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를 돌아본다 ⓛ] 교전으로 시작된 악연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이동훈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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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민족과 미국의 관계를 미군이 38도선 이남을 강점한 1945년 9월 8일로부터 찾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군사적으로 접근했던 시기는 이보다 한 세기가 빠른 19세기 중엽부터였다.

 

19세기 극동에서 서구열강들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불평등 통상조약을 강요해 수탈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구열강들은 함대를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하는 등 군사력을 이용하여 아시아 국가를 공격하여 불평등한 조약을 강제하였다. 미국 역시 제국주의 팽창정책에 따라 조선과 교전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이어진 신미양요이다.

 

미국의 19세기 대외정책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예외주의, 팽창주의를 추구하였다.

 

미국은 자신들의 국가를 특별한 국가라고 규정하였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예외주의는 ‘유럽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대륙’, ‘신대륙은 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하는 선한 곳’으로 선전하였고, 이른바 ‘미국의 팽창은 자유의 팽창이고 미국은 자유를 다른 영토에까지 전파하여 미국문명을 심어야 한다’며 그들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미국의 예외주의는 19세기 초반, 미국의 아메리카 대륙 내부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고 이후 팽창정책의 기초를 닦는 논리였다. 미국은 예외주의에 기반하여 자신의 팽창주의를 정당화 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팽창주의를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으로 해석하였다. 미국은 신대륙 국가로서 탄생부터 자유를 기반으로 하고 자유의 영역을 팽창할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1)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식민지 개척정책을 교묘하게 포장했다.

 

미국은 북미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자 해외진출에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고 바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미국은 영토를 확장하고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산업이 발달하여 잉여 공산품의 생산이 늘어나 새로운 시장 개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북미 대륙에서 영토 확장이 어느 정도 완료된 미국에게 새로운 시장은 바로 해외를 의미했다.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여러 약소국가들을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적 상품시장으로 만들기 위한 침략책동에 나서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함포외교’였다. 일단 미국은 무력을 앞세워 1844년 중미통상협정, 1854년 미일화친조약 등을 체결하였다. 극동지역에서 침략할 곳을 물색하고 있었던 미국에게 조선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특히 조선은 지정학적으로 볼 때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최적의 전초기지, 교두보였다. 1853년 동래부 용당포, 1855년 강원도 통천 등지에서부터 미국함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시아 접근이 빈번해지자 조선 근해에서 미국 배의 출몰과 정박이 잦았던 것이다.

 

미국이 조선에 처음으로 통상개방 가능성을 타진한 것은 1832년이다. 일본과의 통상교역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려 했던 로버츠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미일간의 조약을 체결할 수 있다면 대조선조약도 가능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1834년 맥레인 국무장관에게 보고하였다. 1845년 2월 15일 제 15차 하원회의 때 당시 해군군사위원회 의장이었던 프라츠는 ‘미국의 대일 및 조선무역 확대를 위한 결의안’을 제기하기도 했다. 프라츠는 “일본과 조선의 인구를 합하면 총합 6,000만에서 7,000만 명 정도이니 일본과 조선에 외교관계를 튼다면 이보다 더 유익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미국정부에 꼭 알려주고 싶다”2)고 하였다. 당시 통상 요구라는 것은 불평등조약에 응하지 않으면 무력을 앞세워 제압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이는 명백한 강압적 의도였다.

 

조선의 통상수교거부정책

 

