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거대 담론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 고색창연한 담론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1980년대처럼 금시라도 세상을 뒤엎을 기세였던 질풍노도 시기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어찌하겠는가? 우리가 목을 걸고 있는 해법이 거시적 변화 앞에서 일순간에 고물딱지가 되고 만다면 말이다. 역사의 변곡점을 통과하는 시기라면 그런 일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가 바로 그러한 때이다.

프레임 전환과 패러다임 창조

문재인 정부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서 사람 중심 경제를 강조하고 있다.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시도 자체는 매우 시의적절한 것이고 그 자체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 다음이 기대가 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새로운 패러다임은 아직 레토릭 수준을 크게 넘어서고 있지 못하다.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서 자격을 갖추려면 지난 글에서 언급한 5가지 과제에 대한 해법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5가지 과제는 성장 동력 확보, 실물경제와 금융자본 사이 불균형 해소,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기술 실업 극복, 세계화 덫으로부터 탈출, 불평등 관계의 원천적 해소 등이다. 문제인 정부 사람 중심 경제론은 아직 이 과제들에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 창조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또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독립적으로 창조되지 않는다. 그것은 프레임 전환과 맞물려 진행되며 새로운 프레임 안에서 낡은 패러다임과의 지난한 투쟁을 거친다. 자연과학 발전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해 온 우주론 진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근대 이후 성립된 최초 우주론 프레임은 지동설 대 천동설이었다. 이전 시기 유럽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천동설이었다. 천동설은 교회가 허락한 유일한 우주론이었다. 지동설이 등장하여 ‘지동설 대 천동설 프레임’을 설정한 것 자체가 혁명의 시작이었다.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지동설과 천동설은 대척점에 서 있는 정반대 성격 패러다임이었다. 새 패러다임 지동설은 낡은 패러다임 천동설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지동설 지지자들은 천동설 측으로부터 가해지는 극심한 탄압으로 고난을 겪어야 했다. 지동설은 승리했다. 뉴턴은 지동설 승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프레임 자체가 바뀌는 혁명적 변화가 그 뒤를 이어졌다. 지동설 대 천동설 프레임은 정반대 성격 두 패러다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절대우주론’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을 공통 기초로 삼고 있었다. 절대우주론은 속도, 방향, 크기는 일정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아인슈타인은 속도는 상대적인 것이며, 중력 영향으로 빛 진행 방향은 휘어질 수 있고, 크기 또한 고정된 게 아니라는 상대성 이론을 제시했다. 새 패러다임인 상대우주론이 출현한 것이다. 그에 따라 ‘상대우주론 대 절대우주론’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이 성립되었다. 관측 결과 뒷받침을 받으며 상대우주론이 승리했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상대우주론 대 절대우주론 프레임조차도 낡은 패러다임을 공통 기초로 삼고 있었다. 우주 밀도는 일정하다고 하는 정상우주론이 그것이다. 여기에 맞서 우주는 한 점에서 폭발해 계속 팽창해 왔다는 팽창우주론이 제기되었다. 새 패러다임 등장과 함께 ‘팽창우주론 대 정상우주론’이라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프레임이 성립되었다. 팽창우주론과 정상우주론 사이에 지난한 투쟁이 이어졌다. 결국 허블 등의 관측 결과 뒷받침을 받으며 팽창우주론이 승리했다.

우주론 진화 과정은 프레임과 패러다임 변화에 대해 세 가지 규칙을 알려준다. 첫째 패러다임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프레임 안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이 대항 관계를 형성하며 존재한다. 둘째 프레임 안에서 새 패러다임과과 낡은 패러다임 사이에 지난한 투쟁이 전개되고 최종적으로 새 패러다임이 승리한다. 셋째 기존 프레임 공통 기초가 낡은 패러다임임이 드러나고 새 패러다임이 출현하면 프레임 교체가 일어난다. 새로운 혁명이 시작된다.

노동 대 자본 프레임 성립

우주론 진화 과정에서 확인된 프레임 전환과 새로운 패러다임 창조 관계는 사회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근대 이후 모든 것을 규정했던 본원적 프레임은 ‘노동 대 자본 프레임’이었다. 이 프레임은 선험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특정 개인 작품도 아니었고 어느 한 사건 결과물도 아니었다. 노동 대 자본 프레임은 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지난한 투쟁을 거쳐 형성된 역사적 성취였다.

19세기가 지나기까지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 계급의 실체를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노동자를 동등한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도 대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에게는 선거권 피선거권조차도 주지 않았다. 노동자는 시장에서 구매 가능한 노동력을 지닌 상품이었고, 언제든지 투입 가능한 자본 일부였을 뿐이다. 그러한 자본가 계급 사고 속에 노동을 대등한 한 축으로 인정하는 노동 대 자본 프레임이 자리 잡을 여지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 대 자본 프레임은 오직 노동자들만이 만들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다. 노동자들 투쟁은 다양한 나라에게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영국 노동자들은 참정권 확보를 위한 차티스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세기에 가장 처절하면서도 자기희생적으로 투쟁한 곳은 단연 프랑스 노동자들이었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1879년부터 장장 25년 간 지속된 프랑스대혁명을 거치며 강한 혁명적 열정을 품기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은 대혁명 기간 동안 역사 무대 중앙에 진출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경험은 너무도 강렬해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은 채 노동자들 심장을 끊임없이 달구었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혁명성은 유럽 대륙을 뒤흔들었던 ‘1848년 혁명’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되었다. 2월혁명을 통해 1948년 혁명 도화선 역할을 한 것도 프랑스 노동자들이었다. 수천 명이 희생된 6월봉기를 통해 1948년 혁명을 극적으로 마무리한 것도 역시 프랑스 노동자들이었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혁명적 열기는 1871년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파리 코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연재 3회 ‘노동자 계급의 진출과 마르크스주의’를 참조하기 바람)

엄청난 희생을 수반하면서까지 노동자들 투쟁이 반복되자 부르주아 계급은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싫든 좋든 노동자 계급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제 또 발생할지 모를 파국적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뒤를 이었다. 노동자 참정권이 점차로 확대되어 갔고 합법적인 노동자 계급 정당 결성도 가능해졌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노동자 계급은 새로운 정치적 실체로 부상했다. 그에 따라 노동 대 자본 프레임이 확고해졌다. 노동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를 흘린 대가로 어렵사리 얻어진 결과였다.

노동 대 자본 프레임을 사상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탁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서 카를 마르크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 이론의 많은 부분이 오늘날 시대 상황에 맞지 않고 곳곳에서 이론적 허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노동 대 자본 프레임 형성에서 그가 기여한 부분만큼은 충분히 평가해 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는 노동자들 자신이 역사 발전 주체임을 자각할 수 있는 사상 이론적 무기를 제공했다.

노동 대 자본 프레임 성립은 일련의 혁명 결과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혁명의 출발점이었다. 노동 대 자본 프레임은 현실 앞에 무기력하게 굴종했던 수많은 사람들 상상력을 한껏 고양시켰다. 자신들 앞에 던져져 있던 기존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게 했고, 새로운 사회 모델을 실험할 수 있도록 자극했다. 새로운 프레임 확립이 현실 세계를 어떻게 역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입증했다. (…계속)

 

*표와 그림을 포함한 보고서 전문을 보시려면 아래의 pdf 파일을 다운 받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