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꿈은 사라졌는가”
1915년 레닌은 “유럽합중국에 대하여”라는 글을 썼다. 결론은 제국주의국가들끼리 지분을 평화롭게 분할하는 합중국은 불가능하니 헛소리 집어 치우라는 것이다. 굳이 흘러간 옛 얘기를 꺼낸 것은 당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도 혹할 만큼 ‘유럽합중국’ 또는 유럽공동체는 유럽의 ‘오래 된 미래’였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92년 마스트리트 조약을 맺고 99년 유로를 창설하면서 이 오랜 꿈은 실현되는 듯 했다. “유럽의 꿈”은 사라졌는가?”
지난 세 번의 연재로 현재 유럽 위기의 원인은 명확히 드러났다. 유럽의 문제는 내부 문제이다. 통화는 통합됐으나 재정은 통합되지 않았고 경쟁력이 약한 남부유럽의 곤경에 대해 독일 등 북유럽은 보조금을 주려 하지 않는다. 부르마교수(바드대)가 한탄한대로 “유럽 시민”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재정적자가 아니라 “민주주의 적자”(democracy deficiency)가 문제라는 것이다. 독일은 90년 동서독 통일 후 10년간 막대한 돈을 투입한 경험을 재현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남유럽 국가들의 방탕을 비난함으로써 공동체의 의무를 외면하고 있다.
12월 9일의 유럽 정상회의는 엉뚱하게도 재정긴축을 강화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오루크교수(옥스퍼드대)의 말대로 필요한 것은 “재정동맹”(fiscal union)인데 독일은 “재정안정동맹(fiscal stability union)”을 요구했고 이 회의는 기사회생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정상회의(summit to the death)”로 끝났다. 이제 재정적자는 “투자적자”(investment deficiency, 스펜스)로 이어진다. 케인즈의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이 팸플릿에서 케인즈는 제1차 대전 이후 독일에게 가혹한 배상금을 물리도록 한 베르사이유 협약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한마디로 영국과 프랑스는 총수요를 외면한 인기영합적 결정을 내렸고 결국 자기 발등을 찍으리란 것이었다. 이제 그 주역만 독일로 바뀌었다.
유로가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유로존이 축소되면 강한 나라들의 “수퍼유로” 가치는 치솟을 것이고 북유럽 흑자의 대부분을 감당했던 “최종소비자” 남유럽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남유럽 국가들은 이제 유로로 표시된 채무를, 형편없이 평가절하된 드라크마(그리스)와 리라(이탈리아)로 갚아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해야 한다. 임금과 디플레이션이라는 “내부 평가절하”도 만만치 않다. 루비니에 따르면 “앞으로 몇 년간 가격과 임금이 30% 정도 떨어져도 부채의 실질 가치는 계속 증가할 것이고 정부와 민간 채무자의 지급불능 사태가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흑자국인 북부유럽(독일, 네델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마저도 깊은 침체에 빠질 것이다.
오루크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관료의 민주주의에 대한 우위, 반 유럽 감정의 고조, 대중영합주의 정당의 득세가 나타날 것이고 폭력의 난무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음울한 예측을 한 뒤, 이런 시나리오를 피하는 데 필요한 제도 변화를 이루지 못할 거라면 빨리 죽는 게 낫다고 선언했다. 과연 유럽의 꿈은 사라진 것일까?
유럽공동체의 실패는 재정의 문제를 신자유주의적 금융(타국 은행에 의한 국채 매입)으로 해결하려 한 데 있다. 길은 아직 남아 있다. 재정통합같은 중장기 계획(헌법에 해당하는 리스본 조약을 개정해야 한다)을 실행하기 이전에 긴급조치부터 취해야 한다. 일단 유럽 중앙은행이 부실채권을 사들이고 이후에는 통화증발을 해서 유로의 가치를 떨어뜨려야 할 것이다. 동시에 재정적자를 감수하고라도 |
교육과 의료, 그리고 약한 나라의 인프라 건설에 돈을 써야 한다. 그 이후에야 유럽중앙은행의 강화나 재정통합, 그리고 구조개혁이 가능할 것이다.
또 하나 떠올릴 수 있는 정책은 케인즈의 청산동맹 구상이다. 케인즈는 브레튼우즈 회담에서 무역적자국에 돈을 빌려주는 청산기금(나중에 IMF가 되었다)을 구상하면서 흑자국도 그 규모에 따라 일종의 벌금을 물도록 하는 청산동맹을 제안했다. 유로라는 단일 통화를 사용하는 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무역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유로존 내부에서 실행할만한 제안일 것이다. 현재의 글로벌 위기를 극복하는 데 유효한 제안이라면 유로존에서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와 한국경제에 대한 함의
“동북아 대통령이 되시라”는 단 한마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 노무현 대통령은 나를 “동북아 비서관”에 임명했다. 미국과 EU, 그리고 동북아 공동체로 천하를 삼분해야 안정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내 주장은 당연히 EU를 모델로 했다. 해서 동북아 위원회는 EU형 길을 집중 검토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유럽의 경우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 공동체를 용인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미국의 주적인 중국이 동아시아 내부에 있고 더구나 세계금융위기 이후 일취월장 해서 G2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미국의 견제가 훨씬 심해질 것이다. 또한 유럽에 비해서 인종, 문화, 종교가 제각각이고 영토분쟁, 역사분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유럽의 위기는 설상가상의 문제를 던져 주고 있다. 나는 최근까지도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특히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통화통합이 먼저 이뤄질 수도 있다는 ‘망상’까지 했다. 1997년 동아시아 위기가 치앙마이 이니셔티브를 현실화했고 최근의 위기로 더욱 확대되었기 때문에 AMF(아시아 통화기금)로 발전할 전망이 훨씬 밝아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금융위기는 달러의 위상을 여지없이 흔들었고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통화체제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중 지역통화를 거쳐 새로운 기축통화로 넘어가는 아이켄그린의 경로가 가장 현실적으로 보였으니 아시아 통화(예컨대 ACU)의 창설마저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유럽의 위기를 목도하고 있는 지금,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점검해서 더 엄격한 필요조건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공동체가 원활하게 흘러가기 위해서 역내 경제 격차는 현재의 유럽 수준보다도 더 좁혀지지 않으면 안된다. 재정통합 없는 통화통합은 역내 격차를 위기로 몰고 갈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위해서 현재 4조 달러를 넘어선 동아시아의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공동관리하면서 여유자금(약 2조 달러)을 북한이나 몽골, 중국 내부 등 후진 지역에 투자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재정통합을 위해서는 역내 후진 지역에 대한 보조금이 가능할만큼 “동아시아 시민의식”이 성숙되어야 한다. 현재 곳곳에서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역사 분쟁, 영토분쟁을 고려하면 전혀 낙관적이지 않은 대목이다. 동아시아 공동의 역사기술, 청소년 문화교류부터 시작해서 동아시아 시민이라는 귀속감을 높여 나가는 프로그램이 시급하다. 환경-에너지 협력도 시급한데 현재 추진되고 있는 시베리아 가스관 사업은 훌륭한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공동의 프로젝트도 추진해야 할 것이다.
세계경제의 앞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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