도 역부족을 탓하면서 유가족과 상의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땅따먹기 조금 하면 ‘공감의 정치’가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게 중도인가.참다못해 새정치연합 당사로 들어간 유가족들은 이렇게 울부짖는다. “우리 아이들의 죽음이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는 길은,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법은 우리 모두의 법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저희에게 남긴 숙제입니다.”* 본 글은 PD저널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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