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책 출간을 위한 초고입니다. (사)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은 여러 혁신가들과 함께 사회 혁신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글이지만 다양한 분들의 의견을 들어 더 쓸모 있는 책을 만들고자 첫 번째 글을 공개합니다. 2019년 11월까지 청풍협동조합×새사연이 진행하는 ‘로컬 베이스캠프 강화’ 프로젝트의 성과도 반영할 생각입니다. 궁금한 점이나 아쉬운 점, 책에 담았으면 하는 현장(사례)이나 의제들을 새사연 페이스북 또는 이메일에 남겨주시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전국 228개 시군구 10곳 가운데 4곳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새로 태어나는 인구는 적고 나이 들어 사망하는 인구는 빠르게 늘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2013년 75곳에서 지난해인 2018년 89곳으로 5년 새 14곳이 늘었다. 지방 대도시로 번지려는 조짐도 보인다. 이를 막고자 정부와 여러 지자체들은 벌써 몇 년 째 청년들을 지역에 끌어들이려 애쓰고 있지만 쉽지 않다. 이유가 뭘까. 그리고 해법은 어디에 있을까.
벌써 6년째 강화를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섯 도시 청년들의 발자취를 돌아보았다. 이들이 걸어온 길에 혹시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청년들, 강화에 터를 잡다
강화도 청풍 협동조합에는 다섯 청년들이 모여 있다. 마담(유명상), 베니스(조성현), 토일(김토일), 총총(김선아) 그리고 수리(이경미). 대표인 마담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기로 하자.
이름은 유명상, 협동조합의 대표이며 마담으로 불린다. 강화에 발을 디딘 지는 6년째, 만 스물아홉 살에 처음 강화에 왔다. 마담의 삶도 여느 또래들과 다르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1999년 10월, 동네 4층짜리 상가에 불이 나는 바람에 52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가운데는 2,3층 호프집과 당구장에 있던 청소년들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다. 지역 고교들의 축제가 겹쳐 평소보다 더 많은 이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누군가 마담을 불러냈다면 그도 그곳에 있었을지 모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과 군 복무를 마치고 나니 10년이 훌쩍 흘러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동네는 달라진 게 없었다. 청소년들이 찾을 만한 문화 공간은 여전히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다른 호프집과 당구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마담은 ‘왜 이렇게들 살아야 할까’ 생각했다. 자연스레 청년의 삶과 지역이라는 화두가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 문화 기획자로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천에서도 손꼽힐 만큼 오래된 도시인 신포동ㆍ인현동에서 청년 문화의 싹을 틔워보고자 신포살롱과 청년플러스라는 두 단체를 만들었다. 청년들이 지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문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청년들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지역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지역을 이해하고 지역 안에서 작은 경험들을 쌓으면서 새로운 일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처음엔 의욕이 넘쳤다. 동네를 재미있게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도 컸다. 딱 3년만 매달리면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부딪혀본 현실은 달랐다.
“동네라는 게 내가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작은 균열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내가 바라는 걸 이루려면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도록 하는 게 정말 옳은가 하는 의문도 뒤따랐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취업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흔치 않은 경험을 쌓도록 하는 게 정말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 회의도 들었다. 그 무렵, 강화도에서 문화 기획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베니스는 서울에서 부모님과 함께 아파트단지 5일장을 돌면서 건어물을 팔았다. 그러다 독립을 하고 싶어 친구들이 몸담고 있던 ‘OO은대학’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찾아갔다. 친구들이 시장 상인들, 지역 주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돈 벌 궁리만 하고 날마다 술을 마시던 다른 친구들과는 달라 보였다. 그래서 입사했고, 첫 근무지가 강화도였다. 지자체 지원을 받아 화도 쪽에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는데 그곳에 머물며 운영을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 그렇게 베니스는 2011년 만 21살에 강화에 첫 발을 들였다.
게스트하우스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아는 사람도 없는 시골에 밤마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외롭기도 했지만 별다를 것 없이 반복되는 생활도 견디기 힘들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질 때쯤 마담을 만났다. 마담은 강화도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인 풍물시장을 되살리는 사업인 ‘강화 풍물시장 육성사업’에 문화 기획자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베니스가 운영하던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 마담은 베니스에게 이곳 풍물시장에서 같이 장사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토일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를 따라 강화도로 이사와 쭉 자랐다. 마음 맞는 가족들 여럿이 모여 강화에 함께 터를 잡고 공동체를 꾸리기로 했던 것. 토일은 그런 공동체 안에서 자랐다. 가족들은 날마다 모였다. 어른들끼리는 술잔을 기울였고 아이들은 함께 진강산에 올라 진달래를 따다 화전을 만들어 먹었다. 어른들에게 인문학도 배웠다. 토일의 기억 속에는 그 시절이 ‘따뜻한 공동체’로 남아있다. 그 좋았던 기억을 잊지 못해 중고등학교를 모두 이곳 강화에서 보냈고, 대학 때 잠깐 떠난 것을 빼면 줄곧 강화에서 살아왔다. 사는 공간이 어디든 사람 냄새 나는 공동체를 가꾸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일어와 영어를 잘 해서 휴학 중에 육성사업단의 외국인 시장투어에 통역으로 참여했는데 그때 마담을 만났다. 막연하게 강화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마담과 베니스 그리고 토일 세 사람이 뭉치게 되었다. 강화에 뿌리를 내리고 살려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는 데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마침 강화풍물시장 육성사업단에서 창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이를 받아들여 2013년 겨울 풍물시장에 첫 가게를 열게 되었다. 이름 하여 ‘청풍상회 화덕식당’.
