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추악한 프락치 공작

By | 2013-10-31T12:11:40+00:00 2013.10.31.|

이른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조작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지금 이석기 의원 재판에서 핵심 쟁점은 “증거채택”과 관련한 부분이다. 국정원과 검찰에서 제시한 핵심 증거인 ‘녹취록’이 국정원의 “프락치 공작”을 통해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프락치는 원래 러시아어에서 나온 말로 ‘첩자’, ‘끄나풀’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프락치라는 말이 경찰이나 정보기관이 노동단체, 학교, 종교계 등에 심어놓은 첩자나 끄나풀 등을 지칭하는 말로 써졌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프락치 공작 또는 유사한 공작은 많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많은 피해자가 양산되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프락치 공작을 통해 조작 사건을 만들어 반대파를 제거하거나 불리한 여론을 환기시키려 한 것이다. 

프락치는 정보기관의 노예 

프락치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해야하므로 국민의 도덕기준으로도 도저히 허용될 수 없다. 이들은 온 국민이 혀를 차고 손가락질할 모욕과 수치의 대상이다. 프락치는 정보기관의 일개 끄나풀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여느 배신자, 변절자와 다르지 않지만 지난 동료들과 가족들, 그리고 자기까지 속이며 겉으로는 의연한 진보인사인 척 위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굴욕적인 행위이자 사실상 정보기관의 정치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프락치 공작은 정보제공의 대가로 돈을 받는 정당한 거래가 아니라 심각한 불평등 거래, 사실상의 노예계약이다. 인간의 삶에는 물질경제적 요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정치적 요구와 문화적 요구를 함께 지니고 있다. 프락치 공작은 물질경제적 측면에서 몇 푼에 불과한 보상을 약속하는 대가로 정치적 측면에서 사실상의 인간성 파멸, 인간으로서 삶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므로 철저히 악의적인 노예계약이다. 

프락치 공작은 정치적 굴욕의 강도에서 철저하고 집요하다. 프락치 공작은 인간으로서 유지하고자하는 최소한의 요구마저 철저하게 무력화시킨다. 

특히 정보기관이 진보진영인사들에게 프락치 행위를 강요하는 것은 진보인사들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자 수치이다. 도덕적 관념과 의리가 남달리 강한 진보인사들로서는 프락치 행위에 나서야 하는 상황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굴욕이며 결국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는 구렁텅이라 할 수 있다. 

프락치 행위에는 일정한 활동기간이 필요하다. 민주와 진보를 가장한 채 정보기관의 끄나풀로 전락한 프락치에게도 지난날 뜨거운 조국통일의 열망이 있었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치겠다는 각오와 결심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반민족 행위에 분노하고 반통일 행각을 저주하며 긍지 높게 살아온 진보인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프락치를 강요받으면 매 순간마다, 나라와 동지들을 팔아먹은 놈이라는 심각한 모멸감과 자기갈등을 느끼게 된다. 

물론 정보기관도 그 점을 숙지하고 있으므로 프락치 공작의 기간에는 프락치의 정치적 각성을 마비시키기 위한 공작에도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이른바 “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치적 요구를 존중하지 않는 정보기관의 속성상 프락치의 정치적 활용도가 사라지면 프락치는 버려지게 되고 이후 그에게는 평생토록 자책과 후회의 삶만이 남게 된다. 

그런 면에서 프락치 공작은 한 인간의 인간성을 영원히 파괴한다. 배신자와 프락치라는 손가락질은 한 인간의 생존의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자식과 후손들에게까지 철저히 승계된다. 지난날 친일파들의 자식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사회적으로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그들이 아직 물질경제적으로 부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의 자식이라는 규정에서 평생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들의 반성과 참회의 몫이 남아있는 것이다. 

사회의 정의와 진보적 지향은 언젠가는 승리한다. 그리 멀지 않은 통일조국의 하늘 아래에서 프락치의 자식들은 부모의 밀정노릇에 의해 방황하고 주눅들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프락치 행위는 자식과 후손들의 경제적 처우를 위한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이들의 정치성을 목졸라버리는 정치적 자살행위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본 프락치의 말로 

프락치의 말로는 정치적으로는 가장 비참하다. 게다가 사회가 민주와 진보의 새시대를 맞이한다면 물질경제적으로도 몰락이 불가피하다. 

