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 세계를 달군 최고의 뉴스는 단연 브렉시트, 영국의 EU 탈퇴였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일까? 이와 관련된 관측의 대부분은 밝기 보다는 어두운 쪽으로 쏠려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섬나라 영국은 유럽 대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해양 제국으로서 독보적 지위를 누려 왔었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은 나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것은 엘리자베스 1세 때였다. 그 시기 단 하나의 사건이 역사의 흐름이 바꾸어 놓았다. 1587년 칼레 해전에서 영국 해군이 스페인 무적함대(아르마다)를 격파한 것이다.

당시까지 유럽을 호령하던 초강대국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신대륙 개척을 주도하면서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를 뒷받침했던 것이 다름 아닌 무적함대로 대표되는 막강한 해군력이었다. 무적함대는 적선에 접근해 백병전을 전개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영국 해군은 규모나 백병전 능력에서는 무적함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한 조건에서 영국 해군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영국 해군은 불리한 접근전을 피하면서 치고 빠지기 식 게릴라전을 통해 무적함대의 보급선을 교란시켰다. 그러다 거센 바람이 무적함대를 향해 몰아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화약을 가득 실은 화선(火船)을 돌진시켰다. 거센 화염에 휩싸인 배가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 오자 지옥의 불에 타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번지면서 무적함대는 전열이 뒤엉킨 채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때맞추어 영국 함대는 양과 질 모두에서 우세했던 화포를 동원해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다. 무적함대는 재기불능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칼레 해전을 계기로 해전 양상은 백병전 위주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화포 공격으로 승부를 가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바다의 주도권 또한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넘어 갔다. 대영제국을 향한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칼레 해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지휘관인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는 여러 모로 흥미를 자아내는 인물이다. 드레이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3세부터 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유럽과 아메리카를 오가며 노예를 팔아 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멕시코 앞바다에서 스페인 배의 습격을 받아 물건과 배를 몽땅 빼앗겼다. 드레이크는 복수를 다짐했고 결국 스페인 배를 대상으로 해적질을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빼앗긴 재산을 되찾기 위한 행위는 정당하다며 해적 허가증을 내 주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 보물선을 공격하여 엄청난 재화를 약탈했다. 그중 상당 부분은 후원자인 영국 왕실로 흘러들어 갔다. 분노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영국 왕실을 향해 드레이크를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무시했으며 거꾸로 드레이크를 불러 영웅으로 부르며 귀족 칭호까지 부여했다. 영국 왕실과 드레이크는 더욱 밀착되었고 결국은 칼레 해전의 지휘권까지 부여했던 것이다.

드레이크를 특별히 주목한 것은 그를 통해 엘리자베스 1세 당시 리더십의 일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해적 두목이라면 귀족 세계에서 멸시와 배척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런 인물이 가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강한 반발을 사기 쉽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드레이크를 배척하기 보다는 귀족 세계로 끌어들였다. 엘리자베스 1세가 분열과 배제가 아닌 통합적 리더십을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점은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 왔던 스코틀랜드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엘리자베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의 왕위 계승을 뒷받침함으로써 스페인과의 대결에 적극 협력하도록 유도했다.

대영제국을 만든 힘은 국익 앞에서는 신분과 경력, 종족에 구애됨 없이 최대한 힘을 모은 통합적 리더십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영국은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략적 이해에 이끌려 국론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다. 브렉시트를 계기로 스코틀랜드의 독립 움직임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영국이 과거의 영화를 되찾는 것은 고사하고 현상 유지마저 쉽지 않은 상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았다. 과연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영국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국 역사를 거울삼아 우리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간략히 되짚어 보자.

영국 해군이 칼레 해전에서 화포 공격 위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러한 전법을 처음 선보인 것은 아니었다. 한 세기 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바로 그 같은 전법으로 연전연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주력 무기인 조총의 사정거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화포 공격을 가했다. 조선 수군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의 구조 또한 함포 사격에 매우 적합했다. 바닥이 U자 형이었기에 함포 사격 반동으로 흔들릴 가능성도 낮았고 제 자리에서 360도 회전하며 자유자재로 공격할 수 있었다. 반면 바닥이 V자 형인 일본 수군의 함선은 그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근대 해전의 효시는 영국 해군이 아니라 조선 수군이라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엉뚱한 상상을 해 보자.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기량은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이러한 수군 역량을 잘 활용했다면 조선은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백제, 통일신라, 고려 등 한반도 국가들이 뛰어난 선박 건조 능력을 바탕으로 해양강국의 전통을 이어 온 점을 고려한다면 그 가능성은 충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해양강국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농업 중심의 사회구조적 환경이 그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는 최고 통치자인 선조와 조선 수군의 지도자 이순신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선조는 이순신의 탁월한 기량을 인정하여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불신과 경계의 시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순신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선조에 대해 강한 불신과 냉소를 품고 있었다. 선조는 백성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이순신을 매우 불온시 했다. 이순신은 압송 이후 심문 과정에서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했으나 전쟁 이후 닥칠지 모를 불행한 운명을 예감하며 극도의 심리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순신의 최후를 둘러싸고 자살설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영국 엘리자베스 1세와 드레이크가 맺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연을 발견한다. 선조는 국가 발전 비전을 갖고 이순신을 적극 포용하는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는 조선이 세계사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걸은 하나의 요인일지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지나친 비약이라고 펄쩍 뛰겠지만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추론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각종 진영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보수 성향의 언론 매체는 한국 사회를 좌우 대결 구조로 몰고 가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안타깝게도 박근혜 대통령은 진영 논리의 화신이 되어 왔다. 장달중 서울대 명예 교수의 지적처럼 박 대통령은 반대 진영 사람들을 국민의 일부가 아닌 적으로 규정해 왔다. 통합적 리더십은 자취를 감추고 분열적 리더십이 국민을 끝없는 갈등과 대립 속으로 몰아 왔다. 소모적 대립만을 거듭하면서 한국경제는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모두가 자파 이익에만 집착하는 정략적 이해가 빚어낸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2017년 대선은 통합적 리더십을 창출하는 역사적 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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