“잘 될 것이란 기대보다는 좋은 경험이 될 거란 생각이 더 컸다. 그래서 무작정 달려들었다. 누군가 해야 한다면 우리가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마담은 그때의 마음가짐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청년들의 지역 정착을 돕는 정부와 지자체의 움직임이 없던 때라 도움을 줄 만한 곳도 딱히 없었다. 화덕피자를 팔기로 한 건 강화에 없으면서 청년들이 좋아할 만한 메뉴여서다. 피자를 구울 화덕은 창업 지원금으로 설치할 수 있었지만 피자 굽는 법을 배우는 게 문제였다. 교육비가 생각보다 비쌌던 것. 결국 가위바위보로 한 사람을 뽑기로 했고, 베니스가 뽑혔다. 2시간씩 일주일 동안 배워야 하는 과정을 전주에서 사흘 동안 먹고 자면서 속성으로 마쳤다. 그렇게 배워 온 비법을 나머지 둘에게 가르쳤고, 그때부터 셋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밀가루를 반죽해 도우를 만들고 치즈를 올려 화덕에 넣고 빼기를 날마다 수십 번. 그렇게 만들어진 피자는 이웃 상인들을 거쳐 반려견들에게 보내지기도 했다.
상인들에게 정통 이탈리아식 화덕피자는 낯설었다. 토핑이 많은 미국식 피자와 달리 모짜렐라 치즈만 담뿍 올라간 피자를 보면서 상인들은 ‘왜 이런 피자를 만드느냐’며 핀잔을 주는가 하면 ‘이걸 피자라고 갖다 주냐’, ‘이럴 거면 장사하지 말라’며 심한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래도 셋은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메뉴 개발에 나섰다. 강화 특산품인 쑥을 도우에 입히고, 속노랑고구마를 도우 위에 펴 바르고 밴댕이도 올려보았다. 순무로는 피클을 만들었다. 구박만 하던 상인들도 칼질하는 법부터 야채 다듬는 법, 고구마를 맛있게 익히는 법을 알려주고 요리 실험에 쓸 밴댕이도 조금씩 나눠주었다. 덕분에 속노랑고구마 본연의 깊은 단맛을 끌어낼 수 있었고, 비리지 않은 밴댕이 토핑을 올릴 수 있었다. 어르신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피자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시장을 찾은 손님들이 들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찾다가 만두처럼 생긴 이탈리아 음식인 칼초네(Calzone)를 메뉴에 추가하기도 했다. 눈에 띄는 곳에 쌓아놓았더니 손님들이 하나둘 사가거나 자리에 앉아 피자를 시켰다. 재료는 모두 풍물시장에서 산 신선한 것들만 쓴다. 가게를 오픈 바 형태로 만들어 반죽을 미는 것부터 화덕에 피자를 넣고 꺼내는 모든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점도 손님에겐 흥미롭다. 마르게리타 피자부터 고르곤졸라 피자까지 다양한 피자를 한 판에 9000원이라는 싼 가격에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처음 2~3년간은 계속 힘들었다. 하루 한 판도 못 판 날엔 잠도 못 잘 만큼 답답했다. 다행히 밴댕이 피자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상파와 라디오를 비롯한 온갖 매체들이 취재를 왔고, 2015년 3월엔 한 달 매출이 1000만 원에 달하기도 했다. 2017년엔 KBS1TV 「사람과 사람들」이란 5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했다.
청년들의 출발이라 해서 처음부터 화창한 봄날인 것은 아닙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늘 꽃샘추위가 있죠. 사람들은 걱정했을 지도 모릅니다. 굴러 들어온 돌들이 과연 타지의 견고한 대지 위에 뿌리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상인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가까이 아들들이 있으니까 좋죠.”
“이쁘죠. 착하니까. 착하고 열심히 살잖아요.”