역사적으로 배신자, 프락치는 예수를 밀고한 유다로부터 찾을 수 있다. 유다는 예수를 밀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였지만 배신의 대명사로 이후 2000년간 그 이름이 이어지며 역설적으로 예수의 12제자들 중 가장 유명한 제자가 되고 말았다. 

동학농민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말, 녹두장군 전봉준을 밀고한 자도 전봉준의 옛 부하였던 김경천이었다.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관총 공격에 농민군이 패하자 전봉준은 쫓기던 몸이 되고 말았다. 다급했던 전봉준은 피노리에서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집을 찾아가는데 전봉준에게 붙어있었던 거금의 현상금으로 인해 김경천은 전봉준을 주막에 유인해놓고 전주감영 군관인 한신현에게 밀고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전봉준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후한 상금을 내리는 것은 물론 원하는 지역의 군수 자리를 주겠다고 공포한 터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전주감영 군관인 한신현은 전주군수 자리가 내려지고 상금으로 1천냥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전봉준에게 일본도를 휘두른 동네 청년에게는 2백 냥, 마을 사람 9명에게는 1백 냥, 그리고 2백 냥은 피노리 빈민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밀고한 김경천은 이리 저리 떠돌다가 결국은 정읍시 이평면에서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김경천이 심리적인 죄책감과 번민으로 인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스스로 프락치의 길을 택했지만 경제적 재부는 몽땅 군관의 차지로 돌아가고 그는 그저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결국 프락치는 철저히 토사구팽의 결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마치도 학살당할 징용자들이 제국주의의 강압에 못 이겨 동료들을 밀고했다가 동료들을 학살하고 종당에는 자신도 맨 나중에 파묻히는 것처럼 프락치는 비극적 결말을 피할 수 없다. 

죽산 조봉암과 함께 사형당한 프락치 

1958년 진보당 사건에서도 프락치가 이용되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과 특무대는 조봉암 선생을 간첩으로 몰아 제거하기 위해 ‘양명산’이라는 인물을 프락치로 이용했다. 양명산은 오히려 이승만 정권이 길러낸 대북공작기관 공작원(북파 간첩) 출신이었다. 특무대는 양명산이 조봉암 선생에게 북한 공작금을 전달했다는 내용의 진술을 양명산으로부터 받아내고 조봉암을 사형시키려 했다. 

조봉암 선생에 대한 특무대의 최초 공소장에는 당시 진보당 사람들이 박정호, 정우갑 등과 접선하였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추가공소장을 제출하며 해방 전 상해 시절부터 조봉암 선생과 친교가 있었던 양명산을 등장시켜 조봉암 선생을 간첩죄로 기소했다. 이 후반전에서는 검·경찰이 일치된 방향에서 수사를 추진하여, 진보당 평화통일론의 위법성 여부와 조봉암 선생이 이중간첩 양명산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간첩사건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1958년 7월 2일 1심(서울지방법원 형사 제3부, 재판장 유병진)에서는 진보당 강령이 대한민국의 기본원리를 손상시키지 않았다고 판시했으나, 간첩죄 여부에 대해서는 프락치 양명산의 자백을 토대로 조봉암 선생에게 5년을 선고했다. 양명산에게는 국가변란혐의죄로 5년을 선고했고, 대부분의 다른 피고인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후 재판 과정에서 양명산은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을 바꿔 “1심에서의 자백은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육군특무대의 고문과 협박, 회유에 못 이겨 한 거짓자백이었다”고 자신의 진술을 번복했다. 

