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의 인물상과 진보운동가의 풍모④


 


             사상, 세계관이 풍모를 낳는다
진보운동가의 활동 방식이나 풍모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능력의 문제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는 결코 성격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와 사물현상을 어떤 시각과 입장으로 대하는가, 즉 사상과 세계관의 반영이다.


그래서, ‘사상과 뜻이 높아야 인품도 높아진다’또는 ‘사상이 풍모를 낳는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운동가의 풍모와 이른바 ‘인간적 매력’또는 ‘카리스마’사이의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멋쟁이 정치가’몽양 여운형의 인품, 다시 말해 그의 실력과 품성 역시 몽양의 사상과 세계관의 투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애국, 애족의 정치이념


진보적 변혁운동가는 애민, 애족의 정치이념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생활환경이 다양한 것처럼 사람마다 추구하는 이념이나 세계관 역시 천자만별이지만 사람이 특정한 지역에서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전제하면 가장 귀중한 것이 민족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이념 역시 자기민중,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이어야 할 것이다.


진보운동에 뜻을 둔 사람들이 목적하는 바는 개인이 아닌 민중의 이익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민족과 민중의 복리를 제일 중시하는 정치이념을 가져야 한다. 애국 애족의  정치이념이 꼭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이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거나 민족문화의 융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들을 국수주의자, 민족주의자로 규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기가 태여 난 고향, 함께 살아온 가족과 이웃, 그것이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겨레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그 어떤 진보나 변혁을 지향한다는 것은 방향타 없이 항해에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애민, 애족의 정신이 없이는 사회변혁과 역사 진보의 근본 목적과 방향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몽양이 역사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되고 회고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졌던 애민, 애족의 정치이념 때문이라고 믿는다. 어떤 이는 몽양을 “공산주의에 부화뇌동한 회색분자”라고 했고 다른 이는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민족주의자”라고 했다. 심지어 몽양과 동시대를 살았던 미군정 소속 역사가는 몽양을 “한국 제일의 민주주의자”라고 말했다.


이런 규정들은 과연 온당한 것인가.


몽양은 22살 때 기독교 신자가 된 뒤로 전도사업을 꿈꾸며 목사가 되려고 평양 장로교 신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다.  그는 또 1922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 피압박인민회의’에 조선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고 레닌과 만났으며, 러시아혁명이 전세계에 강렬한 파장을 불러왔을 때는 1925 5월 중국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이 창립되자 주저 없이 입당했다.


이 과정만 보면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일 수도 있고 휴머니스트 일 수도 있으며 공산주의자로 불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얼마든지 갈아 입을 수 있는 옷처럼 겉으로 비쳐진 외양일 뿐이고 그의 실체를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몽양을 연구해온 한 전문가는 말한다. “그는 어떤 정치이념보다는 민주주의와 민족, 그리고 특정 계급보다는 민중이라고 하는 세 가지 큰 개념을 통해서 다양한 정치이념을 포괄하고자 했고, 이를 통해 겨레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태균,<어울림의 지도자, 몽양 여운형>,격월간 웹진‘민족화해’2004.9.10


이처럼 애민, 애족에서 출발한 정치이념을 가졌기 때문에 몽양은 광복 후 조성된 그토록 복잡한 정세에서 ‘민족의 이익’을 척도로 반 외세 민족통일 노선에 기초한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전개해 민족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자존의 배짱


몽양은 배짱 있는 인물로도 유명했는데, 그는 곧잘 “내가 정의라고 믿는 것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몽양이 1929년에 도쿄에서 일본의 육군대신 다나카와 만났을 때의 일이다. 다나카가 “만일 조선인들이 끝까지 저항한다면 2천만명 가량의 조선인을 일시에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하자 몽양은 “당신도 글을 읽은 사람이면 ‘삼군지수 (三軍之帥)는 가탈(可奪)이언만, 필부지지(匹夫之志)는 불가탈(不可奪)’이라는 말의 참뜻을 알 것이오. 2천만명을 일시에 다 죽일 수도 있고, 여기 앉아 있는 여운형의 목을 벨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2천만명 조선사람의 혼까지 죽일 수는 없을 것이오”라고 받아 쳤다.


몽양 여운형의 배짱도 그의 강인한 민족자존과 통일애국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몽양은 영어, 중어를 비롯해 여러 나라 말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어학의 천재’로 불렸음에도 일본인들 앞에서는 일본어로 말하기를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몽양 여운형이 광복 후 여러 차례 평양에 가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눈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그런데 그의 방북에 즈음해서 측근들이 “저쪽에서 먼저 찾아온다면 몰라도 선생님이 먼저 찾아갈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하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일인데 선후배나 체면을 가릴 때인가. 오직 최선을 다해볼 따름이지”라며 기어코 북행 길을 떠났다.


여기에는 통일에 대한 그의 소신, 즉 “겁쟁이들이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겠는가? 과감히 달려들 수 있는 대담성이 있어야 통일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민족통일의 대도를 위해서라면, 정치적으로 먹고 먹히는 것쯤은 별 문제가 안 된다. 작은 이익을 버리고 큰 이익, 민족전체의 이익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인식이 . 깔려 있었다.


몽양의 방북 여정에는 이런 일화도 남아 있다. 그는 광복 후 38선을 넘을 때 호위병도 권총도 없이 자유롭게 왔다갔다했다고 한다. 그곳에는 당연히 미군이 보초를 서있었으며, 그 보초는 몽양을 보고 통과할 수 없다며 길을 막았다. 그러나 몽양은 그에게 “여기가 누구네 땅이냐”고 물었다. 그가 “한국 땅”이라고 대답하자 “그럼 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다시 물었다. 그가 “아, 나는 미국사람”이라고 대답하자 몽양은 “이 놈아, 네 입으로 분명 한국 땅이라고 했지? 한국 땅에서 왜 미국 놈이 한국사람의 앞을 막느냐!”라며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배짱은 ‘기질’의 문제로 인식되는데 몽양이 보여준 배짱도 운동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품성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배짱이 있어야 복잡다단한 정세에서도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곧바로 나갈 수 있다. 만약 좌우의 비난과 비판에 겁먹고 초심이 흔들린다면 그 사람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정의와 진리를 그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배짱은 주관이나 독단과 구별된다. 사회발전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확신을 갖고 주변환경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면서 과감히 전진해 나가는 배짱, 그것을 갖는 것은 바로 진보운동의 승리로 향하는 첫 걸음이다.


 


맺으며


삶의 가치는 사회적 공헌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한다. 지금까지 몽양 여운형의 인물상을 통해서 진보운동을 인생의 최대 가치로 선택한 운동가들이 갖추어야 할 풍모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연재를 마감하면서, 필자 자신도 포함해서 다같이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진보운동가란 결코 특별한 사람도 아니며, 그들이 활동과정에 발휘하는 용기나 헌신성도 결코 타고난 것도, 하루 아침에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라는 것, 오직 부단한 실천과 수양을 통해 갖추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몽양은 생애의 두 번째 수감생활을 하던 중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동지들과 함께 해방에 대비한 정치 결사체로서 ‘조선민족해방연맹’을 조직하기로 결의했는데, 이때 그가 내건 것이 ‘동지 획득, 조직 준비’와 함께 ‘자기 완성’(!)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