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만드는 혁신적 사회 변화, 우리는 그것을 ‘사회 혁신(social innovation)’이라고 부릅니다. 시민의 힘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시장의 실패를 아프게 경험한 우리에게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지금부터 그 쉽지 않은 길을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려 합니다. 이 기사는 그 마지막회입니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아찔할 정도다. 쫓기듯 어딘가로 정신없이 내달리는 대한민국의 풍경도 어지럽긴 마찬가지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만큼.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호랑이 말이다. 그런데 이 호랑이는 정말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 줄까.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기계와 벌인 수 싸움에서 인간이 내리 세 판을 밀린 뒤부터였으니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공교롭게도 2016년 벽두에 세계경제포럼이 ‘4차 산업혁명’을 선포한 지 두 달 만이었다. 다시 몇 달 뒤, 혁명의 주창자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 회장은 한국을 찾아 “4차 산업혁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패자의 무리에 속하게 될 것”이라며 겁을 주기도 했다.
혁명을 거스르는 목소리도 있다. 세계 최고의 로봇 연구소로 꼽히는 로멜라(RoMeLa)의 소장 데니스 홍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고, 페이스북의 인공지능(AI) 연구 책임자 얀 르쿤(Yann LeCun)은 “특별한 영역에서 기계는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지만, 일반 지능(general intelligence) 측면에선 아직 쥐(의 지능)에도 못 미친다”고도 했다.
가파른 기술 발전이 산업혁명에 버금갈 만한 사회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술결정론’에 거리를 두는 태도이자, 인류가 꿈꿔온 유토피아(디스토피아)가 머지않아 현실로 닥칠 것이라는 섣부른 낙관(비관)을 경계하는 시각으로 읽힌다.
어느 쪽이 맞을까. 더 두고 볼 일이지만, ‘4차 산업혁명’이란 호랑이가 (유령이든 아니든) 기술을 둘러싼 모든 논의를 집어삼키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안타깝다.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아서다. 지금부터 기술이 조금 다르게 쓰인 사례들을 살펴보려 한다.
아프리카 대륙에 생명을 실어 나르는 드론
르완다(Rwanda)는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다. 경상도 너비만한 땅에 인구도 1200만 명으로 엇비슷하다. 1인당 GDP는 2017년 754달러, 인구밀도로는 아프리카에서 첫손에 꼽힌다. 35개의 지역 병원과 478개의 건강센터가 있지만, 대개는 크고 작은 언덕들이 이어진 험난한 길을 지나야 한다. 1년에 두 번씩 찾아오는 우기엔 그마저도 막히기 일쑤다.
하지만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자그마한 땅에 사람들이 오밀조밀 모여살고 있으니 날개만 있다면 한 번에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 ‘짚라인(Zipline)’은 이런 점을 눈여겨봤다. 그리고 드론으로 이 나라 곳곳에 혈액을 실어 나르는 ‘무인 항공 공급 체계’를 구축했다. 세계에서 처음이었다.
2016년 짚라인은 르완다 정부와 계약을 맺고 무항가(Muhanga) 지역의 옥수수밭에 첫 혈액 공급센터를 건설했다. 13개의 드론으로 시작했고, 직원도 대부분 르완다인을 채용했다. 한 번에 150km를 비행하는 드론이면 이 나라의 서쪽 절반에, 그것도 30분 안에 혈액을 실어 나를 수 있다.
2년 전인 2016년 10월 처음 날아오른 드론은 1년이 조금 넘는 동안 약 4000회, 거리로는 약 30만km를 비행하면서 7000개의 혈액팩을 12곳의 의료기관에 꾸준히 공급했다. 이 가운데 3분의 1은 환자가 목숨을 잃을 뻔한 응급상황이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필수적인 약을 얻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때에, 낭비와 비용, 재고를 줄이면서 접근성을 높이고 생명을 구하고 있다.”
짚라인의 공동창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켈러 리나우도(Keller Rinaudo)의 말이다. 혈액은 냉장상태로 42일간만 저장할 수 있다. 그 이후엔 버려진다. 그러니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응급상황에 대비하려면 버려지는 걸 감수하면서도 병원마다 어느 정도의 혈액을 보관해야 한다. 병원이 늘어날수록 그만큼 버려지는 혈액도 늘어나는 셈이다. 어느 나라에서건 마찬가지다.
르완다 정부도 수도 키갈리(Kigali)의 국립 센터와 네 개의 보급소에 많은 양의 혈액을 보관하고 있다가 수십 곳의 의료기관에 지속적으로 혈액을 공급해왔다. 그러다보니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키갈리에서 30km 떨어진 르완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캅가이(Kabgayi)의 병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병원 스탭들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혈액을 얻기 위해 키갈리를 다녀와야 했다. 대개 서너 시간이 걸리니 응급상황이라도 벌어지면 차라리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편이 더 나았다.
