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고통 03 – 지킴과 견딤


  


 



  무척 오랜만에 당신에게 글을 띄웁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을 핑계 삼겠습니다. 물론 당신의 현명함은 제 변명이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아시면서도 언제나처럼 눈 감아 주시겠지요. 무척 부끄럽고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저는 당신과 남한산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생각해보면 서울에서 생활한지가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지키지 못할 계획은 예기치 못한 일들에 밀려야 했습니다. 마음으로야 수 천 번 그 낡고 옹색한 성벽을 쓰다듬었지만 언제나 그뿐입니다. 오랜 풍상을 묵묵히 견디었을 그 초라하고 늙수그레한 처마와 빛바랜 단청에 대해서도 그저 짐작만 할뿐 눈으로 본 듯 이야기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난 2007년에서 2008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의 복판에서 한 선배의 권유로 소설 ‘남한산성’을 읽게 되었습니다. 1636년에서 1637년으로 넘어가던 그 겨울의 시린 바람과 팽팽한 하늘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글로부터 제 마음속으로 옮겨졌지요. 그 때나 지금이나 극심한 추위는 없는 사람들이 견뎌내기엔 무척 고약스런 것으로 여겨집니다.


 


  ‘적의 습격에 대비해 흙, 돌 등으로 구축한 방어시설’을 총칭해 성(城)이라고 한다더군요. 처음 성을 쌓을 때에는 인간의 평화에 대한 소망 또는 자기방어 본능 등의 발현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집단적 싸움인 전쟁에서 방어적 구축물이 되었고, 동시에 도시국가나 왕후·영주 등의 세력신장의 기지로서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는 갈수록 후자의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듯싶습니다.


 


  조선의 임금 인조와 그 세자 그리고 가신들은 그 비루한 몸뚱아리를 남한산성으로 옮기며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요? 그들이 지키고자 애썼던 그 무엇은 그토록 오랜 시간 백성들과 하급 군병들을 고생시킬 만큼 가치 있는 것이었을까요? 당신의 따뜻한 눈빛은 지금과는 다른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시대적 가치의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포기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끊임없이 저를 괴롭힙니다. 소설에 표현된 임금과 신하들의 맑고 시린 울음들로도 끝내 들어나지 못한 백성과 하급군병의 처연한 아픔을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간절함과 고통으로는 결코 영문도 모른채 ‘견뎌내야 하는 이’들의 슬픔을 덮을 수 없는 법입니다.


 


  제가 오늘 이야기 드리고 싶은 것은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는 마음’과 ‘견디어 낼 수밖에 없는 처지’의 차이에 대해서입니다. 당신이 잘 아시듯 한반도의 역사는 무수한 외침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특히, 유교적 명분을 숭상했던 조선의 역사는 그 정도를 더 했는데, 그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틈바구니에서 그저 견디어 내어야 했을 무수한 백성의 마음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참혹한 전쟁의 와중보다는 전쟁을 겪고 난 후의 끔찍한 현실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능욕을 당한 몸으로 평생을 죄인처럼 가족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을 무수히 많은 할머님들의 한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족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죄스러움에 평생을 몸부림쳤을 할아버님들의 마음을 짐작해 봅니다. 적에게 징발, 징집 당했다는 이유로 스러졌을 수많은 목숨들과 그 넋들의 차마 흘리지도 못한 피눈물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또한 오랜 시간 제 몸이 부수어지는 것을 견디며 모든 참상을 묵묵히 응시했을 낡은 성벽의 고통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굳이 사회과학적 견해를 가져다 붙이지 않아도 언제나 전쟁은 ‘견디는 이’들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은 맨 처음 축성의 의미를 잊은 채 ‘빼앗거나 지키려는 자’들의 소용일 뿐입니다. 빼앗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힘없는 이들에겐 삶이란 그저 견뎌내야 하는 몹쓸 숙명같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달 ‘북’으로부터는 최근 건강이 악화된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을 체계적으로 실행에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여하간의 이유를 대더라도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이를 이유로 ‘남’쪽에서는 ‘저마다의 입장과 처지에 따른’ 많은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제게는 그 모든 목소리들이 ‘빼앗거나 지키려는 자’들의 목소리일 뿐이었습니다. 한 동안 무척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기점으로 민주노동당의 분당을 겪으며 느꼈던 고통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극으로든 희극이로든 역사는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말과 지젝의 변주를 떠올려야 했습니다. 그 일 역시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몸부림이었을 뿐 ‘견뎌내야 하는 이’들의 고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빛이 들지 않는 음습한 구석에서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은채 눈물을 떨굴 수 있을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제 어리석은 생각이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을지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부디 당신은 언제나처럼 긴 호흡으로 눈과 마음이 모두 열려 계시기만 바랄뿐입니다. 이번 겨울이 지나기 전, 하늘이 처음 열릴 때의 맑고 시린 모습을 보이는 어느 날 당신과 함께 남한산성에 오르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