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를 재미있게 보다가 갑자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왜 스마우그는 쓰지도 않을 금은보화를 잔뜩 깔고 앉아서 악착같이 지키려고 할까? 원작자 톨킨의 작품 속 세계관에 많은 영감을 준 북구의 신화를 살펴보면 금은보화에 눈이 먼 수많은 존재들이 나오는데, 시장에서 딱히 구매할 것도 없는 세상에서 그들이 그토록 악착같았던 이유를 지금도 잘 모르겠다.

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지중해 연안의 도시국가들과 원양무역이 촉발된 대항해시대의 도래를 목격한 15세기 무렵의 학자들은 장사를 통해서 이문을 남기는 것이 국부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라에 쌓여있는 금은보화의 양이 국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상주의사상은 1776년 애덤 스미스에 의해 <국부론>이 출간되기까지 이어졌다.

<국부론>은 중농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은 저작이다. 중농주의는 ‘돈 많은 것이 최대의 미덕이고, 돈 벌려면 보호무역을 해야 한다.’는 중상주의의 비과학성을 비판하고 논리적인 경제이론을 정립하기 위한 사상이었다. 중농주의자들이 주목한 것은 시장에서 살 물건이 없으면 번쩍거리는 금속에 불과한 화폐가 아니라 ‘생산품’ 자체였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화폐는 단순한 교환수단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생산품이 국부의 원천일 것이다.

중농주의자들은 진지하게 경제를 관찰한 결과 시장에서 거래되는 생산품들은 당시에는 주된 것이었던 농산품은 물론이고 공산품까지 모두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가치가 사라지는 소모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만히 있으면 국부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경제가 유지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순생산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농주의의 결론이다.

생산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투입하여 또 다른 무엇을 산출하는 과정이다. 즉, 생산품은 수많은 투입물의 결과이다. 순생산이란 것은 투입보다 산출의 양이 많은 상태를 의미하며 중농주의자들이 살아가던 사회에서 이 기준에 부합하는 유일한 생산활동은 한 톨의 밀알이 수백 수천 개의 밀알로 증가하는, ‘신의 은총’을 받은 농업이 유일하였다. 그래서 중농주의자들은 농업종사자를 생산적 계급으로 분류하고, 여러 재료를 조합하는 것이 전부인 공업종사자를 비생산적 계급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농업종사자들에게 지대 등을 거둬가서 무위도식하는 지주계급까지 포함한 세 계급이 경제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중농주의의 정립에 많은 공헌을 한 케네는 그의 저서 <경제표(Tableau Economique)>를 통해서 농업에서 발생한 순생산이 어떻게 사회전체로 전파되는지 앞의 세 계급 사이의 거래를 통해 고찰하였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경제순환모델이자 생산계급을 착취하는 불로소득이 심각한 경제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순생산이 국부의 원천이라는 중농주의사상은 농업국가 프랑스를 떠나 산업혁명이 발흥되고 있던 초기공업국가 영국에서 애덤 스미스에 의해 고전파경제학으로 발전하였으며, 산업시대에 접어든 유럽의 중심에서 마르크스에 의해 노동가치설로 발전하였다. 이윤의 원천은 결국 노동 착취라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미적분학으로 무장한 한계효용학파 또는 신고전파라고 불리는 일단의 경제학자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의 작업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자본가들의 이윤에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생산품의 가치라는 것은 소비자가 느끼는 효용에 따른 것이지 그 생산품에 내재된 노동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효용이 높은 상품을 찾아 효율적인 투자를 하여 이윤을 극대화 하는 자본가의 역할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인가?

마르크스와 한계효용학파 모두 백년도 더 된 옛날 사회를 근거로 이론을 전개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절대적 노동가치라는 개념이 자동화된 공장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는 말꼬리 잡기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상품가격이 한계효용을 측정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입된 비용에 적당한 이윤을 더하여 결정되는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 한계효용이론도 가설일 뿐이긴 마찬가지이다.

적당한 이윤이 시장에서 결정되는 균형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소비자의 선호가 가격을 결정하는 사례가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시장균형이라는 어정쩡한 태도로 사회문제를 방기한다는 측면에서 한계효용이론이 노동가치설에 비해서 나쁜 이론이라고 평가받을만하다. 이런 생각 또한 자칭 가치중립적인 ‘과학자’들에게는 비판거리일 뿐이겠지만,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과 사회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전혀 다른 태도이다.

이미 패권을 쥔 주류경제학에서는 오래 전에 관심을 끊었지만, 이윤이 노동에 의해 창출된다는 노동가치설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윤을 높이기 위해서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본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 노동의 가치보다 중국 노동의 가치가 낮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한국보다 중국에서 노동의 대가를 덜 치러도 되는 체계라고 해석해야 할까? 아니면 한국이 중국보다 물가, 즉 비용이 높은 구조라고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그 높은 비용은 결국 지나친 이윤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케네의 경제표 개념은 이후 수많은 수정을 거쳐서 국민계정이론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국민계정을 통해서 경제활동이 각 경제주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정확성을 담보하기는 아직 미흡하여 강바닥을 긁어내는 데에 수조원을 쏟아 붓는 것이 경제적으로 타당하는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국민계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중에 하나가 사회계정으로 이론적 확장을 꾀하는 것이다. 경제행위를 단순히 상품과 그 대가인 화폐의 유통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경제행위가 영향을 미치는 사회요소 전체를 분석표에 넣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존의 산업연관표에서는 A상품의 수요가 발생하면 어떤 주체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인지 상관없이 동일한 효과로 측정된다. 하지만 A상품의 수요가 마을공동체가 활성화된 골목상권에서 발생하는 것과 대형마트에서 발생하는 것이 정말로 동일한 경제효과를 가져올까? 대형마트를 이용하려면 자동차를 몰고 가야 하니 환경적으로 비용이 더 발생하게 될 것이며, 골목상권을 이용하면 소상공인들의 수입이 늘지만 대형마트를 이용하면 대기업의 이윤이 늘 것이다. 이런 측면을 하나하나 세세히 나누어 측정해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회계정이다.

케네가 경제표를 통해서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경제의 근간인 농부들에게 세금의 부담을 덜어주고 무위도식하는 지주계급에게서 세금을 더 걷어야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는 현실이었다. 이런 과학적인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한 프랑스 왕정은 결국 30년 후에 혁명으로 무너졌다.

사회계정을 연구하는 현대의 케네들은 훨씬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다양한 경제문제와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비록 주류경제학으로부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유사과학자라는 힐난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사회 부조리의 일부라도 해결할 단초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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