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시민,민중,대중 어떻게 부르든 우리의 저항이 일단락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어떤 변화를 위한 중요한 순간이라면, 되풀이하지 말아야할 것과 계승해야할 것을 잘 판단해보는 것이 중요한 시점일 것 같습니다.
개혁의 칼을 어설프게 휘두르면 옆 사람만 다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으면 외려 나와 옆 사람만 다칩니다. 이건 2004년 17대 총선 이후 국회에 들어간 소위 개혁세력에게도 해당되고, 작년 한국사회를 압도했던 촛불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물론 한국 시민들의 저항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때(그게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도 토론이 필요하지요) 지난 해의 모습은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은 일단 오류의 지점을 확인하고, 바로 지금, 혹은 머지 않은 내일 그 오류를 동일하게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지요.
그리고 제가 느끼는 아쉬움은 머리에 든게 많은 사람들보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게 버거운 사람들이 더 크게 느끼는 아쉬움이라 생각되는데, 아닐런지요?
Kritik 라는 블로그에 그리스 항쟁에 관한 포스트(외신 번역입니다만)를 1 ~9 편까지 올려 놓은 바 있습니다. http://blog.jinbo.net/cheiskra/?pid=24 ~ 32 까지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 포스트의 8번째 연속물(http://blog.jinbo.net/cheiskra/?pid=31)의 주석에 아래와 같이 중도 좌파(우리나라는 특이하게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정당이었죠.)의 노선이탈과 같은 좌측 공백이 극우파 혹은 이윤지상주의 정권의 등장을 가져오는 원리를 일부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극좌파나 상대적 급진파가 한 예외(가령 에콰도르와 같은; 구티에레즈 -> 과도정부 -> 코레아)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이유는 아래 주석과 같은 원리일 겁니다. 물론 급진파가 일부 중도좌파 혹은 자유주의자들과 부적절한 공조 혹은 연정참여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이를 비판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운동의 냉소 혹은 교착 같은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적절할 겁니다.
(역주1) 중도가 없어 과격파가 영향력을 확대한다고? 온건한 그리스 사민당(PASOK)은 그동안 여당 및 제1 야당의 자리를 지켜왔다. 즉 그 중도란 것은 이미 (유럽의 제3의 길 광풍과 더불어) 널려 있었던 것이다. 무프에 의하면, 오히려 사민당이 선명한 좌파노선을 포기하면서 대중의 불만을 더이상 정치적으로 대변하지 못하게 되자, 극우파(혹은 과격파)가 그 빈틈을 차지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극좌파가 대중에게 자본주의의 물질적-비물질적 제약의 총체적[및 과학적] 극복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극우파처럼 지지를 획득하기란 일반적으로 더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Mouffe, Chantal. 2007. ?ber das Politische: Wider die kosmopolitische Illuion. Frankfurt am Main: Suhrkamp. S. 40, 72, 92. 참조. 물론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의 정치조건의 불가역성을 애써 무시하고, 기존 정당체제를 고수하면서 노선의 선명성 회복만을 주장하는 무프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여기에서는 Rucht를 비판하는데 무프를 활용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하자. 그리스 사민당 집권 전력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이외에 새로운 전망을 찾아내고 실천해야 하는 점에서 올해 4월과 10월 그리고 내년의 지방선거와 같은 선거전 식 방법은 손우정님 말씀따나 감내를 전제로 한다는 위험성을 안고 있지요. 새로운 전망 제시는 선거전이 아니라 운동일텐데 이의 교착 상황이 지난 해 촛불 시위 등으로 일부 해결된 것도 있지만 지난한 과정이라는 생각이네요.대안연합이 그 시금석일텐데 예전에 언급하신 대로만이라도 된다면…
지금 시점에서 가능할 것이다,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추측을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측해야 할 것은 주체들의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조건이 현실에 부여하는 가능성의 폭입니다.