지금은 어떨까. 스마트폰으로 공급센터에 혈액을 요청하면 드론이 15분 만에 5km를 날아와 낙하산이 달린 종이상자를 병원 앞마당에 떨어뜨려준다. 다른 곳도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2017년 어느 날, 24살의 산모가 제왕절개 수술을 받다가 합병증이 생겨 많은 양의 피를 쏟기 시작한 일이 있었다. 병원이 가지고 있던 혈액을 모두 투여했으나 10분 만에 그 만큼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산모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병원은 곧바로 공급센터에 피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드론이 센터와 병원을 여러 차례 오가며 적혈구 일곱 팩, 혈장 네 팩, 그리고 혈소판 두 팩을 실어 날랐다. 우리 몸의 혈액보다도 더 많은 양이었다. 그렇게 산모와 아이 모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정말 놀라운 결과다. 전 세계 어떠한 의료 돌봄 체계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우리가 혈액을 공급하는 병원들에선 혈액 사용량이 눈에 띄게 늘었지만 지난 아홉 달 동안 어느 곳에서도 단 하나의 혈액팩조차 버려지지 않았다.”
짚라인은 르완다에 두 번째 공급센터를 세우고 있다. 머지않아 짚라인의 드론이 르완다의 모든 의료 기관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2017년 8월에는 아프리카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탄자니아에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의약품 공급 체계를 세우기로 했다. 탄자니아는 5500만 명 인구 가운데 68%가 농촌에 산다. 이들에게 혈액과 의약품(비상 백신, HIV 약품, 항말라리아제, 항생제, 실험용 시약 및 기본 외과 용품 등)을 공급하려 수도 도도마(Dodoma)를 비롯해 모두 4곳에 공급센터를 짓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1000개가 넘는 의료기관에서 하루에도 수천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스라엘이 개발한 살상 무기가 아프리카에서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기술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에는 미국 교통부가 캘리포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를 비롯한 10개 주와 도시에서 드론으로 의약품 등을 공급하는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장거리 및 야간 비행을 허가했다. 이제 짚라인은 의약품을 싣고 노스캐롤라이나의 하늘 위를 날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새로운 빛을 선물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에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약 3900만 명(2014년)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안타까운 건 이들 가운데 무려 80%가 제 때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만 받았어도 이를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단 사실이다.
케냐의 어느 시골 마을에선 안과의사 1명이 100만 명을 돌봐야 한다. 미국에는 평균 1만 5800명 당 1명의 안과의사가 있는데 말이다. 안경만으로도 삶이 달라질 수 있지만 케냐나 방글라데시의 시골 아이에겐 그런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고 있다.
영국의 안과의사 앤드류 바스토로스(Andrew Bastawrous) 박사도 어린 시절 비슷한 처지였다. 그는 밤하늘 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12살이 돼서야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 교사들은 그를 게으른 학생으로 여겼다. 그는 안과에서 처음으로 시험용 렌즈를 끼던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삶은 달라졌고 그는 안과의사가 되었다.
2011년 바스토로스는 연구팀을 꾸려 아프리카 케냐로 갔다. 100개 마을을 돌며 5000명의 주민을 만나 시각장애가 생기는 원인을 찾으려는 연구였다. 영국에서 가져온 1억 원이 넘는 첨단 의료 장비들을 차에 싣고 험한 길도 마다 않았지만, 정작 어렵게 닿은 마을에선 필요한 만큼의 전기를 쓸 수 없었다. 값비싼 장비들은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다.
그때 그의 눈에 주민들의 손마다 들려있는 스마트폰이 들어왔다. 알고 보니 케냐에선 물보다 스마트폰을 구하기가 쉽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스마트폰이 흔했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검안 장비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3년간의 연구 끝에 ‘피크(Peek, the Portable Eye Examination Kit)’가 세상에 나왔다. 피크는 스마트폰으로 시력을 측정하고, 망막 사진까지 찍을 수 있는 앱과 기기로 이뤄져있다. 무엇보다 휴대와 사용이 간편하고, 값도 싸다.
‘피크 어큐티(Peek Acuity)’라는 시력 검사용 앱을 설치하면 어디에서든 간단히 시력 검사를 할 수 있다. 피검안자가 2m 떨어진 스마트폰 화면에 뜨는 알파벳 ‘E’자 모양의 도형을 보고 열린 방향을 가리키면 검안자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어 그 방향을 입력하는 방식이다. 알파벳이나 숫자를 몰라도 검사를 받을 수 있고, 검안자는 화면을 밀어 방향만 차곡차곡 입력하면 저절로 결과가 기록되니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어렵지 않게 시력을 측정하고 또 기록할 수 있다.
