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0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국정원)장이 개인 비리로 인해 구속되었다. 국민들은 원세훈이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을 위반하며 지난 대선에 개입했으므로 즉각 구속해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비록 대선개입혐의로는 아니지만 구속이 된만큼 여론의 뜨거운 감자인 원세훈의 대선개입혐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 개인비리 혐의로 구속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 연합뉴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이미 구속된 황보건설 대표 황보연씨로부터 현금과 선물 등 1억6000만여 원의 금품을 받고 관급·민간 공사수주에 외압을 행사한 혐의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를 적용받아 구속 수감되었다. 7월 11일자 인터넷판 <파이넨셜뉴스>에 따르면 검찰은 지난 6월 황보연씨를 구속하면서 “공기업이나 대기업이 발주하는 공사 수주에 도움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원 전 원장에게 억대의 돈을 건넸다”는 내용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금품수수에 대한 진술을 확보했다고 한다. 또한 황보건설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엑셀파일로 된 ‘비자금 장부’를 확보하여 물증을 확보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날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원세훈 전 원장이 홈플러스 연수원 설립 인·허가 과정에서 산림청에 압력을 넣은 것 외에 한국남부발전이 발주한 삼척그린파워발전소 제2공구 토목공사에서도 개입한 정황을 잡고 진위를 캐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검찰은 황보건설이 다른 민간건설사의 대형 공사를 수주한 것 역시 석연치 않다고 의심하고 있다. 황보건설은 현대건설이 원청업체인 세종시~정안IC 도로건설 공사를 비롯해 남해선 냉정~부산 4공구 도로공사 하청, 동대문 축구장 철거 시공사업, 문래고가차도 철거 공사 등에도 참여한 바 있다.

정보기관의 수장은 엄청난 권력과 엄청난 정보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공직에 있는 사람은 개인의 이익을 앞세워 권력과 정보를 사적으로 악용하면 안된다. 

그러나 국가정보원 뿐만 아니라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의 수장 중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권력과 정보를 악용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박정희 부정부패 온상 중앙정보부

정보기관의 수장이 비리에 연루된 권력형 비리사건은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비일비재했다. 박정희가 암살되고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신군부 세력은 1980년 6월, 민심을 잡기 위해 부정축재자를 선정하고 재산을 압수했다. 이 때 가장 많은 재산을 압수당한 인물이 바로 중앙정보부 부장 출신인 김종필과 이후락이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은 1962년 초부터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는데, 공화당 창당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4대 의혹사건을 일으켰다. 4대 의혹사건은 증권파동 사건,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소위 빠칭코라고 불리는 도박기계인 회전당구 사건이다. 이후 국회의 국정감사를 통해 그 내막이 일부 폭로되었으나, 끝내 의혹사건으로 남겨져 조성된 정치자금의 규모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당시 돈으로 수백억원, 지금으로는 수조원의 자금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종필은 이런 비리 사건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부정축재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에 공개된 부정축재자 재산 몰수액을 보면 김종필은 무려 216억원의 재산을 몰수당했다. 2009년 11월 13일자 <시사인>에 따르면 1980년 당시 서울의 웬만한 집 한 채 가격이 200만원이라고 하니, 당시 216억원에 달한 김종필의 부정축재액은 서울시의 주택 1만채를 살 수 있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 당시 4대 의혹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7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은 김종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액수인 194억원을 부정축재했다는 명목으로 몰수당했다. 이에 이후락은 “떡을 만지다 보면 손에 떡고물이 손에 묻기 마련”이라며 자신의 부정축재에 대해 변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 11월 13일자 <시사인>에 따르면 “이후락씨 일가는 적어도 3000만 달러 이상의 재산을 미국에 빼돌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2008년 6월 24일 <일요서울>에 따르면 이후락은 운전기사였던 박 모씨를 통해 강남에 수백억원 규모의 부동산을 마련해놓았다고 한다. 

한편, 5대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냈던 김형욱도 부정축재로 막대한 재산을 마련했다고 알려져 있다. 재미 탐사보도 전문기자로 알려진 안치용씨에 따르면 김형욱의 재산은 1500만~3500만 달러로 추정된다고 한다. 김형욱은 박정희 정권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해외에 망명하여 박정희 독재의 실상을 폭로, 비판했다. 그 과정에서 김형욱은 미국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돈이 3500만 달러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1978년 12월 8일자 기사에서 김형욱이 미국과 스위스에 예금한 돈이 2600만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달라진 것이 없는 안기부

1981년 중앙정보부를 해체하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부정부패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초대 안기부장인 유학성은 1993년 당시 국회의원이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공직자 재산공개를 추진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17억 7천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고, 국회의원들의 재산 평균은 약 24억 원이었다. 유학성은 65억원을 신고하여 국회의원 중에서도 많은 축에 속했으며 이 재산공개 파문으로 유학성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해야 했다.

전두환의 최측근이었던 장세동 안기부장도 부정부패에 깊이 연루되었다. 1983년 12월, 전두환 정권은 같은 해 6월에 벌어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의 희생자 유족에 대한 지원을 명분으로 일해재단 건립을 추진했다. 일해재단과 관련하여 전두환이 퇴임 이후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만든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고 일해재단은 “5공비리 청문회”의 주제가 되었다. 청문회에서 1984년부터 1987년까지 기업인 등으로부터 무려 598억 5천만 원에 달하는 기금을 강제로 기부 받아 재단 기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업에게 강제로 기부를 받는 작업을 주도한 사람이 당시 비서실장에 이어 안기부장을 지낸 장세동이다. 1996년 1월 24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장세동은 일해재단 비리문제로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이후 전두환에게 18억 원을 받는 등 8차례에 걸쳐 전두환에게 1억원에서 18억원씩, 모두 30억원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 88년 5공비리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장세동 전 안기부장,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아시아투데이

김영삼 정권 마지막 안기부장인 권영해는 안기부의 자금 중 10억원을 동생에게 준 것이 2004년에 드러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2005년 6월 3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권형해는 안기부장으로 재직하던 1997년 10월 초, 특별사업비로 배정된 안기부자금 10억 원을 횡령해 동생이 운영하다 부실화된 K식품의 인수비 명목으로 고합그룹 회장에게 제공하려했다. 이런 사실은 고합그룹에 대한 공적자금 수사를 하던 도중 고합그룹 회장이 “‘식품회사를 함께 인수하자’는 제안에 사업검토까지 했으나 사업성이 없어 10억원을 돌려주었다”고 진술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이외에도 노태우 정권 마지막 안기부장으로 노태우의 비자금을 관리했던 이현우도 비리와 관련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이현우는 노태우 비자금 조사 과정에서 대통령 경호실장과 안기부장 재직시절, 기업들로부터 26억 5천만 원을 받아 챙긴 혐의가 드러나 구속되었다.

국정원을 해체해야 부정부패를 척결할 수 있어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안기부, 국정원은 어두운 지하권력을 가졌다. 독재정권은 정보기관을 동원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려했고 그 일환으로 막대한 정치자금을 조성했다. 그 방식은 정보기관이 기업이나 개인을 부당하게 협박하거나 비밀리에 습득한 ‘기업정보’를 악용해 금전적 이익을 취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상당량의 정치자금이 개인의 호주머니에 흘러 들어갔다. 

국정원과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 안기부가 저질렀던 부정부패는 이들 기관이 막강한 권력과 이를 악용한 각종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정부패의 온상인 국정원을 그대로 놔둘 수 없다. 국정원 권력의 축소, 해체를 통해 국정원의 부정부패를 근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