조직된 대오는 민주노총일 수 있고, 말씀하신 어용노총일수도 있습니다. 환갑에 일흔이 넘은 전농과 여농일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은 낮아보입니다만 대학생일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정부의 대응이 그런 허약하게 조직되지 않는 미조직 힘으로는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끔 모든 경로를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뚫기 위해서는 기존 조직대오가 아니라 새로운 조직을 만들건 어쩌건 간에 ‘조직된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구조가 짜여지고 있습니다
별 가능성이 보이지 않더라도 조직대오가 뚫고 가지 않으면 별 희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외려 그게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재작년 허무하게 대선이 지나가고, 총선마저 저렇게 되었을 때, 어느 누가 5월 초부터 범국민적 저항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나요? 총선 직후에는우리 사회 어디를 둘러봐도, 별다른 투쟁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습니까?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를 떠나, 그것 아니면 별다른 희망과 가능성을 찾기 힘든 요즘입니다. 논쟁을 되냐 마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현실로 만들지’, ‘어떻게 효과적인 저항을 펼치지’로 이어보면 더 좋을 듯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 상황에서 조직된 대오의 강력한 투쟁은 비정규직이 조직되어 강력한 결집력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이 쉬운일도 아니고 한두달에 될 일고 아니구요.
어떻게 성공적인 운동을 현실로 만들지, 어떻게 효과적인 저항을 펼칠지를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생각을 한다면, 조직된 대오의 강력한 투쟁이 아니라 느슨한 연대의 거대한 물결쪽을 고민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제 생각이 틀린 것일 수도 있구요.
문제는 사회 기층에서 들끓고 있는 범국민적인 분노를 어떠한 그릇에 담아 어떻게 표출시킬 것인가. 이 끓어오르는 용암과 같은 거대한 변혁의 시기에 이 엄청난 에너지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이며, 이런 전무 후무한 기회를 어떻게 살려서, 이 사회를 미래를 향해 승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 듭니다.
조으니/ 동감합니다. 한국사회 운동사에서 기존의 조직대오는 사실상 대중과 괴리되면서 대중에 대한 영향력과 지도력을 상당부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2002년, 2004년, 2008년의 촛불저항에서 보듯이 미조직 대중의 자발적 참여가 운동을 선도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유형의운동은 문제해결이라는 측면에서는 취약하지만, 의제의 확산에는 상당히 위력적입니다.
다만, 위 글에서 2009년 초반에 조직대오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시기적 특성이 미조직 대중이 운동을 주도하기 어려운 국가의물리적 억압체제가 굳건하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저항에도 국가가 억압의 칼날을 들이댈 때는, 방어력이 없는 미조직대중보다 일정한 억압을 감당할 수 있는 조직대오의 힘이 필요합니다. 만일 기존의 조직이 문제가 많다면 새로운 조직이라도 만들어 내야 합니다. 혹여 그렇게 어떤 정치적 기회? 이런 국면이 확장되면 그 내에서 다시 미조직 대중이 운동을 주도할 수 있겠지요.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분출이 아니라 분명한 문제해결을 이룰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을 통한 전략전술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제까지 운동단체들은 분노의 표출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 생각을 보여주는 것에 치중했고, 이 과제 조차도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문제의식의 표출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운동을 고민할 때입니다. 더 이야기 많이 나눕시다.
이글에 배어 있는 우려에 대해 무척 공감합니다.
하지만, 명박산성앞에서 촛불들이 했던 고민은 허송세월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리스의 저항이 국제적인 기준이 아니듯이 우리의 사려 깊음에 대해 너무 아쉬워 할 이유도 없다고 여깁니다.
과거에도 선비들이 칼을 들기전에 했던 노력과 외침이 있었습니다.
가진게 많아 여유로운 사람들이, 머리에 든게 많아서 대중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무얼 했다고 자꾸 시민들에게 아쉽다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톡 까놓고 이명박 정권이전에도 부동산은 가격은 미쳐 있었고, 대학들은 등록금으로 재테크를 해왔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버거운 시민들에게 무언가를 자꾸 주문하기전에, 우선해야 될 것이 있을 겁니다.
국민,시민,민중,대중 어떻게 부르든 우리의 저항이 일단락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어떤 변화를 위한 중요한 순간이라면, 되풀이하지 말아야할 것과 계승해야할 것을 잘 판단해보는 것이 중요한 시점일 것 같습니다.
개혁의 칼을 어설프게 휘두르면 옆 사람만 다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으면 외려 나와 옆 사람만 다칩니다. 이건 2004년 17대 총선 이후 국회에 들어간 소위 개혁세력에게도 해당되고, 작년 한국사회를 압도했던 촛불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물론 한국 시민들의 저항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때(그게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도 토론이 필요하지요) 지난 해의 모습은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은 일단 오류의 지점을 확인하고, 바로 지금, 혹은 머지 않은 내일 그 오류를 동일하게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지요.
