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중국의 6.25 참전은 정당했다


                       중국 언론에 실린 글



▶역자의 말: 지난 1123일 발생한 연평도 포격전으로 첨예한 긴장이 조성되었다. 남북은 격한 언사를 쏟아내고 미·중·러·일 등은 상황을 주시 하면서 대응책을 모색하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외교가에서는  중국의 역할을 주문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기대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날린다.


얼마 전 중국의 <환구시보>중국은 성난 조선()을 통제할 수 있는 조련사가 아니며 조선에 대해서라면 중국 외교에도 ‘특효약’이 없다는 글을 게재한 것은 중국의 속내를 내보인 것으로 읽히고 있다.
사실 미국과 한국은 6자 회담이 난국에 처하거나 한반도 정세가 요동칠 때마다 ‘중국의 역할’을 통해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해왔다.
북한의 유일한 동맹인 만큼 ‘중국의 말은 통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서방과의 우호관계를 필요로 하는 중국을 지렛대 삼아 북한을 흔들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이 그 같은 관념을 떠받치고 있을 뿐이다.
과연 중국은 서방이 바라는 대로 북한을 통제할 수 있을 가. 아니,‘통제’까지는 몰라도 ‘서방을 의식한 개입’에 나설 의향은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한미는 북중관계의 역사적 근원과 속성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 중국에게 북한이 어떤 존재인지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 교지<학습시보>에 실린 ‘항미원조전쟁(6.25전쟁)의 의는 부정할 수 없다’는 제목의 칼럼이다.
필자는 현재 중국인민해방군 국방대학 교수 (전략교육연구부)로 재직하고 있는 서염 육군소장이다. 독자들은 일부 대목에서 불편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은 북한에 대한 현 중국 지도층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참고자료로서 무시 못할 가치를 갖는다.


 


          항미원조전쟁의 의의는 부정할 수 없다

                 
서염 중국 국방대할 교수(전략교육연구부)


올해 10 25일은 ‘항미원조전쟁’(6.25 전쟁)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새 중국 정권을 튼튼히 다지고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항미원조전쟁’에 대해 마땅히 찬양하고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국내외 적대세력들은 오히려 그릇된 정보와 왜곡된 주장을 유포시킴으로써 ‘항미원조전쟁’을 부정하고 있다. 가치관이 모호하고 역사 인식이 부족한 국내(중국)의 일부 인사들도 그 영향을 받아  ‘항미원조전쟁’의 정당성과 승리적 결과에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는 그릇된 망발을 퇴치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누가 침략했나
개혁개방 후 국내(중국)에서 많은 정부자료들이 기밀해제 되고 러시아도 6.25전쟁과 관련한 대량의 문서들을 공개했다. 일부 불순분자들은 자료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누가 먼저 총을 쏘았나?’와 같은 문제를 논하면서 (중국의)파병의 필요성을 부정하거나 심지어 ‘침략자는 누구였나’하는 데에까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1950
6 25일에 개시된 전쟁은 남북조선의 내전이었으나 미국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다고 선포했다.  이틀 후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은 이를 핑계로 미국의 참전을 선언함으로써 조선내전을 ‘국제전’으로 만들어 버렸다.
1948
년 말 소련군의 철수와 1949년 미군의 철수 이후 대치 중이던 남북 사이에는 총성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38선 부근의 전투는 1949년 말 ~1950년 초에 이미 대대 규모로 확대되어 있었으며 점차 힘의 우위를 차지한 일방이 영토수복과 통일을 위해 대규모 공세를 벌이는 양상으로 나아갔다.
유엔헌장은 유엔의 내정간섭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내전이 개시된 다음날인 1950 6 26일 주일 미 공군을 급파해 전쟁에 개입했다. 6 27, 미 행정부는 자국의 무력간섭에 국제법적 정당성을 부여할 목적으로 ‘조선이 한국을 침략했다’는 내용의 유엔결의를 다수결로 통과시키고 미국의 참전을 ‘침략전쟁에 대한 저항’으로 규정했다. 당시 유엔회원국의 상당수가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던 상황에서 그들의 ‘협조’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시각에 따르면 국내전쟁은 오직 ‘진보’와 ‘반 진보’로 분류될 뿐 ‘침략’으로 표현할 수 없다. ‘침략’은 오로지 국가간 전쟁에만 적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당시 남북 양측은 오직 ‘하나의 조선’(양측은 1990년대에 와서야 각각 주권국가 자격으로 유엔에 가입했다 ? 필자) 만을 인정했으므로 누가 먼저 군사행동을 시작했든 그것을 ‘침략’이라 부를 수 없다. 오히려 미국이 조선에 대한 무력간섭을 자행하고 그 기회에 대만을 점령한 것, 이로써 중국의 통일 실현을 가로막은 것이 진짜 ‘침략’인 것이다.
조선내전은 대만과 무관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1950 627일 파병성명을 발표하면서 대만에 대한 파병도 선언하고 대만에 대한 어떤 공격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미 해군 제7함대는 바로 이날 대만해협에 침투해 순찰활동을 개시했으며 그와 동시에 대만의 국민당 군대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 뒤 미 공군 제13항공단도 대만 비행장에 진주했다.  이로써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미 해군과 공군은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 진출을 가로막고 중국의 통일과정을 중단시킨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제법적 준칙을 위반한 침략행위이다.  60년 당시 누가 침략자였고 누가 침략에 반대했는지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가?


