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체제 2기 출범을 보는 언론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시진핑은 신시대를 선언하면서 세계 선두 국가를 목표로 내걸었다. 미국마저 재치고 세계 최강 지위를 넘보겠다는 의지이다. 이를 두고 언론은 덩샤오핑 시대에 작별을 고한 것으로 평가했다. 덩샤오핑이 내건 목표는 중등 국가였기 때문이다. 작별의 지점은 또 있다. 덩샤오핑은 빈곤 타파를 내세운데 반해 시진핑은 격차 해소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국 이후 중국이 걸어 온 궤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코 단선적인 발전 과정을 거쳐 오늘의 중국에 이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시행착오

중국은 1955년경부터 전격적으로 농업 집단화를 추진하였다. 다만 토지 소유에 대한 농민의 열망이 뿌리 깊은 점을 고려하여 국영농장이 아닌 50명 정도 농민을 농업생산합작사로 묶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농업 집단화는 기대했던 농업 생산성의 급격한 향상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1952년에서 1957년 사이 인구는 30% 정도 늘어났지만 정부 곡물 징수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농업 생산성이 정체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공업화가 미약한 조건에서 기계화 등이 제때에 추진되지 않은 탓도 있었다. 무엇보다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고 싶어 하는 열망이 남아 있으면서 근로 의욕이 감퇴한 게 주효했다.

마오쩌둥은 농민에게 남아있는 소자산가 기질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판단했다. 마오쩌둥은 인민 개조와 함께 문제를 일괄적으로 해결한다는 목표 아래 인민 공사를 중심으로 전대미문의 실험에 착수했다.

인민공사는 노동자, 상인, 학생, 병사가 일체화된 체계로서 모든 생산수단은 공사 소유였다. 개인이 가졌던 조그만 땅도 모두 인민공사에 귀속되었다. 식사도 인민공사에서 운영하는 커다란 식당에서 함께 하도록 하는 등 가능한 한 가족을 뛰어넘는 공동생활 영역을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모든 노동은 공사가 배분하고 통제했으며 임금은 노동성과에 따라 지급하였다. 아울러 인민공사는 교역, 조세, 회계 등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지방 정부 기능인 군사와 보안 업무까지도 떠맡았다. 한마디로 인간 생활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공산주의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58년부터 인민공사를 기초 단위로 대약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대약진운동은 조속한 시일 안에 영국을 추월하여 미국을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대약진운동을 장식하던 온갖 구호들은 허구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농업 생산에서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대약진운동이 시작된 다음해인 1959년부터 농산물 생산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인민은 지치다 못해 냉담해졌다. 수송망은 파괴되었고 덩달아 공업도 침체되었다. 그 결과 1960년의 국민총생산은 대약진운동이 출발할 때의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일거에 모순을 제거하고 유토피아로 직행하려는 욕심은 망상임이 드러났다. 환경이 달라지면 인민이 소자산가 기질에서 벗어나 공산주의 인간형으로 바뀔 것이라는 희망 역시 허구에 불과했다. 대약진운동 실패 책임을 지고 마오쩌둥은 2선으로 물러났다. 덩샤오핑이 당 총서기를 맡고 류샤오치가 국가 주석을 맡는 것으로 새로운 지도부가 꾸려졌다. 덩샤오핑은 대약진운동 실패 과정을 목도하면서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욕망을 지닌 존재라고 결론 내렸다. 덩샤오핑 사고는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개인 욕망을 추구하도록 허용해야 경제도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이어졌다.

덩샤오핑 체제는 인민 대중이 각자 자유스럽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유도하였다. 개인 경작지를 허용했고 자유시장을 활성화시켰으며 독립채산제를 새롭게 도입했다. 인민공사 기능들은 국가행정기관으로 이전시켰다. 참담한 실패 후과로 이전과는 정반대 방향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인민을 차분히 준비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 행정 기구 중심으로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 성급하게 일을 추진하면서 갖가지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당과 정부, 군에 자리 잡은 관료집단은 일반 노동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상층 계급이 되려고 노력했다. 온갖 불편부당과 부조리가 양산되면서 젊은 청년들을 사이에서 불만이 넘쳐흘렀다. 사태가 예사롭지 않게 흘러갔다.

국가적 대재앙, 문화대혁명

정치적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사태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먼저 덩샤오핑이 소홀히 하고 있던 군부를 일거에 장악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농민들을 모아 새로 군대를 만들겠다는 마오쩌둥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정리시켰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수상 협조를 얻어 전국에 있는 학생들을 베이징으로 불러 모았다. 학생들은 100만 명 단위로 천안문 광장 집회를 거치며 홍위병을 결성했다. 홍위병 손에는 국방장관 린뱌오가 주도해 만든 <마오쩌둥 어록>이 쥐어져 있었다. <마오쩌둥 어록>은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며 홍위병들을 집단 최면 상태로 몰아넣었다. 1,100만 명에 이르는 홍위병들이 문화대혁명 전위 투사 역할을 했다.

홍위병들은 4구(4舊 : 낡은 이념과 사상, 습관 및 관습)를 대표한다고 간주된 사람들과 사물들을 난폭하게 공격하였다. 극단적인 광기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이 이루어졌고 곳곳에서 테러가 난무하였다. 사찰 등 각종 문화재들은 낡은 사상의 표본이라 하여 무참하게 파괴되었으며 혼란의 와중에서 대학과 학교는 여러 해 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은 합당한 절차와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마오쩌뚱 이름으로 처단한다는 말 한마디가 법을 대신했다.

기존 당 지도부는 적위대를 내세워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곳곳에서 적위대와 홍위병 간에 화기를 사용한 전투가 벌어졌다. 비슷한 시기 21개 지방에서 농민들이 홍위병을 향해 격렬한 공격을 가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내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결국 군부대가 직접 개입함으로써 상황이 수습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군부 주도권을 확고하게 해주고 말았다. 권좌에 복귀한 마오쩌뚱은 1968년 가을에 홍위병을 해산시키고 사태 수습에 돌입하였다. 홍위병을 포함한 젊은이들은 대거 농촌으로 하방(下方)되었다. 이어서 1969년 4월 새로운 권력 구조를 출범시키기 위한 9차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전당대회는 국방장관 린뱌오를 마오쩌뚱 후계자로 명시했다. 문화대혁명은 1974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비로소 10년 대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관료화된 현실 사회주의와 권위적인 자본주의 사회에 넌덜머리를 느끼고 있었던 서구 좌파 지식인들은 문화대혁명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자 애썼다. 그들이 보기에 문화대혁명은 마르크스주의 본래 취지에 맞게 대중의 자발성에 기초한 인간적 사회주의를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그에 따라 수많은 서구 지식인들이 문화대혁명 이념을 소개하는 데 열을 올렸으며 “모든 반란은 정당하다”(造反有理)는 마오쩌뚱 말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분위기 속에서 진정한 지성의 모범은 시험 답안지 귀퉁이에 자신은 공장 노동자로서 시험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는 메모를 적어 제출한 중국 대학생이었다. 덕분에 이 대학생은 나중에 교육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977년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문화대혁명을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10년간의 재앙’으로 규정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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