‘피크 레티나(Peek Retina)’는 스마트폰 카메라에 끼워 망막을 찍을 수 있는 작은 기기다. 3D 프린터로 5달러면 만들 수 있는 이 작은 기기로 전문 의료 지식이 없어도 망막 사진을 찍어 의사에게 보낼 수 있다(가장 비싼 검안 장비는 10억 원에 달한다). 녹내장, 백내장, 당뇨성 망막증 및 황반변성 그리고 노화에 따른 시력감퇴 등을 진단할 수 있다.
2014년 시제품을 만든 뒤 2000개 이상의 사진을 찍어 첨단 장비로 찍은 것과 비교함으로써 가능성을 입증해보였다. 또 위치정보를 저장하는 기능도 있어 이상이 발견되면 적절한 조치가 뒤따르도록 돕고, 태양열로도 충전할 수 있어 따로 전기를 끌어올 필요도 없다.
작은 흙집에서 20년 넘게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건너편에 사는 아들을 소리쳐 부르곤 했다. 피크 레티나로 망막을 찍어보니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것으로 보였고, 다행히 시력을 회복할 가능성도 있었다. 얼마 뒤 병원 버스가 위성항법장치(GPS)로 그녀를 찾아와 큰 병원으로 데려갔고, 그녀는 한쪽 눈의 시력을 되찾았다.
지금도 제대로 된 검사를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전 세계에 약 1200만 명이 있다. 게다가 검사를 받는다 해도 부모와 학교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피크팀은 시력 검사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학생의 눈으로 본 이상 시야와 정상 시야를 한 화면 안에 비교해서 보여주는 앱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보는 세상이 어떤지를 부모들이 눈으로 직접 보도록 한 것이다. 또 가까운 안과에 아이의 정보를 보내고, 부모에게 아이를 병원에 데려오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보내도록 했다. 이렇게 여러 모로 애를 쓴 결과, 전보다 3배나 더 많은 아이들이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기기와 시스템을 공동체에 맞춰 통합했고, 이것을 디자인하는 데 더 오래 걸렸지만, 그냥 하나의 기기나 앱보다 더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바스토로스는 기술만으로 모든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피크를 다듬어 가고 있다.
2017년 4월 아프리카 남부 보츠와나(Botswana)에서 49개 학교 1만 2877명이 피크로 검사를 받았다. 이 가운데 848명은 보츠와나 건강부로부터 안경을 받았고, 93명은 약물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63명은 도시의 큰 병원들을 찾아 치료를 받았다.
2018년 6월부터 피크는 케냐 전역으로 범위를 넓혀가며 30만 명의 아이들이 검사를 받도록 하고 있고, 안경을 기부 받아 필요한 아이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탄자니아와 인도에서도 피크를 사용하고 있다. 또 영국의 동네 의원들에서도 점점 더 많은 의사(GP)들이 피크를 쓰고 있다. 스마트폰에 작은 기술이 더해져 수십, 수백만 명의 아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춰주고 있는 것이다.
더 나은 기술의 쓰임새를 위해
기술의 값어치를 어떻게 매길 수 있을까. 투여된 자본이나 벌어들일 수익의 크기, 또는 만들어낼 수 있는 일자리의 양에 따라 매기는 게 옳을까. 그렇지 않다.
“(사회혁신) 프로젝트들이 지닌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이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미 존재하는 자원(전통적 수공예 기술에서부터 최첨단 기술에 이르기까지)들을 창조적으로 재결합하는 데서 생겨난다는 점이다.”(이탈리아 밀라노 공대 에치오 만치니 명예교수)
한 사회에서 기술의 쓰임새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또 그래야 한다. 몇몇 첨단 기술만이 기술로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란 뜻이다. 국가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앞세워 과학과 기술을 줄 세우고 쥐어짜던 시대는 지나간 지 오래라 믿는다.
기술의 발전 속도와 방향 그리고 쓰임새를 결정하는 건 마땅히 사회 전체의 몫이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치인과 관료와 학계, 과학기술자와 인문학자는 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령을 자기편으로 하려는 신성한 제식을 위해 동맹을 맺었다”고 걱정하는 ‘반(反) 4차 산업혁명 매니페스토’도 그렇게 외치고 있다.
어떤 기술이든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또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값어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 하나, 스마트폰을 부국(富國)의 수단으로만, 드론을 강병(强兵)의 무기로만 여기는 인식이야말로 이른바 ‘4차 산업혁명’과 가장 거리가 멀다.
우리도 이제 그만 호랑이 등에서 내려와 호랑이를 길들여야 할 때다. 우리 모두가 정말 바라는 곳으로 데려다주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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