 


 


중국의 참전은 당연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이 ‘항미원조’(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자는 뜻)를 위해 참전한 배경을 조선문제에서만 찾을 뿐 미국의 대만침략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를 편협하게 보기 때문이다.
1951
1023일 모택동은 ‘전국정치협상회의’개막사에서 분명히 말한 바 있다.
만일 미군이 우리나라의 대만을 점령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침략해 우리나라의 동북 변강(국경지대)까지 쳐들어 오지 않았다면 중국 인민은 미국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인민일보> 1951 10 24일자)
미국의 대만 침입은 조선내전을 핑계로 한 것이지만 실은 오래 전부터 준비된 음보였다. 1980년대에 기밀해제 된 미국의 기록물들은 백악관과 펜타곤이 1948년 말 대만을 ‘서태평양 방어선’의 중요한 목표물로 지정했음을 보여준다. 그 후 미국은 중국 영토인 대만을 침략했을 뿐 아니라 38선을 넘어 중국과 순치(脣齒) 관계인 조선을 삼키려 덤벼들었고 미 공군기들은 압록강 접경의 중국 땅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감행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중국 인민이 어떻게 대응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1950 7월 이후 국내에서는 미국의 대만·조선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항의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모택동은 ‘조선전장에 나가 미국에 반격을 가할 것’을 결정했다.
최근 어떤 사람들은 항미원조전쟁이 대만문제 해결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역사를 도외시한 판단이다. 바다건너 ‘금문도’를 공격하기도 힘들었던 당시의 중국인민해방군이 어떻게 세계 최강의 미 해공군이 장악한 대만을 되찾을 수 있었겠는가?  역사적 식견을 가진 이들은 ‘항미원조’를 위해 참전한 것이 대만문제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바로 미국의 대만 침입이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로 하여금 참전을 결정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은 모선과 대만을 침략했을 뿐 아니라 베트남을 침략한 프랑스를 지원함으로써 조선·대만·베트남의 3대 전략요충지에서 새 중국에 위협을 가했다.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3대 지역에서 우리와 미 제국주의와의 힘겨루기는 불가피하다.  문제는 어느 지역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뿐이라고 보았으며 결국은 조선 파병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1958
년 중국지원군이 조선에서 철수하기 하루 전날, 주은래는 ‘지원군간부대회’에서 조선·대만·베트남 등 세 전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재 우리의 세 전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만일 베트남에서 싸운다면 섬이 많은 연해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다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에 역사가 증명한 것처럼 조선전쟁에 참전해 미국의 침략행위에 반격을 가하기로 결정한 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중국에게 유리한 선택이었다. (열악한 해·공군력에 비해) 육군의 우세를 발휘한 것, 후방지원을 원활히 할 수 있었던 것, 소련의 지지를 얻어낸 것.