미국이 조선에게 ‘함포외교’를 시도하여 반식민지적 상품시장으로 만들려고 할 때, 조선은 고종이 즉위하여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초기부터 명-청과는 조공외교를 진행하고 일본·여진과는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행하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외교의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구열강과의 교역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조선정부가 서양을 배척하게 된 중요한 원인은 천주교 문제였다. 조선의 정치체제는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백성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와 조상에게 효도하여야 하는 것이 기본적 통치의 이념이었는데, 천주교인들은 조상들에 드리는 제사를 금하고 하느님을 숭배하였다. 조선정부는 유교 통치 이념과 충돌하는 천주교에 체제위협을 느끼고 18세기 후반부터 천주교를 탄압하였는데 이는 양이(洋夷) 세력에 대한 경계로 이어져 쇄국정책을 펼치게 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는 대원군 섭정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1866년 초, 천주교 신자들을 대거 처형하는 병인사옥(丙寅邪獄) 사건이 있었다. 1866년 당시 천주교는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와 같은 일을 겪었으나 은밀히 신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초기에 대원군은 천주교를 묵인하고 있었고 오히려 천주교를 통해 서구열강과 교류를 할 생각까지 있었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연해주까지 진출하여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했었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대원군은 천주교 선교사들을 이용하여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려 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무산되고 말았다. 여기에 천주교와 대원군이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천주교의 확장을 못마땅하게 본 세력에게 몰리게 되어 권력이 흔들리게 되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에 들어가게 된다. 8천명에 달하는 천주교도가 처형되었고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이 그렇다고 외국인을 홀대한 것은 아니다. 1855년, 1865년, 1866년에 미국 배가 조선 연안에서 표류할 때마다 조선은 ‘어려움에 처해 조선을 찾은 외국인을 국적에 상관없이 후대한다’는 의미의 ‘유원지의(柔遠之義)’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일례로,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있었던 1866년 5월 미국 선박 서프라이즈 호가 서해안 청산 앞바다에서 표류했는데, 조선은 이들에게 인도적 구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난 선원들은 청산 지역에 24일간 머물면서 대접을 받은 뒤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옷과 음식까지 추가로 지원받았다. 이들은 의주를 거쳐 산해관과 심양으로 갔는데, 조선측에 있을 때는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청나라로 넘어가자 대우가 나빠졌다고 전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제너럴 셔먼호는 무게는 80t, 길이 약 55m 넓이 15m, 높이 9m 규모의 중기범선이다. 원래 제너럴 셔먼호는 해군 소속 프린세스 로열호 였으나 대청무역 상인이었던 프레스턴(Preston)이 구입하여 제너럴 셔먼호라고 개명한 선박이었다. 프레스턴은 중국 톈진(天津)에서 영국의 메도우즈 상사(Messrs Medow & Co)와 결탁해 조선에 가지고 갈 비단·유리그릇·천리경·자명종 등의 상품을 셔먼호에 선적하였다. 배의 구성원으로는 영국인 페이지(Page, 45세)를 선장으로,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27세) 목사를 통역으로, 호가즈(Hogarth, 37세)를 관리인으로 임명하고, 중국인 해로 안내원 1명, 화폐 감정원 1명, 선원 16명과 말레이시아 인 선원 3명을 채용하여 선주 프레스톤을 포함하면 총 24명에 달했다.

 

▲제너럴 셔먼호. 군함이었던 프린세스 로얄을 프린스턴이 구입하여 제너럴 셔먼으로 개명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포 2문을 보유하고 있었고 승무원들이 완전무장하여 애초부터 단순히 통상을 요구하는 상업선이 아니라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할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항해도중 우리정부의 문정관(問情官)3)을 접할 때마다 군함이 아니라고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중무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4)을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제너럴 셔먼호는 7월 29일 톈진을 출발, 지푸를 거쳐 8월 9일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셔먼호는 백령도를 거쳐 8월 21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에 들어왔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8000여명의 천주교도들을 처형한 후 프랑스가 침략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긴장된 상태였다. 실제 제너럴 셔먼호가 백령도 부근에 정박했을 때 백령도 관리가 셔먼호에 공격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 경내에 정박하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셔먼호에 사람을 보내어 셔먼호의 목적을 물었다. 토머스는 백인들의 국적을 소개하고 항해 목적에 대하여서는 상거래뿐임을 강조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셔먼호 측은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대해 문제를 삼으면서 프랑스 함대가 오고 있다고 협박하면서 통상을 압박하였다.5) 심지어 평양감사가 교역을 거부할 경우 서울로 쳐들어가겠다고 선언6)했다. 조선은 천주교와 야소교(기독교) 모두 국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었고, 대외무역도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밝히며 제안을 거절하였다. 대신 조선은 유원지의에 따라 제너럴 셔먼호가 요청하는 데로 백미 1석, 소고기 50근, 닭 25마리, 계란 50개, 장작 20묶음을 지급하고 중앙정부의 지령이 있을 때까지 현장에서 대기할 것을 요구하였다.7)

 

그러나 셔먼호는 조선 측의 요구를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수심측량을 하면서 대동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 만경대 한사정에까지 도달하였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중군 이현익과 서윤 신태정을 파견하여 즉각 퇴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셔먼호는 물러가지 않고 불법적인 측량 활동을 계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제지하던 순영 중군(中軍) 이현익과 부하 박치영·유순원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이에 신태정이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하여 이현익 등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셔먼호 측에서는 석방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 등을 요구하는 강도적인 행각을 보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성 내의 관민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에서는 조총과 대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기에 격분한 강변에 모인 관민들은 돌팔매·활·소총으로 맞서 대항하였다.

