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살기>는 ‘같이 사는 가치 있는 삶’이라는 의미로, 필자가 신정동 청년협동조합형 공공주택 에 살면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을 다룬 일기 같은 칼럼입니다. 칼럼 <가치살기>는 새사연 홈페이지에 월 1회 게재될 예정입니다. (필자 주)

 

지난 번 살던 집을 떠나게 된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뀐 집주인이었다. 전 집주인의 경우, 같은 건물에 살면서 나름 세입자도 가려가면서 받아 크게 불편함을 못 느꼈으나, 새로운 집주인은 관리인에게 맡겼는지 공기부터 낯선 세입자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지난 집은 다른 원룸과 다르게 3중 보안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건물현관, 계단입구, 방 현관 3단계의 보안체계를 거쳐야지 방 안에 들어 올 수 있었으며, 특히 건물현관의 경우 오직 카드키만으로 출입이 가능했다. 이러한 특징은 택배나 배달음식을 받음에 있어서는 불편함이 존재했지만, 그만큼 안전성이 보장되어 여자가 살기에는 아주 적합하였다.

하지만 집 주인이 바뀌면서 안전한 나의 성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지하 창고에는 밤새 일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항상 닫혀 있어 수성(守城)의 기능을 했던 건물현관 앞에서는 현관문을 열고 담배 피는 낯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종종 건물 현관이 열려있는 걸 보고 놀라며 닫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며칠 전 SBS스페셜에서 ‘불안한 나라의 앨리스’ 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불안함을 동반하는 것인지를 다뤘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심지어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은 집 안에서도 상당한 예민함과 함께하는 일이다. 낯선 사람들을 나는 예의주시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말하면 되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여자 혼자 사는 집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소리다. 결국, 이런 상황은 이사 결심에 있어 큰 역할을 하였다.

새로 이사한 이 곳에서도 당연히 낯선 이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곳은 대화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아래는 단체 대화방에서 일어난 소소한 우리의 대화들이다.

 

#. 컴퓨터 모니터 있으신 분 계시나요?

필자는 현재 논문을 쓰는 중이라 한 학기만 모니터가 필요했다. 한 학기만 쓰는 거라 새로 사기도 애매했고, 애꿎은 중고나라만 뒤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들 이사 중이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협동조합 조합원 단체 대화방에 글을 올렸다.

“혹시 남는 컴퓨터 모니터 있으신 분 계시나요? 한 학기만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사실, 큰 기대는 안 하고 올린 글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 대화가 왔다.

“모니터 구하셨나요? 제가 남는 것이 있는데, 저는 내년 5월 정도에 돌려주시면 돼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옆 건물에 방문했더니 (협동조합에 산다는 것이 방문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장점도 있다) 너무나도 좋은 모니터와 모니터 받침대까지 함께 빌려주셨다.

서울살이에서 느껴보는 이웃의 도움이란 꽤 낯선 감정이라서 그 훈훈함이 한동안 오래 남았다.

 

#. 운동회가 끝났으니, 돌아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서도휴빌 앞에는 양동초등학교가 있다. 가을이라 토요일 아침부터 어린이들이 운동회를 하는지 마이크를 타고 사회자 소리가 온 건물을 뒤덮었다. 그 소음은 집에 있기가 어려울 정도라 시끄럽기도 하고 마감해야 할 일도 있어 노트북으로 들고 밖으로 나와 있는데, 오후 4시경 단체 대화방이 울린다.

“운동회 끝났습니다~ 시끄러워서 집에서 피신하신 분들 돌아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핸드폰 너머로 보이는 그 문장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고 있는데, 또 알람이 울린다.

“청군 백군 중 누가 이겼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누군가가 대답했다.

“청군이 이겼어요.”

상기 대화가 나만 사랑스러운 걸까? 짜증도 나누는 이런 소소한 즐거움은 운동회의 소음도 웃음과 함께 극복할 수 있게 하였다.

다음 날 단체 대화방에 아침 8시 53분 또 다른 글이 올라왔다.

“바야흐로 운동회의 계절인가 봅니다. 오늘은 10시부터 동문체육대회랍니다. 즐거운 휴일 되세요.”

 

앞서 1회 때 말한 것처럼 이 도시에서 우리는 ‘낯설게 사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리고 낯설게 사는 것이 편하다. 난 이 낯섦에 대한 태도를 크게 변화시킬 생각은 없다. 하지만, ‘청년주택협동조합 사이’ 에서 낯선 이의 개념은 조금 수정될 것 같다.

예전에 교수님이 처음 미국으로 갔을 때 프라이버시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고 샴푸와 바디 클렌저 등 공산품에 대해서만 대화를 나누면서도 충분히 룸메이트와 교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억지로 술 마시면서 첫사랑 이야기, 옛 연인 이야기, 마음 속 고민 등을 털어 놓아야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한 공간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속에서 생활 속 공통된 주제를 나누고 웃을 수 있다면 친구이며 이웃임과 동시에 어느 영역에서는 낯선 이이다.

사실, 이 광활한 우주, 지구라는 행성의 여행객인 우리는 모두 낯선 이들이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고 서로의 삶의 그 찰나를 잠시나마 공유하면서부터는 다른 문이 열린다.

오늘도 우리는 계단에서 꾸벅 인사한다.

Hello, Stranger?

 closer

 

#. 우리의 집에 드디어 이름이 생겼다. 청년주택협동조합 사이23, 청년주택협동조합 사이28 로 정해졌다. 이 역시도 이름은 무엇으로 할 것이며, 주택으로 할 것이냐, 주거로 할 것이냐, ‘사이’를 청년주택협동조합 앞에 붙일까, 뒤에 붙일까 등 장고의 회의 끝에 나온 결과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집의 이름과 형태와 내용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