당시의 미 정부와 여론도 인정했던 것처럼, 중국지원군은 참전으로 ‘미 육군사상 최대의 패배’를 안겨 주었다. 새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으로 미국의 침략 기도를 분쇄했으며 중국의 안보 보장과 우호국에 대한 지원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항미원조전쟁’은 승리했다.


어떤 사람들은 ‘항미원조전쟁’의 의의를 폄훼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통계수치를 과장해 공연한 짓이었다”,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은 논리를 펴고 있다. 어떤 전쟁으로 손실을 입었을 때, 그 전쟁이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면 득실을 대비해 어느 쪽이 큰지, 어느 쪽이 작은지 잘 살펴야 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조선전쟁은 원점에서 마감되고 ‘항미원조전쟁’은 위대한 승리를 이룩했다. 갓 태어난 중국의 군대와 인민은 조선전쟁에서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상대와 대결해 그들을 압록강 일대로부터 38선 남쪽으로 몰아내고 진지방어전을 통해 전선을 고착시킴으로써 마침내 ‘정전’이라는 타협을 이끌어냈다.


이는 중국이 과거 100여 년간 외래 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위대한 승리였으며 이때부터 ‘아편전쟁’ 이후 크게 위축돼 있던 중국의 민족적 자존심이 회복되었다. ‘항미원조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인해 중화민족은 자랑스럽게도 국제사회에 우뚝 일어설 수 있었고 미국·소련을 포함한 세계 강국들의 존중을 받게 되었다. 추호의 과장도 없이 말해서, ‘항미원조전쟁’은 중화민족을 역사적 부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든 중요한 정신적 지지대로 되었다.


29개월간의 ‘항미원조전쟁’에서 중국이 파병한 297만 명의 중국지원군 가운데 전사자 183천여 명에 조선인민군(북한군) 전사자 10만 명을 더해 봐도 희생자수는 적군(연합군·국군) 사망자수 28만 명과 엇비슷하다. 전쟁 중 중국지원군은 5백만 톤의 물자를 소비하는 데 그쳤지만 미군은 75백만 톤을 소비했다.


‘항미원조전쟁’ 기간 중국은 62억 위안을 지출했는데 이는 동기 국내총생산액의 3.6%, 국내 재정지출의 12%에 달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전략에 따라 새 중국은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군사력과 경제력이 급속도로 장성했다. 전쟁기간 중국 경제는 15%라는 높은 성장을 기록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실전을 통해 강화되고 소련제 무장장비들을 전면 도입했으며 보병 위주였던 상태에서 다양한 무력을 보유한 현대적 군대로 발전했다.


팽덕회는 항미원조기간에 몇 십 년에 맞먹는 국방건설이 이룩됐다고도 했다.


전쟁기간 소련에 대한 국가채무는 30억 위안(당시 환율로 13억 달러 규모)이 었는데 1959년까지 광물로 대부문 상환했고 이는 1953~1959년 기간 재정지출의 1.5% 수준이었다.


새 중국이 ‘제1선’인 조선에 파병하자 소련도 비교적 많은 원조로 호응해 나섰다. 소련이 제공한 154가지의 중점 지원대상들은 중국으로 하여금 100억 위안을 기초공업과 국방공업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에 이용할 수 있게 했다.


‘항미원조전쟁’ 시기의 소득과 지출을 대비해 보면 모택동이 지적했듯이 참전 이익이 대단히 크며 만일 참전하지 않았다면 손실이 막대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 ‘항미원조전쟁’으로부터 60년이 지났다.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는 중국 인민은 ‘항미원조전쟁’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역사를 객관적·전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모호한 인식을 일소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며 국내외 적대세력들의 망발과 치졸한 반중 선전공세에 타격을 가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항미원조전쟁’의 위대한 정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찬양하는 것도 앞으로 ‘소프트 역량’과 ‘하드 역량’이 강화되는 것과 함께 물질적 여건이 나날이 개선되고 있는 실정에서 더욱 강한 정신적 지주를 확립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