하지만 1심 판결 사흘 뒤인 7월 5일, 반공청년단이라고 자칭하는 200~300명의 청년들이 “간첩 조봉암을 처단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법원에 난입하는 재판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재판관을 죽이겠다는 갖가지 협박으로 유병진·이병남·배성호 등 1심 관련 법관들은 한동안 피신해야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58년 9월, 김갑수 판사는 2심 판결에서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여 검찰의 구형대로 조봉암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대법원 판결에 의해 진보당은 불법단체로 규정되어 소멸했고, 조봉암 선생은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프락치의 비극적 말로도 달라질 수 없었다. 북파공작원 출신이던 양명산은 조봉암 선생을 밀고하였지만 조봉암 선생을 북한과 연결시켜야 했던 정보당국에 의해 양명산도 북한공작원으로 규정되어야 했다. 결국 양명산도 조봉암 선생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아 기회주의적인 생의 종점을 찍고 말았다. 

결국 양심선언한 “남매간첩” 조작 프락치 

1993년 이른바 “문민정부”를 표방했던 김영삼이 집권하자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 대한 개혁이 논의되었다. 안기부는 자신들의 개혁이 논의되자 이를 반전시킬 사건을 준비했는데, 이것이 “김삼석-김은주 남매간첩” 조작사건이다. 

안기부는 1993년 9월 10일 일본에서 활동 중인 북한간첩에게 공작금을 지원받아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반전평화운동연합」 정책실 연구위원 김삼석씨와 여동생 김은주씨를 구속했다. 당시 안기부는 김씨 남매가 92년 1월부터 93년 5월까지 3-4차례 일본에 건너가 안기부가 반국가단체라고 주장하는 ‘한통련’ 의장 곽동의, 안기부가 74년 울릉도거점 간첩단사건의 재일본총책이라고 주장한 이좌영과 권용부씨 등과 만나 군사기밀문건 등을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하면서 모두 120만 엔의 공작금을 지원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건 초기부터 안기부 프락치 공작에 의한 함정 수사라는 의혹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특히 여동생 김은주씨는 1993년 9월 8일, 평소 알고 지내던 영화운동가의 부탁을 받고 한 일본인으로부터 서류 봉투를 넘겨받다가 안기부 직원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는데 그 당시 봉투 안에는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으로 알려진 <세기와 더불어> 등 북한 책자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김삼석씨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인물이 바로 ‘배인오(본명 백흥용)’이다. 

1993년 10월 29일 <한겨레>신문에는 배인오씨가 대표로 있던 ‘남누리영상’에서 같이 근무한 박모씨의 인터뷰가 실렸다. 박씨는 “배씨는 북한 영화 수집을 위해 지난해 후반기부터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으며 이때 ‘이내창처럼 고문받다 죽지 않기 위해 안기부 수사관들과 잠시 여행을 갔다와야 한다’며 며칠간 여행을 다녀온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건의 프락치로 활동했던 배인오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대법원 판결 사흘만에 독일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이 안기부의 프락치였다는 양심선언을 했다. 배인오는 양심선언 과정에서 안기부 수사관들의 얼굴을 담은 녹화 테이프와 안기부 수사관들과의 대화를 녹음한 녹음 테이프를 제시했다고 한다.



<시사저널> [264]호에 따르면 배인오는 1993년 7월, 안기부 김모 과장이 “지금 너와 내가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다. 하루속히 사건을 하나 만들어야 한다. 이번 대상으로는 김은주와 김삼석이 가능하다. 그러니 네가 잘해 주길 바란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배인오의 양심선언에 따르면, 안기부 김성훈 과장과 윤동환 수사관은 배인오에게 ‘본인과 국가안전기획부와의 관계 및 안기부와 관계된 정보를 발설할 경우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게 했다고 한다. 안기부는 각서를 받고 배인오를 경기도 파주의 낚시터 등에서 4달 동안 피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나아가 안기부는 배인오에게 여행할 겸 베를린에 있는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에 가서 그쪽 분위기를 파악하고, 범청학련과 친밀히 연결된 국내 인사들을 파악해 오라는 지시도 내렸다고 한다. 배인오는 양심선언을 통해 안기부의 김성훈 과장과 윤동환 수사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활동했으며, 그 대가로 매달 약 100만원씩 받았다고 밝혔다. 

1995년 1월 10일, 당시 안기부장이던 권영해는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배인오가 안기부의 공작원임을 시인했다. 그리고 배인오가 찍은 영상에 나온 김성훈 과장과 윤동환 수사관 모두 안기부의 직원임을 확인했다. 

