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를 택하겠습니다.
퍼듀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록산 게이는 페미니즘이 더 많은 연대를 이끌어내면서 조화로운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차이를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이라는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 못 맞추면 끌어내리려고 한다면 누구도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학술서와 비평 사이, 비평과 에세이 사이를 경계 없이 넘나드는 『나쁜 페미니스트』는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차별에 관한 아주 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글쓰기를 시도하는 책이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를 택하겠습니다.” 이는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두렵고 불편하더라도, ‘나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서라도 페미니스트로서의 소신을 지키며 살겠다는 선언이다. 동시에 수많은 규칙과 규범,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페미니즘에 대한 다른 견해이기도 하다.
현대 문화 소비의 문제
문화의 주 소비 대상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콘텐츠 자체가 남성중심적인 아이러니가 존재하며 주로 남성이 만들어 놓은 문화 프레임 속에서 소비되고 있다. 여성 작가는 여류작가라 불리며, 여성이 주 소비층인 취미는 때로는 서브컬쳐로 만들고 남성이 좋아하는 것을 여성이 좋아하면 ’니가? 여자가?’ 라고 되묻기도 한다. 은연 중에 남성적인 것을 더 상위의 개념으로 사용한다. 사실 문화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보다 다 대중적인 것으로 말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만 있다면 크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어떤 현상들은 남성들이 기득권을 가진 것을 알지만은 여성 스스로가 멋있다고 생각해서 소비되는 것도 있다. 사실 남성만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도 인식과 태도 변화를 위해 출발해야 한다.
페미니즘 영화에 대해서
과거의 페미니즘 영화가 여성이 남성으로부터의 탈출을 이야기했다면, 현재 페미니즘으로 분류되는 영화는 여성이 새로운 리더로 존재한다. 헝거게임에서는 여성이 자기도 모르게 혁명의 구심점이 되어 있었으며, 겨울왕국의 엘사 역시 남자 짝이 없는 캐릭터로, 자아에 대해서 고민하는 순간에도 남성동반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영화에서는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은 소극적이며 수동적으로 사랑에 목숨을 건 타입으로 그려진다. 정말 페미니즘 영화가 되려면 원작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소비하는지, 여성의 몸은 어떻게 대하는지 등 다방면으로 봐야 할 것이다. (굳이 무조건 날씬한 여자만이 주인공을 할 필요는 없다: 예 – 헤어스프레이)
사회적 지위와 프라이버시
사실 이 글을 봤을 때, 현재 문제가 되고 잇는 리벤지 포르노나 몰카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여성의 몸이 공유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성의 몸은 정말 어떻게 소비되는가? 과연 여체가 남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인가? 자연의 법칙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예쁘고 보고 싶고 도구가 되고 객체가 되는 심지어 여성이 꽃이라는 생각까지 이야기 하고 싶다.
우리는 ‘젊고 아름답다’ 라는 칭찬을 사용한다. 하지만 젊고 아름답다는 것은 늙고 추하다라는 말고 같은 선상에 있는 말이다. 뭇 남성들은 말한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은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여성이 젊고 아름다워 생기는 권력이 진실로 여성이 소유한 권력일까? 이는 아름답다라는 칭찬과 더불어 남성이 부여해주는 권력이지 않은가?
여성은 더 이상 부여 받는 권력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 자체에서 발생하는 권력을 갖고 싶다. 또한 여담으로 덧붙이면 남성이 젊고 아름다웠을 때 받는 권력은 여성이 누리는 그 어떤 것보다 많을 수도 있다. 다만 남성들에게는 젊고 아름다운 것이 강요되지 않기 때문에 그 수가 적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여성주의 소모임은 10월 6일 있을 <젠더와 정치> 강좌로 대체합니다.
그 다음 모임은 10월 20일(목)에 진행될 예정이며, 저녁 7시 새사연에서 여성주의 영화를 간단한 치맥과 함께 관람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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