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경제학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경제이론 중 포획이론(Capture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규제기관이 피 규제기관을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피 규제기관에 의해 포획되는 현상을 말한다. 규제정책이 실제로는 공공의 이익에 도움에 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정부 개입을 줄이고 시장이 경쟁원리에 따라 움직이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 이론의 핵심이다. 불필요한 정부 규제는 시장의 효율성을 감소시켜 문제만 키우게 된다는 이른바 ‘정부 실패’의 한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정부 규제 정책이 지닌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이 이론에 힘입어 시장 자유주의자들은 피 규제기관에 포획된 규제기관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으니 정부는 자꾸 시장에 개입하려 하지 말고 내버려두는 것이 정답이라고 주창한다. 이 주장이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 주변에서 유사 사례를 찾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1년에 발생한 저축은행 사태다. 전직 금감원 출신 인사들이 대거 저축은행에 취업하여 피감기관에 포획된 상태에서 내부비리를 덮는 등 여러 불법적 행위에 가담한 것은 물론, 모 저축은행에 파견되어 있던 현직 감독관들은 곧 영업정지가 내려질 것을 사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전날 저축은행 임직원들에 의한 특혜 인출행위를 방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최근 땅콩 회항사건이 발생하면서 밝혀진 대한항공과 국토부간 검은 유착도 마찬가지다. 대한항공 출신들이 대거 국토부에 입성하여 터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사건이 터지자 내부정보를 유출하는가 하면 엉터리 조사로 사건을 무마하려 하는 등 ‘칼(KAL)피아’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오래 전부터 대한항공 출신들은 국토부에 자리를 꿰차고 전직 국토부 관료들은 대한항공에 취업하는 끈끈한 밀월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앞뒤 정황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뿐만이 아니다. 건설, 원전, 철도 등 이른바 ‘마피아’라는 오명이 붙은 대부분의 영역에서 감독기관과 피감기관들이 ‘서로가 서로를 포획하는’ 긴밀한 커넥션을 유지하며 공생하고 있다. 이쯤 되면 정부의 규제정책이 피 규제기관을 관리하기는커녕 오히려 소비자 피해만 키운다는 이론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모든 정부부처들이 규제 허물기에 매진하고 있다. 대통령은 규제를 거대 악으로 규정하고 규제를 줄이지 않으면 나라가 곧 침몰할 것 같은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규제를 풀면 정말 경제가 살아날까? 탈규제 정책을 밀어붙이는 진짜 이유가 진정 규제 기관과 이익집단 간 짬짜미를 막고, 국민의 편익을 위해서일까.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든다. 규제를 풀면 이익집단들이 공익을 위해 정직하게 일하고 비정상이 정상화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는 규제의 필요성과 규제의 한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극히 유아적 판단이다. 규제를 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규제 장치가 효과적으로 작동되려면 어떤 조치가 따라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접근법이다.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는 조건에서는 규제를 풀건 풀지 않건 기득권을 가진 집단들은 시장 지배력을 계속 유지해갈 것이 자명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규제란 푼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규제 완화 후 일정한 시점이 흐르고 나면 새로운 규제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본디 규제란 이유가 있어서 만든 것인데, 발생 원인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규제를 없애면 그 빈 공간으로 이익집단들이 침투해 들어올 것은 자명한 이치 아닌가. 따라서 반드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규제 장치가 도입될 수밖에 없다. 정부와 이익집단 간의 검은 유착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 한, 국민 입장에서는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부가 제 역할을 수행하려면 이익집단에 포획되지 않기 위한 조치를 강구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의 규제 혁파란 곧 정부의 직무유기를 선언한 것이나 진배없다.
대표적인 규제 업종이라 할 수 있는 금융 부문을 살펴보면 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금융 산업에 대한 정부 개입 확대는 선진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재 각국 정부들은 민간은행의 지분을 인수하거나 (영업ㆍ재무)규제를 강화하는 방식을 통해 금융 산업 전반에 강력하게 개입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의 민간은행에 대한 (지방)정부의 개입 강화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금융 산업의 불안정성과 금융회사들의 도덕적 해이 때문이다. 금융회사들은 이익이 생기면 자신들의 호주머니로 넣지만 손실이 발생하면 사회로 떠넘기는 구조 위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은행이 투자손실로 문을 닫게 되면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은행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막대한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이 돈이 어떤 돈인가. 국민들이 피땀 흘려 벌어서 낸 세금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손실이 발생해도 자신들이 책임질 필요 없이 국가가 알아서 처리를 해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언제든 공적 자금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각국 정부들이 앞 다투어 은행을 국유화하고 금융회사들의 고삐를 죄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비정상적인 산업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가고 있다. 기 투입된 공적 자금을 회수한다는 이유로 국가 가 소유한 은행의 민간 매각을 당연한 일로 해석하고 있고 금융회사의 자율과 창의를 위해 사전적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조치를 내놓고 있다.
대관절 금융회사의 자율과 창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민간은행이 창의성을 발휘한다면 필경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로 움직일 것인데, 규제 완화가 은행의 순기능인 ‘원활한 자금 중개를 통한 다수 국민의 금융 편의 향상’의 방향으로 작동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008년을 기점으로, 금융 산업에 대한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신자유주의 이론은 산산이 부서졌다. 오죽하면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라 불리는 세계은행조차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해소하려면 규제 강화, 은행의 직접 소유 등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보고서(Rethinking the Role of the State in Finance, World Bank, 2013)를 냈을까.
과거 시장 만능주의자들은 경제적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위기의 원인은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빈곤한 정책 때문이라며 정부의 시장개입을 강하게 질타해왔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큰 금융위기라 칭해지는 두 사건 즉, 1929년 대공황과 2008년 금융위기가 모두 금융규제가 크게 약화된 시기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목도하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된지 오래다.
규제 만능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규제를 해석하는 관점과 철학이다. 하지만 현 정부의 규제개혁 조치들은 완화를 위한 완화, 개혁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유와 명분은 있으되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한 마디로 ‘목적어가 없다’.
지금 이루어지는 규제 완화 조치들의 다수는 경제 살리기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결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함이라는 비판을 면키 힘들 것이다. 무분별한 규제완화가 얼마나 끔찍한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우리는 지난 세월호 참사를 통해 똑똑히 목격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아무 관심이 없는, 오직 사리사욕만을 채우려는 사익추구 집단에 의해 언제, 어디서, 어떤 무서운 일이 생길지 모를 일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다수 언론은 이에 동조하고 있고 야당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금 규제 완화보다 시급한 것은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재정립, 이익집단에 포획된 ‘관피아’를 척결, 그리고 다수 국민의 편익을 도모할 수 있는 효과적인 규제정책을 수립ㆍ집행하는 것이다. 지금 시장 한복판에 설치되고 있는 저 섬뜩한 단두대는 정녕 누구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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