 

불안감을 느낀 셔먼호 측은 뱃머리를 돌려 하류로 내려가 양각도에 이르렀다. 이 때 퇴역장교였던 박춘권이 제너럴 셔먼호에 잠입하여 이현익을 구출해내었지만 유순원과 박치영은 결국 살해되고 말았다.

 

당시 며칠씩 계속된 비로 강의 수위가 높아졌다가 여러 날이 경과하는 동안 평상시로 돌아가게 되자 셔먼호는 양각도 서쪽 모래톱에 선체가 걸려 항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자 셔먼호의 승무원들은 강도·약탈·총포격 등의 침략적인 행동을 자행하여 사망 7명, 부상 5명이 발생하는 유혈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셔먼호를 조용히 퇴거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박규수는 철산부사 백낙연 등과 상의하여 포격 및 화공을 가하였다. 조선은 24일 썰물 때 작은 배에 연료를 싣고 불을 지른 다음, 그 배를 제너럴 셔먼호 쪽으로 띄움으로써 제너럴 셔먼호를 소각시켜버리고, 2문의 대포를 노획했다. 고종실록 7월 27일자에 따르면 배에 불이 번지자 영국 선교사 토머스와 중국 상인이 뱃머리로 기어 나와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박규수가 이들을 강안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성난 평양부민들이 삽시간에 달려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나머지 생존자들도 전원 사망했다고 한다. 한편 이양선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한 대원군은 박규수·백낙연·신태정의 품계를 올려주고 중국에 양이쇄멸(洋夷殺滅)의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미국배가 조선의 영해에 허락도 받지 않고 대동강까지 들어와 불법으로 측량을 한 행위는 명백한 주권침해로 간주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게다가 셔먼호는 자신들이 순수한 물물거래를 위해 왔다고 주장하였지만 처음부터 프랑스인 신부 학살사건을 추궁하였고, 조선의 공권력인 중군을 납치하고 식량을 약탈하는 등 무력충돌을 불사하였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미국의 움직임

 

제너럴 셔먼호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는 1867년 프랑스에 공동으로 조선에 대한 보복원정을 할 것을 제안, 무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고자 하였다. 미국 아시아 함대 벨 제독의 경우 2,000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조선을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하고 거문도를 점령하고 아시아 함대 기지로 만들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제안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반도 중시정책과 당시 아메리카 북미 지역의 분쟁 때문에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못했다.

북경주재 미국 공사 벌린게임은 1867년 1월, 미국 아시아 함대 벨 제독에게 아시아 함대 소속 ‘와추세트’ 전함을 조선에 파견하도록 조치하였다. ‘와추세트’ 전함 사령관 슈펠트는 1867년 1월 지금의 백령도 부근 우도에 정박하여 서프라이즈 호 처우에 대한 감사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억류하고 있는 선원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슈펠트는 조선을 응징하는데는 ‘무력행사에 근거한 해결책’만이 최선책이라고 강조하면서 미국의 포함외교 실시를 강력히 촉구하였다.

 

서양인 2명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자 미국은 다시 세난도어 호의 페비거를 조선에 파견한다. 세난도어 호는 1868년 4월 조선에 도착하여 탐문을 하였다. 페비거는 현지주민과 접촉하면서 셔먼호가 평양에서 분별없는 폭행을 자행했기 때문에 전멸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하였지만 세난도어 호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1달여 동안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불법적으로 수로 측량을 한 후 중국으로 귀항하였다.

