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없는 낙관론자’인 내 입술도 터졌다. “시험 전날 공부하면 안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 나는 별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4일 동안 꼬박 24시간의 토론에 지쳤나 보다. 언론은 “팽팽” “치열” 등으로 묘사했다. 신념의 대결이 되어 버린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얻은 게 없다. 진행을 맡은 남경필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중립을 표방하며 교묘하게 편들 든 것을 탓하면 우리만 생떼쟁이가 될 것이다. 우리들은 국회의원에게 질문할 수 없다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규칙을 문제 삼는 것도 마뜩찮다. 우리가 확인한 것은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저 놀라운 확신,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건 시장질서와 자유무역의 부정이라고 단정하는 극도의 단순함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니 홍정욱 의원은 경제학자와 기상예보는 언제나 틀린다는 유명한 우스개를 들고 나온다. 말 그대로 ‘장두노미’(꿩은 큰 위험을 맞으면 머리를 묻는다)요, ‘타조효과’(타조도 그런단다)이다. 세계금융위기가 장기침체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반론에 묻혀 버렸다. 스티글리츠는 좌파 경제학자로 매도됐고(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UN 스티글리츠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승인한 200여개 국가 모두 바보가 됐다.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FTA(자유무역협정)나 WTO(세계무역기구)의 서비스와 투자 조항이 개정돼야 한다는 권위있는 주장은 그렇게 무시됐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우리 정부가 아직 한 번도 투자자국가제소를 당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북한의 핵무기는 아직 한 번도 터진 적이 없으니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논리다. 나도 내가 틀리길 바란다. 수출 침체, 부동산 버블 폭발, 또 한번의 금융위기는 우리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텐데 어찌 경제위기를 바랄 것인가? 그러나 앞날이 불확실할 때 일부러 위험을 키우면 안 된다는 것 역시 너무나 자명하다. 한미 FTA는 우리가 위기를 예방하고 또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정책공간을 제한한다. 2001년 경제위기 때의 긴급조치로 무려 47건의 투자자국가제소를 동시에 당하고 지금 줄줄이 패소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경험은 한미 FTA를 비준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 비준을 조금만 늦춰도 2009년 -7.1%의 경제성장을 겪은 멕시코의 상황을 맞지 않을 수 있다. FTA는 위기의 감염경로, 확산경로이다. 한미 FTA 안의 예외 조항이나 정부의 허가권이 파생상품의 범람과 위기의 가능성을 막을 수 있고, 건강보험은 투자자국가제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김종훈 본부장의 확신을 비웃고 말면 그만일까? 0 에 가까운 확률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그래서 더 큰 재앙을 낳는다는 ‘검은 백조’의 논리를 아무리 설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에겐 한미 FTA 비준을 1년 늦추면 “15조원의 기회비용이 발생한다”는 아무 근거 없는, 정부가 조작하고 스스로 세뇌한 통계가 있으니 말이다. 또 하나 내가 놀란 것은 김종훈 본부장의 놀라운 차별의식이다. 그는 TV로 중계되는 자리에서 아르헨티나의 위기에 대해 “인플레이션 100%를 경험한 한심한 나라와 우리를 비교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반대로 우리 국민은 특별하고, 성공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단다. 나치의 게르만 우월주의, 반유태주의와 뭐가 다르랴.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개성공단과 관련한 우리의 협상전략을 미국에 미리 알린 외교부 관리도 있으니 우리 외교관들은 나라마다 독특한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지식인으로서 내가 할 일은 다 끝난 것인가? 국회가 우리 아이들의 위험을 막아 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목을 매달리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이제 아이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 우리 스스로의 촛불이다. 우리 PD들이 24시간의 토론을 요약해서 객관적 대립의 양상만 방송해도 촛불은 다시 타오를 수 있을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점령’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위험은 닥치고 있는데 “설마 검은 백조가 나타날까”라며, 현실에서 머리를 돌리면 안 된다. (생물학에 따르면 꿩이나 타조도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이 글은 ‘PD저널’에도 실린 글입니다.
서울시 재보선 참패에도 불구하고, 서울 수도권 지역구를 가진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한미FTA를 강행하는 파행국회를 밀어부칠까요. 아니면 민심의 눈치를 보며 호흡조절에 들어갈까요?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