– KBS1TV 「사람과 사람들」, “피자에 밴댕이까지?!…‘피자’ 청년들의 풍물시장 공략기”
위기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찾아왔다. 가게 문을 연 지 2년이 지나 재계약을 앞두고 있던 2015년 겨울, 시장상인회가 부당한 요구를 해왔던 것. 상인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지자체가 요구한 추천서를 써주지 않겠다며, 먼저 석 달간 가게 문을 닫고 상인회가 시키는 허드렛일을 하라고 했다. 청풍은 지자체와 육성사업단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누구도 해결에 나서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이들은 SNS에 호소문을 올렸고, 여론이 들끓자 그제야 지자체가 중재에 나섰다. 상인회는 한 임원의 말실수가 잘못 전해진 거라며 말을 바꿨다. 아무튼 청풍은 계속 시장에 남을 수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오랜 세월 숨죽여 지내던 상인들도 상인회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상인회장은 다음 선거에서 물러나야 했다. 지금은 베니스가 상인회 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장사가 잘 되지 않을 때도 이들은 늘 가게와 시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들이 가게를 낸 건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게를 기반으로 지역에 뿌리를 내리려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사에만 매달릴 수 없던 이유다. 그래서 함께 출근을 해도 서로 시간을 나눠 공부도 하고 새로운 사업도 기획했다. 지역과 교류하고 관계를 맺어가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상인들을 모아 동아리도 만들고 지역 축제도 기획했다. 2018년부터 여름이면 ‘강화도 문화재 야행(夜行)’ 행사를 하는데 올해는 강화초등학교에서 관현악단을 퍼레이드에 세우고 싶다며 먼저 연락을 해왔다.
“기획자로서만 지역에 접근하면 공동체와 만날 수 없다. 붕 뜨는 거다. 인천에선 주민들이 ‘너희 뭔데’ 물으면 할 말이 마땅치 않았는데, 여기서는 아무도 그런 걸 묻지 않는다. 시장에서 피자집 하는 애들이라는 걸 모두가 아니까.”
마담은 인천에서의 활동에 견줘 만남의 차원이 다르다고 말한다. 인천에선 주민과의 사이에 마치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여기선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지역 축제를 하려고 어떤 공간을 빌려달라고 하면 다들 ‘어, 그래’ 하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빌려준다. 그런 정도의 관계가 만들어진 거다.
이들은 2017년 3층짜리 빈 건물을 빌려 ‘스트롱파이어’라는 펍과 ‘아삭아삭순무민박’이란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 스트롱파이어는 ‘강화’의 한자어 음가에서 따왔다(실제로 강화는 ‘강 꽃’을 뜻한다). 시장 밖에 청년들이 편하게 드나들며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여러 곳을 둘러보다 강화읍의 끝자락에 자리한, 제법 널찍한 마당이 있는 곳을 골랐다. 개소식 날엔 시장 상인들을 초대해 포트럭파티도 열었다. 시장 상인들로 구성된 난타 동아리 ‘웃음꽃’이 큰북들을 마당에 펼쳐 놓고 청풍 청년들의 새로운 출발을 힘차게 응원했다.
청년들, 강화와 사랑에 빠지다
강화 특산물로는 소창이 있다. 전통 직물(무명천)을 가리키는 강화 말이다. 천 기저귀나 면생리대, 수건, 행주로 쓰이고 장례식 때도 많이 쓴다. 옛날에는 꽤나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중국에서 들어온 값싼 직물에 밀려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다. 아직 7곳의 공장이 남아 소창을 만들고 있다.
2018년 가을, 은퇴를 앞둔 강화 은하직물의 소창 장인 부부 이병훈, 조금례 어르신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 『무녕』(서은미)이란 사진집을 냈다. ‘무녕’은 이들 노부부가 소창을 이르는 강화도 사투리다. 작가의 인건비와 출판비 약 500만 원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았다.
강화 방직산업은 1910년대에 이르러 개량직조기를 도입해 근대적 대량생산을 시작해 조선 직조업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할 분야가 되었다. “강화 직물은 면포, 견포 등 30여 종을 생산해 외지에 수출하나니, 수도권에 판매를 비롯해 외지에서는 직접 행상을 하나니 조선 각도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 퇴색한 풍경이 여전히 찬란한 빛을 가진 이유는 소창이 매개가 되어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꿈과 삶을 지탱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은미 작가의 시선에는 지난한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가꾸어온 두 어르신에 대한 존경이 서려있다.
– 『무녕』 ‘작가노트’에서 옮김
초판 1쇄를 거의 다 팔고 이제 몇 권 안 남았다. 지역 밖으로까지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사진전까지 열어 두 노부부를 주인공으로 세운 일은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작업은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단순히 한 장인의 삶을 아카이빙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를 기반으로 꾸려졌던 한 시대의 삶을 보존하는 것”이다.
