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생명보험이 정말 기묘한 제도로 여겨진 적이 있다. 보험은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생명보험이 대비하려는 위험은 사람의 생명, 즉 죽음이다.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있는 인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생명보험은 일반적으로 일정 기간 생존하면 만기보험금을 지급받고 이전에 사망하면 사망보험금을 받기로 계약한다. 이 중 만기보험금만을 고려하여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동성을 고려하면 차라리 저축을 하거나 다른 투자처를 찾는 편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생명보험 제도의 핵심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사망사고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불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인간의 근본 감정의 위치에 놓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묘한 점은 인간의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데 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는 현재의 소비를 더 선호하는 합리적인 개인이 당장 소비할 수 있는 돈을 굳이 저축하는 이유가 미래 소비에 있다고 설명하며, 따라서 문제의 해를 구하기 위해 죽을 때 있는 돈을 다 쓰고 죽는다는 조건을 전제로 하곤 한다. 직관적으로도 이는 비현실적인 조건이다. 사람들은 자녀 등의 가족에게 재산을 남겨 상속할 뿐만 아니라 죽기 전에 증여하기도 한다. 이 맥락에서 소비로부터 효용을 얻는 인간의 진짜 미스테리는 자기가 쓸 돈을 굳이 자녀를 낳아 같이 쓴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이 미스테리를 경제학적으로는 효용함수에 자녀의 소비에 대한 효용, 즉 이타심을 넣어 해결하기도 한다. 자녀는 자신의 자녀에게, 그 자녀는 또 그 자녀에게 이타심을 가지므로 이 해결방법은 수리적으로 무한해지는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지만, 동의하기 어렵진 않다. 오히려 이타심을 미스테리로 만드는 접근이 미스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생명보험의 대상이 되는 위험은 사실 보험가입자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의 죽음 뒤 근친이 겪게 되는, 생활이 불안해질 가능성이다. 우리, 적당히 이타적인 개인들은 건강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미리 죽은 후 남겨질 사람들을 걱정한다. 그렇지 않다면 생명보험이란 존재했을 리가 없는 제도이다. 나아가 위험이 더 크고 구조화된 사회에서 생명보험에 대한 수요는 더 크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생명보험의 ‘생명’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LIFE’는 종종 ‘생활’로 번역된다. 세 가지 색 시리즈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거장, 키에슬로브스키 감독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이중생활은 프랑스어로는 la double vie, 영어로는 the double life를 번역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때의 life는 생명으로 번역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한국어 ‘생명’과 ‘생활’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저쪽 언어에는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구분했다고 한다. 한국어 생명 또는 목숨에 해당하는 조에zōé는 살아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생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비오스bíos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가리켰다. 고대 세계에서 정치 영역인 폴리스에 포함되지 않았던 단순한 자연 생명인 조에가 국가 권력의 통치 대상이 된 현상, 즉 생명정치bio-politique는 말년에 푸코가 천착했던 주제였다.

나의 죽음은 어떻게 가까운 타인의 생활을 불안하게 만드는가? 이 질문은 역설적으로 다음의 질문으로 연결된다. 나의 삶에서 나 자신과 가족의 생존, 그리고 조에의 쳇바퀴 바깥에서 영위하는 생활, 비오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어느 정도일까? 복지국가 논의에서 익숙한 개념인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과 관계가 있다. 노동을 상품으로 팔지 않더라도 생활할 수 있음을 가리키는 노동력의 탈상품화가 달성된 상태에서 개인의 생존은 당연한 권리이므로 노동을 강요당하지 않을 수 있다. 노동은 생활의 내용이자 자원이 될 수 있다. 탈상품화가 복지국가 논의에서 등장한 이유는 그것이 복지를 통해 달성 가능하다는 검토와 기대에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나와 가족의 생활, 나아가 생존이 절실하게 나의 노동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를 고도의 상품화 상태라고 하자. 건강한 개인들이 죽음 이후, ‘노동하는 내가 사라질 때’를 미리 걱정해서 생명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불안해하는 현실이 바로 그런 고도의 상품화 상태가 아닐까?

그림 1은 지난 27년간 한국 임금노동자들의 평균적인 노동시간 추세를 나타낸 것이다. 1990년부터 기존의 주48시간에서 주44시간, 2004년부터 주40시간 근무제를 점진적으로 확대 시행한 결과, 월평균 총 노동시간은 50시간 이상 단축되었다. 소정노동시간의 감소 추세가 비교적 완만한 것으로 보아 초과노동시간의 단축이 적지 않은 기여를 해왔다. 그림 1만 놓고 말하면, 그동안 한국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은 초과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대함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의 월평균 총 노동시간을 각각 나타낸 그림 2를 그림 1과 비교하면, 월평균 소정노동시간의 그래프가 여성의 월평균 총 노동시간 그래프와 거의 같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체의 총 노동시간 감소가 남성의 총 노동시간 감소보다 급한 것은 여성의 구성비가 높아진 데에서 기인한다. 즉, 여성은 주로 소정노동시간만큼 일하지만, 남성은 초과노동을 더 한다. 여기에서 질문 하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시간을 마음대로 선택하고 있을까? 만약 마음대로 노동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초과노동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해석할 것이고, 고용된 일자리의 규범화된 노동시간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성과 남성의 일자리가 분리되어 있다고 볼 것이다. 초과노동을 통해 장시간 노동을 하는 일자리에 남성이 집중된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노동시간은 모두 크게 줄어들었으며 여전히 여성의 노동시간이 남성 88% 수준으로 짧다. 그러나 여성의 더 짧은 노동시간이 더 긴 여가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굳이 자료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경험적으로 동의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굳이 하나의 자료를 제시하려고 한다.

한국인이 생활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가 있다. 통계청이 1999년 이후 5년마다 실시하는 ‘생활시간조사’는 이미 서유럽, 북미 및 중남미,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서 실시하고 있다. 그림 3은 동일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국가들의 분포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노동시간’을 시장 노동과 비시장 노동으로 분류하는데, 이 자료는 비시장 노동의 규모 파악 등의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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