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의 인물상과 진보운동가의 풍모②” 예로부터 혁명가나 사회운동가가 공장이나 농촌마을에서 노동자, 농민과 어울리면서 한동안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 기록이나 일화를 읽다 보면 한가지 신통한 공통점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공통점이란, 혁명가나 운동가들은 물론 그들과 얼굴을 맞댄 노동자, 농민들이 서로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상대방을 파악하는데 며칠이 걸리지만 노동자, 농민, 서민들은 자기들 앞에 나타난 혁명가나 운동가들이 어떤 사람인지 순간에, 적어도 단 시간 내에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는 체 했다가 코 다치거나 혁명가도 아니고 운동가도 아닌 행세꾼으로서의 정체가 드러나서 망신한 사람들 이야기도 적잖다. 그래서 변혁적 이념과 실천의지와 각오정도와 도덕품성 문제와 함께 지도력 문제가 진보 운동가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풍모 문제로 제기된다. 몽양 여운형은 벌써 30대 중반에 뛰어난 풍채와 함께 일본 정계까지 흔들어 놓은 담력과 기질, 대단한 영어실력 등으로 일약 “국제적 명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운동가들이 갖추어야 할 실력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진보 운동가들은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진보운동가는 뭐니 뭐니 해도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 진보운동의 핵심들로서 당연한 이야기 이겠지만 변혁운동에 관한 사상, 이론에 정통해야 함은 물론, 일반 지식이나 상식에 이르기까지 특히 민중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 또한 자기가 유식해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중을 깨우쳐주고 잘 이끌자는 것이 목적인 만큼 자기가 아는 것을 정확히 전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언변까지 갖추어야 한다. 몽양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라는 신문사 사장을 지냈다고 하니 그가 그만한 학식과 글재주를 갖추었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몽양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어떤 전문가에 의하면 그는 영어, 중어, 러시어 등 8개국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한 “어학의 천재”였다고 한다. 여운형은 훗날에 웅변가로서도 명성을 떨치는데, 그는 젊은 시절에 노방연설을 하다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스스로의 격정에 못 이겨 눈물을 뿌렸고,그러면 이를 경청하던 길가의 청중들이 다 감동해 따라 울었다고 한다. 하루는 말을 타고 지나던 양평군수가 그의 연설을 듣고 나이를 물어 본 뒤, “아, 훌륭한 젊은이로다. 내가 그대의 연설을 듣고 일진회 (一進會 친일단체)을 탈퇴할 생각이 들었다”하고 옷소매로 눈물을 흠치며 사라졌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데 넓은 인간세상에 유식한 사람이나 글재간, 말재간을 갖춘 사람은 헤아릴 수없이 많다. 문제는 진보운동가에게 필요한 유식함이다. 한마디로 위에서 소개한 것 같은 지식이나 재주들이 그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진보운동에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운동가라고 하면 그저 지식이 풍부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정세에 민감해야 하며 국내외의 정치, 경제, 군사실정을 환히 통찰하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에 대처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책략을 고민 제시해야 한다. 이 같은 능력은 진보운동을 탄압, 말살하려는 세력과의 투쟁에서 항상 상대를 피동에 몰아 넣을 전략이나 묘술을 갖고 있어야 할 운동가에게 절실한 것이다. 미, 영, 양국과의 전쟁(태평양 전쟁)이 불가피해진 일제는 중국전선에 투입되어 있던 병력을 돌리기 위해 중국과의 강화조약을 맺으려 하고 여운형에게 그 화평공작을 종용했다. 그런데 몽양은 화평공작에 임할 듯 말듯한 위장전술을 취하면서 오히려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1942년에는 장차 조선이 해방될 때를 대비해 국민이 먹어야 할 식량에 대한 조사와 그 대책을 세우도록 하는 동시에 해방시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치안대를 조직할 상세한 계획도 세우게 했었다. 그렇다고 진보운동가가 유식하기만 하고 낭만이 없으면 무미 건조해서 재미가 없으며, 대중은 이 같은 사람 역시 멀리 한다. 그래서 운동가는 생활을 즐길 줄 알며 향유할 줄 아는 감정적인 인간, 열정과 풍만한 정서를 지닌 인간이 될 것이 요구되기도 한다.이는 결국 문화정서적 소양의 문제인데 그러한 의미로 몽양 여운형이 만능 스포츠맨이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51회 보스턴 마라톤(1947.4) 우승자 서윤복 선수는 몽양을 조선의 이름을 떨친 스포츠맨들을 한 품에 안아 아끼고 사랑했다는 의미로 “체육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했었다. 대중이 바라는 것은 선비가 아니다 결국 진보운동가는 유식해야 하지만 결코 선비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예리한 통찰력과 선견지명을 갖고 정세를 판단해도, 또한 그에 기초해 투쟁 전략을 주도 세밀하게 설계했다고 해도, 일단 결심할 순간에 우물쭈물하거나 운동을 대담하게 추진하지 못한다면 그만이다. 결국은 행동면에서의 대담성과 용감성, 적극성과 전력투구 등의 문제인데, 이는 바로 몽양 여운형의 정치적 특색이기도 했었다. 몽양 여운형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국채보상, 절연운동이 벌어지자 이에 적극 참가해 술과 담배를 딱 끊었다. 조선이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로 입에 안 대겠다는 결심을 한 그날 이후 몽양이 술을 마시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몽양은 해방이 되자 친지들이 이젠 마시라고 권고했지만, 나라가 통일된 다음에야 마시겠다고 역시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몽양의 신념에서 오는 완고함을 보여준 일화인데, 이 같은 일화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이야기라면 그가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으로 있을 때의 “일장기 말소사건” 일 것이다. 1939년 8월
– 운동가는 실력가라야 한다 –
계속
1939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몽양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사에서는 손기정 선수의 우승 사진이 실린 주간지 “아사히스포츠”를 입수하자 일장기를 지운 채 8월 13일자로 그 사진을 내보냈다. 12일이 지난 8월 25일, 이번에는 “동아일보”에서도 똑 같은 일을 행했다.
또한 여운형이 얼마나 동지적 의리가 깊고 능숙한 책수였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도 있다.
대담성과 용감성, 적극성 등으로 특징 지어지는 몽양의 활동 스타일은 당연히 일제나 반동들의 탄압을 뒤따르게 했었다. 그래서 몽양이 어떤 사건 때문에 구속되었을 때 취조 경관이 그에게 한 친구와 상의한 내용을 빠짐 없이 이야기하라고 요구했다.
이 같은 경우, 묵비권을 써서 그 친구하고의 신의를 지키려 하거나 아니면 친구가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해서 의심을 품거나 동요한 끝에 압력에 굴복해서 결국은 친구와의 신의를 잃어버리었을 뿐 아니라 자기 지조까지 팔아 버리었다는 이야기들도 적잖다.
그러나 몽양은 “그는 나의 친우다, 매일 상종하는데 그 많은 이야기를 어찌 다 일일이 기억할 수 있는가, 그의 공술이 다 옳다고 하고 나도 감방으로 가면 그만이 아니냐” 고 말하고는 친우와의 신의도 지키고 취조관의 시끄러움에 서도 벗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