부모를 따라 소창 공장을 꾸려가는 청년도 한 명 있다. 그는 더 나은 소창을 만들려 애쓰고 있다. 지금까지 소창 공장들은 대량 생산, 대량 납품 방식으로 일했다. 그러다보니 주문을 넣은 쪽의 요구에 맞춰 낮은 가격과 고단한 노동을 숙명처럼 받아들여 왔다. 또 소창이 깨끗해 보이도록 누런빛이 도는 천연 소창에 몸에 해로운 형광 염료를 덧입혀야 했다. 청년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물길을 바꾸려 하고 있다. 부모를 설득해 몸에 해를 주지 않는 유기농 소창을 조금씩 만들어 내고 있다. 맞춤형 소량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데 그 양도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 온 지 벌써 4년째, 조금씩 입소문이 퍼져 지금은 온라인으로 들어오는 유기농 소창 주문이 전체 생산량의 절반에 이른다. 맞춤형 소량 주문이라 가격이 높다보니 같은 돈을 벌어도 일하는 시간은 훨씬 줄었다. 몸이 부서져라 늦은 밤까지 일에 매달려야 했던 부모들과 달리 지금은 저녁 7시면 일이 끝난다. 최근엔 지역 호텔에도 납품을 하게 되었다. 호텔 한 곳에서 청풍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창을 주제로 객실을 꾸며 관광 상품으로 내놓은 것. 투숙객의 반응을 살펴 방을 더 늘릴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지역만의 콘텐츠(상품과 문화)를 찾아낼 생각이다. 화문석을 소재로 두 번째 사진집도 준비하고 있다. 더불어 이렇게 발굴한 콘텐츠를 매개로 지역 밖 디자이너와 작가, 예술가들과의 협업도 이끌어낼 생각이다. ‘아란’이란 이름의 공방은 서울의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해서 강화의 자연을 담은 향초를 만들었다. 강화 낙조의 붉은 빛과 갯벌의 회색빛을 향초에 녹여냈다. 외부 네트워크를 활용한 협업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적지 않은 매출을 올렸다는 점에서도 뜻깊다. 2018년 가을까지 1,000만 원어치를 팔았다. 이들이 만든 향초는 ‘2018 관광두레 크라우드 펀딩’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아란’은 ‘아름답게 자라나다’란 뜻을 가진 우리말이다.
“아란은 우리가 같이 일하자고 하면 무조건 한다. 그런 게 좋다. 그만큼 신뢰가 쌓였다.”
풍물시장에서 청년들이 가게를 냈다는 소식이 지역 청년들에게까지 전해지면서 토일의 친구들을 비롯한 강화 청년들도 조금씩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2014년 무렵이었다.
“하나씩 상점들이 생기면서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아직 작지만 분명 변화는 만들어지고 있다.”
오랜 세월 강화 청년들이 큰 도시로만 나가려 했던 걸 떠올리면 결코 작지 않은 변화다. 강화 평균 연령은 55세로 높다. 새로운 인구가 들어오고 있다곤 하지만 퇴직한 장년ㆍ고령층이 많다. 생산인구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제는 카페, 식당, 공방 등 강화 청년들이 새롭게 연 가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2017년부터는 새롭게 자리 잡은 청년들이 서로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곳 강화에서 청년들의 공동체가 처음으로 싹을 틔운 것이다. 서점과 같은 생활 문화 공간을 중심으로 지역민과 함께 하는 문화 활동도 하나둘 선을 보이고 있다. 청풍은 청년 가게들을 돌면서 문화 공연을 하는 ‘읍내안 라이프’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루는 여기, 다음 날은 저기… 아직은 느슨하면서도 서로 큰 부담이 없을 만큼 거리를 두고 있다. 목적을 앞세우다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다.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다. 이 친구들과 여기서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섣불리 모임의 이름부터 정하거나 대표를 뽑기보다는 ‘일본 여행 같이 안 갈래’ 하는 식으로 함께 마음을 맞춰 나가고 있다.”
그 동안 일본 나오시마 섬, 미국 포틀랜드, 강원도 고성과 속초 등 주민과 정부, 기업이 함께 지속가능한 전환을 이뤄낸 도시들을 찾아 다녔다. 몇 마디 말로서가 아니라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함께 더 큰 꿈을 키워가고 있다.
“포틀랜드에서 시민과의 협업을 담당하는 공무원을 만났는데 큰 위로가 되었다. ‘너희들 힘들다는 것 다 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꿋꿋이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 좋은 결실을 맺을 거다’, 그런 말들이 힘이 됐다.”
정부나 지자체는 짧은 시간에 그럴 듯한 성과를 내는 이들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자원을 모아준다. 그러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청년들보다 오랫동안 지역에 뿌리를 내리려 묵묵히 애써온 청년들에 더 많은 관심이 모아져야 하지 않을까. 마담은 “지자체가 지역 안에서 어떻게 생태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조금 더 해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아직 준비 되지 않은 청년들에게 정부가 큰 돈을 지원하는 것이 때로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도 덧붙였다. 지역민들 눈에 지역 밖에서 하루아침에 큰 돈을 가지고 들어온 청년들이 반갑지만은 않다는 점도. 청년들이 지역에 뿌리 내리려면 돈을 마련하는 것보다 지역과 관계를 맺는 일이 먼저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돈을 받았다면 아마도 지역 공동체가 우리에게 등을 돌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 있다. 큰 돈이 들어와도 우리와 지역 공동체를 더 단단히 하는 데 쓸 수 있을 만한 준비가 됐다.”
이들이 그저 돈을 벌고자 생업에만 매달렸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여유를 누리고 있겠지만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외부 지원은 이들에게도 절실하다. 다행히 지난 6월 서울시 청년정부의 ‘청년지역교류 프로젝트 지원사업’에 뽑혔다. 그나마 숨통을 틔워줄 만한 자원이 생겼다. 이들은 이 돈으로 지역 사업과 더불어 전국 곳곳에 퍼져있는 청년들을 모아내는 일도 해보려 한다.