 

한편 주상해미국총영사 통역관이던 젠킨스는 독일인 오페르트에게 접근하여 조선으로 갈 것을 도모하였고 동시에 총영사 조지 슈어드에게 셔먼 호 승무원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짓보고를 했다. 조지 슈어드는 이 거짓 보고를 받고 셔먼호의 생존자를 구조하는 한편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손해 배상을 받으며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항구를 개항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조선에 가겠다는 의사를 본국에 전달했고 본국에서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런데 젠킨스와 오페르트에 의해 1868년 5월 8일 남연군 묘를 파헤치는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오페르트는 조선기행이라는 책에서 “그들의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일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를 강요하여 제안된 조건을 수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젠킨스-오페르트 일당이 남연군 묘를 파헤친 후 남연군의 유골을 이용하여 대원군을 협박, 불평등하고 침략적인 통상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일어나자 조지 슈어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슈어드는 이후에도 조선의 개항을 노렸다. 1869년에는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주범격인 젠킨스 재판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조선에 보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8)

 

조선과 미국의 전쟁 – 신미양요

 

조선 내부에서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의 해적 만행과 병인양요를 겪고 1868년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겪음으로 해서 화합을 배척하고 전투를 불사하는 척화주전론이 더욱 굳어졌다.

1870년 4월 4일 피쉬 신임 미 국무장관은 해군성에 훈령을 보내 주청전권공사 로우에게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러 가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1870년 11월, 미국의 주청전권공사 로우와 미국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 상해주둔 미국 총영사 조지 슈어드는 협의를 통해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한 ‘조선 원정’을 하기로 합의했다. 1854년 페리가 일본을 개항시켰던 것처럼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한 것이다.

 

국무성은 1971년 4월 로우에게 조선원정 전권을 위임한다. 국무성은 훈령 9호에서 조선과의 개항을 원만하게 달성하기 위하여 무력의 시위가 필요할 경우 이를 할 수 있으며, 무력시위를 위해서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을 휘하에 배속하니 그의 조언을 청취할 것과 조.미 통상조약문을 작성함에 있어 동봉한 미.일 통상조약문을 참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조선원정 명령을 받아 콜로라도호를 포함한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하였다.

 

미군은 5월 21일 경기도 남양부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수로를 측량하였고 5월 26일에는 물류도(勿溜島)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정부는 남양부사로부터 이러한 급보를 전해 듣고 어재연을 진무중군으로, 이창회를 강화판관에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 서울에 있는 각 영으로부터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화약·군량미를 수송했다.

 

한편 미국 함대는 5월 27일 인천 제물포를 지나 강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5월 29일 작약도에 정박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5월 26일부터 이들의 목적을 알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였다. 김원모의 근대 한미관계사에 따르면 5월 28일 필담자리에서 “이 배는 대아미리가(大亞美理駕) 합중국 소속의 군함이며, 이곳에 온 목적과 이유는 우리나라 흠차대인과 조선의 대사헌(大司憲: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2품의 벼슬)과 회담할 일이 있어서 이곳에 왔다.”고 밝혔다고 한다. 배의 소속이 미국이라는 것만 밝히고 나머지는 전혀 밝히지 않은 것은 조선을 무시한 처사였다. 5월 31일 조선 대표가 왔으나 대사헌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로우는 불참하고 대신 서기를 참석시켰다. 드루 서기는 “수도 서울을 방문, 조선의 최고 당국자와 직접 교섭할 것이다”9)라고 언명하면서 “서울로 통하는 해상관문인 강화해협을 탐측할 것인즉, 조선 軍民은 이에 놀라지도 말고, 방해하지 말 것”을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미국이 조선정부의 허가없이 해협을 탐측하고, 서울로 항행하겠다는 의도를 보인 것은 명백한 영토침략행위였다. 애초에 함대를 조선에 끌고 들어온 것부터 함포외교를 통해 조선을 굴복시키겠다는 의도를 보인 것이었다.

 

6월 1일 오후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작은 배 4척과 포를 실은 배 2척을 거느리고 염하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 이들이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가 포격을 가했고, 덕진진 초지진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했다. 그 결과 미국 측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 신미양요 당시 초지진에서 미국 잡이를 하는 장면. 신미양요 기록사진집 ⓒ강화군청

 

미국은 손돌목에서 있었던 포격 행위를 빌미로 6월 10일을 D-day로 정하고 조선측의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미군은 6월 10일 강화도의 초지진을 해상 함포사격으로 공격한 뒤 초지진을 점령하였다. 다음 날에는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조선은 이 전투에서 350명이 넘는 전사자가 나왔으며 10여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미국인 역사가 그리피스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조선군은 비상한 용기로 응전하였다. 창과 검을 들고 미군을 향하여 돌진했으며 탄약이 없는 병사는 맨손으로 성벽에 올라가서 돌을 던지고 또한 흙을 쥐어 눈에 뿌렸다. 그리고 손에 무기를 쥐지 않은 병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일보일보 전진하면서 분전을 전개하였다. 부상자는 자살하였다. 이 장렬한 백병전을 통하여 포로는 단 한명도 없었다.” 이 전투에서 지휘관인 중군 어재연, 동생 어재순 등도 전사하였다.