그리고 제가 느끼는 아쉬움은 머리에 든게 많은 사람들보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게 버거운 사람들이 더 크게 느끼는 아쉬움이라 생각되는데, 아닐런지요?
Kritik 라는 블로그에 그리스 항쟁에 관한 포스트(외신 번역입니다만)를 1 ~9 편까지 올려 놓은 바 있습니다. http://blog.jinbo.net/cheiskra/?pid=24 ~ 32 까지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 포스트의 8번째 연속물(http://blog.jinbo.net/cheiskra/?pid=31)의 주석에 아래와 같이 중도 좌파(우리나라는 특이하게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정당이었죠.)의 노선이탈과 같은 좌측 공백이 극우파 혹은 이윤지상주의 정권의 등장을 가져오는 원리를 일부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극좌파나 상대적 급진파가 한 예외(가령 에콰도르와 같은; 구티에레즈 -> 과도정부 -> 코레아)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이유는 아래 주석과 같은 원리일 겁니다. 물론 급진파가 일부 중도좌파 혹은 자유주의자들과 부적절한 공조 혹은 연정참여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이를 비판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운동의 냉소 혹은 교착 같은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적절할 겁니다.
(역주1) 중도가 없어 과격파가 영향력을 확대한다고? 온건한 그리스 사민당(PASOK)은 그동안 여당 및 제1 야당의 자리를 지켜왔다. 즉 그 중도란 것은 이미 (유럽의 제3의 길 광풍과 더불어) 널려 있었던 것이다. 무프에 의하면, 오히려 사민당이 선명한 좌파노선을 포기하면서 대중의 불만을 더이상 정치적으로 대변하지 못하게 되자, 극우파(혹은 과격파)가 그 빈틈을 차지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극좌파가 대중에게 자본주의의 물질적-비물질적 제약의 총체적[및 과학적] 극복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극우파처럼 지지를 획득하기란 일반적으로 더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Mouffe, Chantal. 2007. ?ber das Politische: Wider die kosmopolitische Illuion. Frankfurt am Main: Suhrkamp. S. 40, 72, 92. 참조. 물론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의 정치조건의 불가역성을 애써 무시하고, 기존 정당체제를 고수하면서 노선의 선명성 회복만을 주장하는 무프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여기에서는 Rucht를 비판하는데 무프를 활용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하자. 그리스 사민당 집권 전력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http://ko.wikipedia.org/wiki/%EC%A0%84%EA%B7%B8%EB%A6%AC%EC%8A%A4_%EC%82%AC%ED%9A%8C%EC%A3%BC%EC%9D%98_%EC%9A%B4%EB%8F%99
이외에 새로운 전망을 찾아내고 실천해야 하는 점에서 올해 4월과 10월 그리고 내년의 지방선거와 같은 선거전 식 방법은 손우정님 말씀따나 감내를 전제로 한다는 위험성을 안고 있지요. 새로운 전망 제시는 선거전이 아니라 운동일텐데 이의 교착 상황이 지난 해 촛불 시위 등으로 일부 해결된 것도 있지만 지난한 과정이라는 생각이네요.대안연합이 그 시금석일텐데 예전에 언급하신 대로만이라도 된다면…
조직된 대오의 난타전, 그리고 강력한 연대체를 통한 투쟁을 말씀하시는 데
그 조직된 대오가 어디에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등록금 문제에 별로 관심도 없는 요즘 대학생들의 조직된 그룹이 제대로 있습니까?
그들이 등록금 고통에 짖눌려 분노하며 튀어나올 것 같나요?
쇠파이프를 들고 화염병을 들고 견찰과 전견들 정부에 맞서자고 하면, 대학생들이 나올 것 같습니까?
형편없는 가입율이 보여주는 민주노총? 어용노릇을 하던 한국노총?
아직 채 조직되지도 않은 비정규노조? 환갑에 일흔이 넘은 전농? 여농?
저도 그리스와 같은 투쟁이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만…
우리 사회 어디를 둘러봐도, 그리스와 같은 형태의 투쟁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물론 제가 너무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셔서도 좋습니다만.
