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총선 예비 후보로 나섰던 지인은 의외의 이이기를 전했다. 지인에 따르면 유권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이야기는 애초 기대와는 상당히 달랐다. “제발 싸우지 말고 나라를 위해 일 해 주세요!”
오늘 날 한국의 정치는 서로의 존재를 쉽게 용남하지 않는 극단적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대결은 악의 세력에 맞선 선의 전쟁이라는 진영 대결 형식을 띠고 있다. 한 편에서는 편협하고 무능력한 좌파에 맞선 우파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다른 한 편에서는 친일독재 후예 수구세력에 맞선 개혁세력의 전쟁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럼으로써 각자 자신을 정의의 사도로 부각시킨다.
대북 정책에서처럼 간과할 수 없는 진영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인이 경험했다시피 민심은 진영 대결 자체를 경계하고 심지어 혐오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왜 그럴까. 도대체 민심이 간파하기 시작한, 선과 악의 대결 포장지 이면에 존재하는 진영 대결 본질은 무엇일까?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 무대를 사이에 두고 각축전을 벌여 온 두 세력은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였다. 여기서의 세대는 생물학적 범주가 아닌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공유한 집단을 가리키는 일종의 역사적 범주이다. 두 세대 모두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는 무한한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다. 저마다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원천이다. 하지만 민심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다분히 기득권에 집착하는 꼰대에 불과할 뿐이다.
기득권 세력이라는 표현에는 상당한 경멸감이 깃들어 있다. 당사자들로서 왜 우리가 기득권 세력이냐고 강하게 반발하기 십상이다. 특히 독재와 특권에 저항해 온 민주화 세대로서는 쉽게 수긍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럼에도 진실은 두 세대 모두가 기득권 세력임을 단순명료하게 입증한다.
산업화와 민주화 두 세대 모두 자녀 교육에 지독하리만치 공을 들인다. 동기가 무엇일까? 과거 다수의 한국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의 처지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삶을 물려주고 싶은 욕망에 따른 것인가? 수도 없이 이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늘 똑 같았다. 후자이다.
좀 더 분명하게 확인해 보자. 기득권 세력임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민주화 세대 중 가장 아래쪽에 존재했던 집단은 노동계였다. 과거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선 이유는 자신의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요즘은 어떤가? 어느 자리에서 질문을 던졌다. 노동계 주축인 대기업 정규직 입장에서 자녀가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으려 할 때 예스일까 노일까? 청중은 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스이죠!”
한국 사회는 어림잡아 1%의 특권 세력과 20%의 기득권 세력 그리고 그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80%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한국 사회의 온갖 현상을 빚어내는 근원이 되고 있다. 기득권 세력은 기득권 유지에 우선적 관심을 보이면서 변화와 혁신을 기피한다. 그 결과 특권 청산마저 어려워진다. 안타깝지만 민주화 세대가 주축인 문재인 정부는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이른바 조국 사태를 계기로 민심이 간파했듯이 산업화 · 민주화 세대 간 진영 대결 본질은 화려한 수사와 무관하게 ‘기득권 쟁탈전’이다. 눈앞의 기득권을 놓고 쟁탈전을 벌일 때 정치는 서로를 용납 못하는 극한 대결로 치닫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대로이다. 교육을 매개로 세습되는 폐쇄적인 기득권 구조는 다수의 젊은이들을 절망에 빠트리고 있다. 과연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다. 산업화 · 민주화 세대 모두 더 이상 미래를 감당하기 어렵다. 도리 없이 1970년대 이후 출생했으면서 촛불혁명의 역사를 개척해 온 ‘촛불세대의 독자세력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홤께 게재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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