 

10일 초지진을 점령하고 11일 광성보를 점령한 미국은 6월 12일 일단 점령한 진에서 물러나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조선 정부는 이번에도 통상을 거절하였다. 6월 20일 로우가 피쉬 국무장관에게 보낸 글을 보면 함포외교가 통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이 묻어나온다.

 

나는…조선왕과 적절한 조약을 체결하는데 거의 희망을 잃어버렸다. …많은 나라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준 최근에 미군이 보여준 행위는 별효과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10)

 

미국은 결국 교역에 성공하지 못하고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조선은 신미양요를 척화주전론의 승리로 인식했으며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재확인했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洋夷侵犯非戰則 和主和賣國 양이침범비전즉 화주화매국)”는 척화비 문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미양요는 서구열강에 대한 조선의 적대감을 높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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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이렇게 3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탈하려 하였고 그 중 신미양요는 대대적인 준비를 갖추고 막대한 군사력까지 동원하여 덤벼들었으나 결국 조선 침탈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미국은 일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신미양요를 이끌었던 로저스 제독은 일본으로 후퇴한 자리에서 일본 정부의 정한론 결행의지를 간파했다. 로저스는 “일본은 조선침략을 열망하고 있다. 생각건대 일본은 조선침략전쟁을 감행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확실치 않다. 그러나 나는 이 두 나라간에 평화적 방법으로 수교할 것 같지 않다.”11) 고 밝혀 일본이 향후 조선을 침략할 것임을 전망했다.

 

이후 미국은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을 적극 지원한다. 1872년 1월 22일 뉴욕 해럴드 지는 “미국의 태평양정책”이라는 사설을 통해 “일본과 힘을 합쳐 반드시 조선침략의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일동맹을 지지하였다. 또한 미국은 조선과 일본이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자, 이를 이용하여 가장 먼저 1882년 조선과 조미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다.

 <주석>
1) 강명세, 『미국의 전통적 외교안보 원리와 미국 세계전략의 변화』 (세종정책연구 2011-13), p.9
2) 이민식, 『여명기초 한미관계사 연구』 (정훈출판사, 1996), p.62
3) 조선 후기 외국선박이 나타나거나 외국인이 표류할 때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된 관직.
4) 서울특별시, 『셔어먼호 사건의 발생』, 서울 600년사, http://seoul600.seoul.go.kr/seoul-history/sidaesa/txt/5-1-2-2-2.html
5) 박규수 감사의 조선방문 목적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① 왕성(王城)에 백탑(白塔)이 있는 것은 사실인가. ②조선정부는 왜 서양인 선교사를 학살했는가. ③ 야소교(耶蘇敎, 신교)는 천주교보다도 천하인민을 선도하는 교(敎)이다. ④ 불란서함대는 귀국의 왕성을 향하여 진행중이다. ⑤ 중국정부는 귀국에 외국과의 통상을 하도록 지령을 내리고 있다. ⑥우리들의 방한 목적은 셔어먼호에 적재되어 있는 화물을 귀국의 화물과 교역하려는데 있으며 결코 타의는 없다.」 서울특별시, 『셔어먼호 사건의 발생』, 서울 600년사, http://seoul600.seoul.go.kr/seoul-history/sidaesa/txt/5-1-2-2-2.html
6) 김원모, 『셔먼호 사건과 미국함대의 침입』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1998.11)
7) 서울특별시, 『셔어먼호 사건의 발생』, 서울 600년사, http://seoul600.seoul.go.kr/seoul-history/sidaesa/txt/5-1-2-2-2.html
8) 이민식, 『여명기초 한미관계사 연구』 (정훈출판사, 1996), p.106
9) U. S. Department of the Navy, Annual Report of the Secretary of the Navy on the Operations of the Department for the Year 1871(Washington:Government Printing Office, 1871), p.277 / 김원모, 『셔먼호 사건과 미국함대의 침입』에서 재인용
10) 이민식, 『여명기초 한미관계사 연구』 (정훈출판사, 1996), p.133
11) Rodgers Collections, Rodgers to Ann, December 9, 1871. / 김원모, 『셔먼호 사건과 미국함대의 침입』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