좀 더 현실적인 전략을 제시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가능할 것이다,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추측을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측해야 할 것은 주체들의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조건이 현실에 부여하는 가능성의 폭입니다.
조직된 대오는 민주노총일 수 있고, 말씀하신 어용노총일수도 있습니다. 환갑에 일흔이 넘은 전농과 여농일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은 낮아보입니다만 대학생일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정부의 대응이 그런 허약하게 조직되지 않는 미조직 힘으로는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끔 모든 경로를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뚫기 위해서는 기존 조직대오가 아니라 새로운 조직을 만들건 어쩌건 간에 ‘조직된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구조가 짜여지고 있습니다
별 가능성이 보이지 않더라도 조직대오가 뚫고 가지 않으면 별 희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외려 그게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재작년 허무하게 대선이 지나가고, 총선마저 저렇게 되었을 때, 어느 누가 5월 초부터 범국민적 저항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나요? 총선 직후에는우리 사회 어디를 둘러봐도, 별다른 투쟁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습니까?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를 떠나, 그것 아니면 별다른 희망과 가능성을 찾기 힘든 요즘입니다. 논쟁을 되냐 마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현실로 만들지’, ‘어떻게 효과적인 저항을 펼치지’로 이어보면 더 좋을 듯
이 기사에 오마이뉴스 독자분이 좋은 기사 원고료를 주셨네요.
앞으로 좋은 기사 많이 쓰라는 격려일 겁니다.
글쓴이가 ‘저돌성’과 ‘물리력’에 상당한 아쉬움을 지닌 듯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다음번 촛불은 엄청난 물리력을 내포할 걸로 시사하는듯 한데요?
물론 즉자적이고 단말마적인 것이겠지만…
악법 밀어부치기 등 지금 청와대의 초조함은 그것 때문인 듯합니다.
괜히 지하벙커에 내각 만들었겠어요?
얼마나 무서우면…
뭐 서울시내가 이스라엘 공습 떨어지는 가자지구도 아니고…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 상황에서 조직된 대오의 강력한 투쟁은
비정규직이 조직되어 강력한 결집력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이 쉬운일도 아니고 한두달에 될 일고 아니구요.
어떻게 성공적인 운동을 현실로 만들지, 어떻게 효과적인 저항을 펼칠지를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생각을 한다면, 조직된 대오의 강력한 투쟁이 아니라
느슨한 연대의 거대한 물결쪽을 고민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제 생각이 틀린 것일 수도 있구요.
문제는 사회 기층에서 들끓고 있는 범국민적인 분노를
어떠한 그릇에 담아 어떻게 표출시킬 것인가.
이 끓어오르는 용암과 같은 거대한 변혁의 시기에
이 엄청난 에너지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이며, 이런 전무 후무한 기회를
어떻게 살려서, 이 사회를 미래를 향해 승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 듭니다.
조으니/ 동감합니다. 한국사회 운동사에서 기존의 조직대오는 사실상 대중과 괴리되면서 대중에 대한 영향력과 지도력을 상당부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2002년, 2004년, 2008년의 촛불저항에서 보듯이 미조직 대중의 자발적 참여가 운동을 선도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유형의운동은 문제해결이라는 측면에서는 취약하지만, 의제의 확산에는 상당히 위력적입니다.
다만, 위 글에서 2009년 초반에 조직대오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시기적 특성이 미조직 대중이 운동을 주도하기 어려운 국가의물리적 억압체제가 굳건하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저항에도 국가가 억압의 칼날을 들이댈 때는, 방어력이 없는 미조직대중보다 일정한 억압을 감당할 수 있는 조직대오의 힘이 필요합니다. 만일 기존의 조직이 문제가 많다면 새로운 조직이라도 만들어 내야 합니다. 혹여 그렇게 어떤 정치적 기회? 이런 국면이 확장되면 그 내에서 다시 미조직 대중이 운동을 주도할 수 있겠지요.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분출이 아니라 분명한 문제해결을 이룰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을 통한 전략전술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제까지 운동단체들은 분노의 표출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 생각을 보여주는 것에 치중했고, 이 과제 조차도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문제의식의 표출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운동을 고민할 때입니다. 더 이야기 많이 나눕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