마담은 지자체나 지역 공동체가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고도 했다. 청년들이 지역에 정착하기만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예산이 들어가는 만큼 (지방)정부와 지방의회(국회)는 몇 명이 정착(창업)했는지 만을 따지려 드는데 그런 태도가 오히려 청년들을 주저하게 만들고 괜한 갈등을 키울 수도 있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고 같이 일을 해나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지역을 찾고 또 머무는 청년들이 자연스레 늘어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아란과 함께 향초의 포장을 디자인했던 청년들도 수리가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서울에서 일하는 디자인팀인데, 일을 제안하기 전부터 벌써 몇 번씩 강화에 놀러와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무 부담 없이 시간을 두고 강화를 알아가고, 또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지금은 다른 굿즈 디자인도 함께 하고 있다.
강화는 지리적으로는 애매한 위치다. 수도권인 인천시에 속해있다고 하지만 다른 지역처럼 개발의 혜택으로부터는 비껴 있던 게 사실이다. 이들은 이런 애매한 지리적 조건이나 위상을 활용해 ‘베이스캠프’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수도권 청년들이 더 멀리까지 나아갈 중간 기착지이자 발판이란 뜻이다.
“수도권에 살다 한 번에 저 멀리 경남이나 전남으로 가긴 어렵다. 그리 멀지 않은 이곳 강화쯤에서 먼저 살아본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더 멀리까지 가기 위한 베이스캠프인 셈이다.”
서울시 청년허브의 지원을 받아 ‘잠시섬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도시 생활에 지친 청년들을 강화로 불러 모아 잠시 쉴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였다. 20명을 모으는데 무려 500명이 지원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청년들을 쉬게 하려고 조금 무리를 해서 50명을 불러 모았다. 그때 만난 친구들 몇몇은 지금도 연락을 해온다. 첫 프로젝트를 한 뒤로는 이주민 여성들만을 불러 모은 적도 있고, 외부 지원 없이 서너 명씩 불러 잠시 섬에 머물게 하기도 했다. 대규모로 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어 쉬러온 이들에게 돈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서다. 청풍이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꼭 콘텐츠를 발굴한다는 생각보다는 무언가를 오래도록 같이 할 사람들, 그러니까 파트너를 찾는 거다.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같은 경험을 하면서 진득하게 생각을 나누고, 무엇이든 함께 이루려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강화 안에만 머물면 똑같은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걸 안다. 또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엔 꾸준함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돈벌이를 앞세워 서두르지 않는다. 이들에겐 관계 맺기가 더 중요하다.
“콘텐츠 발굴이 중심이 되면 욕심을 부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이 사람하고 같이 하면 이걸로 돈을 얼마 벌 수 있겠다’가 아니라 ‘이 사람하고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이어갈까’를 먼저 떠올리려고 한다.”
지금껏 꾸준히 쌓아온 관계들이 조금 더디더라도 언젠가 빛을 발할 것이라 이들은 믿고 있다. 지역에 스며드는 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스스로 외부자의 옷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한 결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가령, 외부 기획자로서 처음 풍물시장에 축제를 준비하러 왔을 때도 상인들에게 싹싹하게 인사 잘 하고 밥도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 다가갔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그땐 겉으로만 가까워졌을 뿐 마음의 거리는 조금도 줄이지 못했다. 상인들이 마음을 열고 강화 사람으로 받아 준 건 화덕식당을 열고나서도 2년쯤 지나서였다. 상인들로부터 ‘니들 3년은 지나 봐야 진짜 장사하는 거다’란 말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상인들은 삶으로 알고 있었던 거다. 진짜 섞이려면 나부터 마음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또 외부 기획자의 눈으로는 결코 읽어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관계가 쌓여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관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기획이 있다. 『무녕』이나 향초도 외부 기획자의 눈으로는 결코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청년들, 강화에 희망을 품다
총총(김선아)은 2017년 11월에 이곳에 짐을 풀었다. 도시 생활에 지쳐 있었고 한 번쯤은 지역에서 살아보고 싶단 마음도 있었다. 지금이 2019년 7월이니 1년하고도 8개월째다. 그 동안은 줄곧 숙소에서 또 다른 여성 동료인 수리(이경미)와 같이 지내다 얼마 전 혼자 살 집을 구했다. 2년간 살기로 계약했다. 처음에 2년만 머물다 다시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니 5개월을 앞두고 스스로 계약을 연장한 셈이다. 그렇다고 아직 확신이 선 건 아니다. 경제적 불안이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조금 더 있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집을 구하긴 했는데, 아직도 이게 맞나 하는 고민이 있다.”
총총은 지금껏 살면서 처음으로 ‘동네 사람들’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서울 방배동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25년을 살면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어머니가 동네에서 장사를 해서 어느 정도 관계망이 있었음에도 ‘내가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는 것. 그런데 이곳에서는 겨우 1년 반 만에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한다. 장사도 하고 가끔 프리마켓도 열다보니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길을 가다가도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게 되는 주민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에게 기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2018년에 강화 청년들 십여 명을 만나 『천 개의 문화 오아시스 – 강화 사람책 라디오』라는 인터뷰집을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고 나니까 이사를 가는 일이 그냥 집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아예 생활과 환경을 모조리 바꾸는 어마무시한 일이 돼버렸다. 그래서 쉽게 옮길 수가 없다.”
