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국정원발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조작사건”이 여론의 뜨거운 감자이다. 내란이란 무엇인가? 국토참절과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쉽게 말해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한 지역 이상에서 폭동을 일으킨 행위를 의미한다.
안타깝게도 길지 않은 대한민국 역사에 내란음모행위는 두 차례 있었다. 그것은 바로 1961년 5월 16일, 해방 전 일본이름이 다까끼 마사오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이며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12.12 군사쿠데타 역시 내란음모행위였다.
내란혐의는 그 사안의 중대성으로 인해 법률에서 정하는 공소시효가 없다. 다만 박정희의 경우 1979년 10월 26일, 믿었던 측근에게 암살당하였으므로 5.16 쿠데타로 사법처리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96년, “반란수괴”, “내란수괴” 혐의로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후 1997년 4월 17일에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아 “내란수괴”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
당시 법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반란수괴”, “반란모의 참여”, “반란중요임무 종사”, “상관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를 적용하였다.
내란음모가 어떤 죄인지 알려면 대한민국 법원에 의해 “반란수괴”이자 “내란수괴”로 규정된 전두환의 내란죄를 다시금 살펴보면 된다.
치밀하게 계획된 12.12 쿠데타
1979년 10월 26일, 유신정권의 제왕적 통치자였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손에 암살당하자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을 맡고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10.26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전두환의 죄목이 “반란수괴”이자 “내란수괴”의 두 가지인 이유는 전두환의 정권찬탈 과정이 12.12 쿠데타와 이듬해 5.17 비상계엄령 확대의 두 단계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1979년 12월 12일의 12.12 쿠데타는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를 연행해 군대 내부의 지휘통솔권을 노린 “군사반란”이었다. 이후 1980년 5월 17일의 5.17 비상계엄령 확대와 연이은 5.18 광주항쟁에서 광주시민들을 사살하도록 지시한 점이 “내란수괴”, “내란음모살인”에 해당한다.
반란수괴 전두환은 1979년 11월 중순부터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전두환은 12.12쿠데타를 위해 사전계획을 치밀히 모의하였는데, 모의과정에서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의 동조를 얻었으며 11월 말경에는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훈련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공수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들로 반란모의를 확대하였다. 나아가 12월 9일, 반란수괴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한 세부계획서를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전달받고, 이를 확정한 후 합동수사본부 조정통제국장이던 허삼수와 합본 수사2국장 우경윤에게 실행할 것을 지시했다.
대법원은 당시 허삼수와 우경윤 등이 12월 12일 오후 6시 50분경에 무장한 33헌병대를 윤군참모총장 주변 공관에 배치하고 7시 10분경에 공관으로 들어가서 육군대장 정승화를 총으로 위협해 끌고나와 7시 30분에 국군 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연행한 점은 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려던 반란수괴 전두환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당시 정승화가 체포수사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며, 이는 전두환이 동조세력 규합을 더욱 확산하고 반대세력을 약화 동요시키기 위한 위법한 체포행위로 결론내렸다.
이 과정에서 반란폭동 행위가 매우 심각하였다. 육군참모총장 체포를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제33헌병대가 공관의 경비를 맡고 있던 해병대 병력에게 포위당하자 장세동은 제33경비단장 김진영에게 소속 반란군 중대 병력을 인솔해 총장공관으로 출동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일부 군 인사들이 이를 진압할 태세를 갖추자, 장세동은 제30경비단 소속 전차에 포탄을 장전하며 대항체제를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후 반란군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는 과정에서는 김오랑 소령(특전사령관 비서실장)과 정선엽 병장이 총상으로 사망하기까지 하였다.
즉 전두환은 당시 하나회 성원들을 규합한데서 나아가 군 지휘권 강탈을 위해 황영시, 노태우, 백운택, 박희도, 장기오,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장세동, 김진영 등과 철저히 모의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정승화 참모총장을 연행하기 위한 세부계획서를 작성하였으며 전두환은 이를 확정해 12.12 쿠데타 전모를 주도하였다.
이상 전두환의 혐의를 살핀데 따르면 “반란수괴”의 규정에는 주변 측근들의 철저한 모의, 쿠데타 실행의 세부계획서, 33헌병대라는 실제 무장력과 중대병력 규모의 반란군 지휘통제, 전차의 포탄장전 등 실제 폭동행위, 허삼수, 우경윤이라는 구체적 특정인물, 그리고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연행이라는 구체적 반란지시사항, 군 지휘권 장악이라는 구체적 반란의 목적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 새누리당의 정신적 뿌리가 되는 반란수괴 전두환은 이상의 범죄행위를 모두 치밀히 준비해 1996년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기에 이른 것이다.
내란수괴 전두환
전두환에게 “반란수괴” 뿐 아니라 “내란수괴” 혐의도 적용된 배경에는 1980년 5월 17일의 비상계엄령 확대가 있었다. 대법원은 이를 국민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위협적인 요소로 말미암아 그 선포행위도 협박행위이며 그 유지행위도 범죄실행행위인 협박행위로 판단되므로 비상계엄의 선포유지 기간 동안 모두가 내란죄로 판단하였다.
5.17 계엄 당시 계엄포고령 문안 뿐 아니라 포고문, 담화문 등 일체도 이희성 계엄사령관 명의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합동수사본부에서 문안을 작성하여 계엄사에 보냈다고 하였다. 나아가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이희성을 압박해 광주항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윤흥정 사령관을 소준열로 교체토록 해 실제 내란행위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지만 유일하게 광주의 전남대학교 앞에서는 이튿날인 5월 18일, 비상계엄령을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계엄군은 이를 흉폭하게 탄압하였으며 분노한 광주시민을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이후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대검에 찔려 살해당한 학생, 시민들의 시신이 발견되는 등 계엄군의 살인적인 진압으로 광주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결국 5월 21일, 계엄군은 집회 중인 광주시민을 향해 발포해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살상하였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 시 외곽으로 나가 자체적으로 무장을 하였다. 당황한 계엄군은 광주시내에서 후퇴한 후 광주를 철통같이 봉쇄하였으며 5월 27일, 전남도청을 공격해 남아있던 끝까지 저항하던 시민군을 사살하였다.
이 대목에 대해 대법원은 내란수괴 전두환이 정도영을 국방부 회의에 참석하게 하여 자위권을 발동케 하였으므로 내란목적의 살인을 실행하였다고 판단했다.
내란음모 세력은 군부독재자들
한국현대사를 살펴보면 내란음모세력들은 모두 군부독재자들이었다.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가능했던 것도 1961년 5.16 쿠데타라는 헌정유린, 내란음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죽자 이제는 전두환 신군부가 나서서 12.12쿠데타로 대한민국의 헌정을 다시 유린하였으며 끝내 수많은 광주시민들을 살상하면서 청와대 권좌에 오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지금 국가정보원과 새누리당은 금품에 매수된 프락치의 녹취물 하나로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를 저질렀다며 탄압의 으름장을 놓았으며 민주당과 야합해 이석기 의원을 구속시키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반란수괴 전두환의 사건에서 알 수 있듯 내란죄에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내란을 목적으로 한 회의와 분공,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로 나라를 뒤짚어 엎는 내란폭동행위가 있어야 한다.
지금껏 대한민국의 반란수괴는 국가정보원과 새누리당이 신주단지처럼 받들어모시는 박정희와 전두환이었다. 반란수괴들을 신봉하는 정치모리배들이 저지르는 파쇼의 칼춤은 오로지 국민의 촛불로 단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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