CIA가 길러낸 해외 프락치

해외에도 정보기관에 의한 프락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미 중앙정보국이 중국에 침투시켰던 다우니와 펙토가 1954년 체포되자 1955년에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한 진보성향의 네덜란드 청년 피터 부베를 포섭해, 그를 프락치로 이용한 비밀공작을 준비했다. 이 사건의 전말은 냉전시기에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의 공작책임을 맡았던 프리츠 획스트라가 2004년 11월에 펴낸 회고록에서 폭로하였다고 한다. 

피터 부베는 CIA에 포섭된 지 십 수년이 지난 1969년, 크리스 페터슨이라는 이름으로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을 좌파신당으로 창당하고 스스로 당대표에 선출되었다. 네덜란드 국가안보국이 네덜란드 맑스레닌당 창당자금과 운영자금을 은밀히 대주었음을 물론이고, 네덜란드 언론계에 침투한 공작원을 동원하여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을 서유럽의 대표적인 좌파정당으로 대중들에게 인식시키는 언론공작을 벌였다. 

크리스 페터슨이라는 가명을 쓴 피터 부베는 오래지 않아 서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한 좌파정당 거물로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기존의 네덜란드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 600여 명이 비밀공작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가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은 기존에 있었던 네덜란드 공산당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네덜란드의 사회주의정치세력을 두 갈래로 분열, 약화시켰다. 

사회주의정치세력을 갈라놓은 분열공작에 성공한 피터 부베는,‘중국정부 고위층에 침투하라.’는 지령을 받고 ‘붉은 청어’라는 공작명으로 불리면서 맹렬하게 암약하였다고 한다. 부베는 좌파정당 거물의 명성과 지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중국공산당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공개발언을 유럽언론에 쏟아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자신을 서유럽에서 ‘중국공산당의 대변인’으로 위장하는데 성공하였고,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을 ‘중국공산당의 서유럽 창구’로 위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부베의 위장공작에 의해, 1980년대 말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비밀공작활동을 중단하기까지 25년 동안 부베는 해마다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뚱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수뇌부와 접촉하면서 간첩활동을 벌였고, 헤이그에 있는 중국대사관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고급정보를 빼돌렸다고 한다. 부베의 간첩활동에는 ‘몽골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미국 중앙정보국(CIA)는 ‘몽골작전’을 통해서 부베가 빼돌린 정보들이 다른 공작원들이 수집한 정보보다 정확하고 신속하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프락치는 정권의 지배층을 위해 자기의 정치적 신념과 도덕적 지향을 저버린 인생낙오자들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프락치가 있어왔고, 정보기관은 지금도 프락치 공작에 열을 올리지만, 역사는 그럼에도 거침없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인간의 참 가치는 지조에 있다. 

조선조 사육신과 생육신의 논란이 있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6명은 세조 2년(1456)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었지만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이들은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고, 친자식들도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으며,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가 되었고, 가산도 모두 몰수되어 그야말로 풍지박산이 났지만, 이들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충절과 지조의 교훈으로 남아있다. 

반면 이들 사육신과는 달리, 단종의 복위에 나섰지만 목숨만은 부지한 채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사람을 생육신이라 한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성담수, 남효온이 이들인데 이들은 함께 단종의 복위에 나섰지만 머리를 파묻고 납작하게 엎드렸으며 시류에 순응하여 세조에게 끝까지 맞서지 않았다. 후대의 삶에 귀감이 되어 역사가 기억하는 이름은 수레로 찢기고 눈에 넣어도 좋을 자식들까지 교수당한 사육신이다. 인간의 사상에는 이렇듯 충절과 지조가 있어야 한다. 

유방백세(流芳百世),유취만년(遺臭萬年) 

살아생전에 덕을 쌓으면 그 꽃다운 이름이 백년을 전해지지만, 자신만을 위해 옳지 못한 삶을 사는 자들의 더러운 이름은 만년동안 그 냄새가 남는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행위가 신념과 지조를 버리는 일이요, 사람의 정치적 신념을 꺾는 공작질이다. 한 두 명의 프락치가 강물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인간이라면 무릇 아름다운 충절의 이름을 길이 전하는 사육신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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