서울에서 강화로 올 때 홀가분한 마음으로 훌훌 털어냈던 것에 견주면 큰 차이다. 그는 “다시 서울로 가긴 어려울 것 같다”고도 말했다.
“내 고향은 폐항 /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영화 『변산』에 나오는 ‘폐항’이란 시다. 수리를 보면 이 시가 떠오른다. 강화에서 나고 자란 많은 이들에게 강화는 지루하고 별다른 희망도 없는, 그런 고향이다. 수리도 그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도시로 떠났던 수리는 ‘잠시섬 프로젝트’로 강화로 돌아왔다. 도시 청년들을 강화로 불러 들여 잠시 쉴 수 있도록 기획한 사업에 강화 토박이가 슬쩍 묻어 들어온 건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던 마음을 청풍이 돌려세운 셈이다.
“어른들도 도시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돌아오는 이들을 반기지 않는다. 서울에서 직장을 얻고 살기를 더 바란다. 그러다보니 나도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몸에 배었던 모양이다.”
마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남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하지만 수리는 청풍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또래들이 모일만한 마땅한 공간조차 없던 곳에 마음 편하게 들러 어울릴 수 있는 공간(펍)이 생긴 것이다. 수리는 스트롱파이어에서 파티나 영화제가 열릴 때마다 참여했고 그렇게 조금씩 인연이 쌓였다. 강화에 일터를 마련하고 여럿이 함께 어울려 즐겁게 지내는 또래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수리의 마음속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규정된 틀 안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다 대학에서 큰 자유를 맞닥뜨리고 보니 오히려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졌다. 자유롭게 인생을 설계해보라고 하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여겼던 선생님이라는 꿈을 의심하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정말 스스로가 바란 꿈인지, 그저 부모님이 심어준 욕망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수리는 밀려드는 우울함과 불안함을 떨쳐내고자 홀로서기를 해보기로 했다. 먼저 경제적 홀로서기부터.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찾다 우연히 을지로를 무대로 활동하던 예술가 집단을 만났다. 지역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는 연구자들이자 공간을 새롭게 살리는 예술가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전시회를 기획하고 축제를 만들면서 수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그리고 계속 같은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청풍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총총이 청풍에 짐을 푼 지 두 달이 막 지난 때였다.
“새로운 경험에 흠뻑 빠져서 오게 된 건데 벌써 5년째 생업으로 일을 해오던 멤버들과는 마음가짐에 차이가 있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윤식당」이나 「효리네 민박」같은 TV 프로그램을 떠올리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합류했던 건데 큰 착각이었다.”
기대했던 것만큼 신나고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하진 않았다.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들로 지칠 때도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와 펍을 꾸려 가려면 별 수 없이 날마다 청소에 빨래를 해야 하고 음식 장만에 설거지도 거를 수 없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수리는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고단할 수밖에. 그런 기분을 눌러가며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힘들었다.
수리의 하루는 어떨까. 아침 10시에 1층 펍으로 출근해 곧바로 점심 장사를 준비한다. 장사를 마치면 3시쯤 2~3층 게스트하우스에 올라가 투숙객 맞을 준비를 한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걷고 침구류를 정돈하는 일 등이다. 4시부터는 다시 저녁 장사를 준비하기 시작해 대략 자정까지 손님을 맞는다. 길어지면 자정을 넘길 때도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달마나 발행하는 잡지 제작을 혼자 도맡기도 했다. 기획과 디자인, 기사 작성과 편집 그리고 인쇄에 더해 그렇게 만든 잡지를 자전거로 배포하는 일까지. 풍물시장 화덕식당 일손이 딸리면 그것도 모른 체 할 수 없고, 가끔 축제를 비롯한 행사들이 잡히면 이 모든 일들을 해내는 틈틈이 행사도 함께 준비해야 한다. 수리만 그런 게 아니다. 모두들 그 만큼씩의 일을 해내고 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가 가진 마음의 온도 차도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여기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수리는 “이제는 좀 멀리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고충이 없는 건 아니’라는 말도 빼먹진 않는다.
수리는 손님으로 찾던 때와 달리 지금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친구들이 놀러 와도. 다음 날 출근해야 하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버티는 건 “조금씩 좋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일을 만들어 하는 게 어려운데 여기선 모두가 알아서 일도 찾아서 하고 결과도 만들어내야 한다. 지금껏 해보지 못했던 그런 경험이 좋다. 잘 못할까봐 겁이 나서 지레 포기하곤 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청년들, 강화에서 새로운 꿈을 꾸다
이들은 청풍 협동조합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힘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엄마 인큐베이팅.
청풍은 스스로를 풍물시장의 자식들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른바 ‘엄마 인큐베이팅’을 받았다는 것. 이들은 시장 상인들이 (아빠)엄마처럼 살뜰하게 챙겨준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믿는다. 하루에 한 판도 못 팔 만큼 어렵던 시절 상인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삼시세끼 밥을 다 챙겨줬다. 여기저기서 서로 밥을 차려주는 바람에 하루에 다섯 끼를 먹은 적도 있다. 2년간의 육성사업단 지원이 끝나도 ‘여기선 굶어 죽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
둘째는 같이 살아가려 들인 시간과 노력.
청년들이라고 협력에 익숙한 건 아니다. 마담, 베니스, 토일 셋도 처음엔 같은 곳에서 함께 먹고 자고 일하는 데 서툴렀다. 작은 일로 부딪힌 적도 많았다. 지금까지 제법 긴 시간 동안 협동조합이라는 틀을 깨지 않고 이어온 건 그만큼 함께 애써온 시간이 길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걸 이야기했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힘들거나 서로에게 아쉬운 건 없었는지… 그리고 회의 방식도 점점 발전시켜 나갔다.”
총총과 수리가 협동조합에 합류하던 2년 전 겨울 무렵엔 새 식구를 맞을 거창한 의식을 치렀다. 먼저 셋이서, 나중엔 다섯이서 여러 번의 워크숍을 가졌다. 소통 전문가를 불러 서로 터놓고 속내를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고 생각을 더 잘 전하는 연습도 해보았다. 일하는 방식을 비롯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총총이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함께 일본 나오시마 섬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무언가를 같이 해보는 기회를 가져보자며 마담이 제안했다.
청풍 협동조합의 다섯 청년은 요즘도 금요일 회의 때마다 티격태격한다.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 때문인데, 이들에겐 그러한 부딪힘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처음엔 속내를 드러내지 못해 힘들어 하던 수리도 지금은 거침이 없다. 그러더니 올해 3월, ‘여기 좀 더 있어야겠다’며 2년 짜리 집 계약을 하고 왔다. 총총도 변했다. 예전엔 누군가와 일하다가 뭔가 안 맞으면 ‘이거 끝나고 다시 보지 말아야지’ 마음먹고, 그래도 안 되면 ‘회사 그만 둬야지’ 생각했는데, 지금은 조금 시간을 두고 맞춰가려 애쓴다. 모두가 그렇게 여럿이 같이 일하는 법을 조금씩 익혀가고 있다.
셋째, 세대 간 교류.
강화에 오기 전 마담의 세상엔 늘 청년이 한 가운데에 있었다. 어른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다. 정말로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청년들에게 해줘야 할 일들에 등을 돌리고 선 현실이 답답하고 싫었다. 그래서 어른들의 말 한 마디에 목소리부터 높이기도 했다. 풍물시장에서 ‘엄마 인큐베이팅’을 받으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더는 세상의 중심에만 서려하지 않고, 어른들의 말도 허투루 듣지 않는다. 시장 상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배운 게 많다.
“여기 상인들은 서로 죽일 듯이 싸우고 나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어울린다.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같이 살려면 그래야 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나이와 살아온 세월을 뛰어넘어 공감대가 만들어지자 생각의 크기도 부쩍 커졌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영역들이 머릿속에서 겹쳐지기 시작했다. 낡고 허름한 소창 공장과 주름진 두 노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오래도록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사진집 『무녕』은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우리끼리만 일하면 상상력이 뻗어나가지 못한다. 예측 가능한 수준에 머문다. 세대를 뛰어넘는 교감엔 생각지도 못한 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청년들만 변한 게 아니다. 상인들도 달라졌다. 가게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축제를 준비할 때는 상인들이 ‘어디 장사꾼이 함부로 가게 문을 닫느냐’면서 혼을 냈다. 장사가 전부였던 그들에겐 장사를 가볍게 여기는 철딱서니 없는 놈들로 보였던 것. 그런데 얼마 전 ‘강화도 문화재 야행(夜行)’ 행사 때는 같이 가자고 하니 상인들도 일찍 문을 닫아걸고 따라나섰다. 장사를 접고서라도 할 만한 일이 있다는 걸 받아들인 거다. 당신의 자녀들을 가게로 불러내 장사를 가르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게 된 것도 달라진 풍경이다. ‘대학까지 나온 애들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며 안타깝게 바라보던 시각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이다. 자신이 평생 해온 일을 더는 부끄러워하지만은 않는단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청풍 청년들에게도 시장 형님ㆍ누님들이 생겼다. 난타 동아리는 벌써 5년째 이어지며 축제 때마다 제일 앞에서 흥을 돋운다. 타투이스트를 부르면 나이 지긋한 여성 상인들도 문신을 해보겠다며 나선다. 지난 몇 년 사이 청년들도 어른들도 서로에게 한 발짝씩 다가섰다.
강화에는 산마을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가 있다. 2019년 3월 첫 졸업생들이 나왔는데, 이들 가운데 네 명이 대학에 가는 대신 청풍처럼 지역에서 살아보겠다며 강화에 남겠고 했다. 이들의 부모들은 토일의 부모와 함께 십 수 년 전 강화에 정착했다. 당신의 자녀들이 다만 몇 명이라도 강화에 남아 어렵게 일군 공동체를 이어가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청풍의 생각은 다르다. 창업을 뒷받침할 마땅한 기반이나 안전망, 이끌어줄 선배도 없는 상황에서 마치 섬처럼 고립될까 걱정이다. 청풍도 아직 이들에게 길을 열어줄 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해 졸업을 앞두고 이들이 청풍을 찾아와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청풍의 다섯 청년은 하나같이 남지 말라고 했다.
“아직은 시장이 작고, 자원도 부족하다. 정말 남는다고 하면 우리가 이것저것 연결해주려고 애는 쓰겠지만,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일 거다.”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오길 바랐지만 결국 네 명 모두 강화에 남았다. 인천시가 만든 ‘청춘마을’에서 빵 굽는 법을 배웠지만 아직 창업은 하지 못한 채로 카페나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티고 있다.
“어른들은 빵집 한 번 차려보라는 말만 하고, 막상 애들은 아르바이트로 버티고 있고… 우리라고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속만 상한다.”
조금 더 힘을 키워 어렵게 나선 후배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지만 맘처럼 쉽지 않다. 정부의 여러 창업 지원 정책도 이들이 보기엔 답이 되지 못한다.
“정부 창업 자금은 보기에 멋진 낚싯대 하나 잠깐 빌려주면서 물고기도 없는 작은 우물에서 물고기를 낚아 먹고 살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좋은 낚싯대만으로 물고기를 낚을 순 없다.”
낚싯대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썼는지도 다 보고해야 하고 그나마도 1~2년 뒤엔 돌려줘야 한다. 그러면서 몇 마리 잡았는지만 물어볼 뿐이다. 지난 몇 년간 많은 지원 정책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지역에서 생태계를 만들 수 있는 ‘긴 호흡의 정책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스트롱파이어와 아삭아삭순무민박이 들어선 3층짜리 건물은 10년이나 비어있던 건물이라 손 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리모델링 비용을 아끼느라 조합원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여야 했다.
“돌아보면 마이너스에서 시작해서 이제 겨우 영(0)으로 맞춘 상태다. 장사에만 매달리면 조금 더 여유가 있을 텐데 다른 일들을 계속 하려니 돈이 모자라다.”
아무리 힘들어도 지원 사업을 고를 땐 신중하다. 손에 쥐게 될 돈보다는 공동체에 끼칠 영향을 먼저 생각한다. 자칫 어렵게 맺은 관계가 무너질 수 있어서다. 그래서 외부 지원에 손을 내밀 때도 이곳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먼저 따진다.
청풍은 강화에 자리를 잡은 지 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앞으로 10년을 내다볼 수 있을 작은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왔다면, 이젠 이 동네에서 이 사람들이랑 오래도록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마담, 베니스, 토일은 이십 대에 만나 모두 서른을 넘겼다. 총총과 수리도 올해로 서른이다. 그 사이 둘은 결혼을 했고 아마 곧 아이가 태어날지 모른다. 토일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이제 아이들이 커갈 수 있는 삶과 일의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청년에서 주민으로’ 넘어가야 하는 때다.
청풍은 최근 ‘생업강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생업을 강화하자는 뜻도 있지만, 강화에서 생업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담겼다. 이들이 생각하는 생업은 각자의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총총이네 카페’에서 만나자거나, ‘토일이네 펍’에서 만나자는 말이 자연스레 나오는 그런 풍경이다.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불리면서 지역 안에서 함께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새로운 활력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그런 마을에서 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싶다.”(토일)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름 주체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그냥 다 시키는 일만 했던 거다. 앞으로 10년쯤 지나면 정말 ‘내 것들’이 많이 생기지 않을까.”(총총)
이들의 강화살이가 앞으로도 이어지려면 무엇보다 지역 안에서 공감대를 넓혀가야 한다. 또 바깥의 자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성과 포용성도 필요하다.
“몇 년 뒤엔 이곳에서 돈도 조금 더 벌면서 조금 더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그러려면 정말 뭘 하고 싶은지를 정해야 할 때다. 일할 기회가 생기면 뭐든 하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안정적으로 일들을 만들어가고 싶고 그렇게 하고 있다. 전에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퇴근하고 서울로 놀러가고 싶단 생각도 많았는데, 지금은 여기서 뭔가 더 만들어가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 그게 더 좋다. 또 힘들 때 ‘나 오늘 힘들었어’ 말하고 기댈 수 있는 동료가 있는 것도 너무 좋다. 하지만 5년 뒤에도 정말 여기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도 한구석에 있다.”(토일)
“어딘가에 소속돼 있으면서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삶이 나한테 어울린다고 여겼다. 그게 행복한 삶이라고. 강화에 오고 나서는 내 인생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란 걸 깨달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새로운 사람 만나고 새로운 일을 겪으면서 몰입하고 싶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이곳에서 너무 멋있단 생각을 하게 해준 사람들이 있다. 소창 공장 젊은 사장님, 화문석 청년… 인생을 걸고 몰입하는 모습에서 대단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힘들어 보이는 일인데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당당하게 자기 일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나도 그런 일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총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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