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청와대에 근무했던 단 한 사람의 비행(?)으로 특정 세대가 다시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1990년대 이들은 386세대로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 30대로서 1980년대 대학을 다닌 1960년대 생이라는 의미였다. 이후 나이를 먹으면서 486세대, 586세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통칭 86세대로 부르기도 한다.
86세대의 과거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입만 열었다 하면 왕년에 한 가닥 했음을 내비치는 게 이들 세대의 공통점이다. 실제로 이들은 식민지를 경험했던 나라로서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공시킨 주역이다. 가히 단군 이래 가장 성공한 세대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
산업화 성적을 보자. 한국은 1960년대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해 있었다. 그러던 한국이 인구 5천만 이상의 나라로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는 세계 7번째 30-50클럽 나라가 되었다. 중계 무역으로 성공한 네덜란드를 빼면 수출 규모가 세계 5위 수준이다. 근대 이후 세계사를 주름답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모두를 재친 것이다. 국토 크기가 스페인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은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일구어낸 성과이다. 정말 대단하지 않는가!
민주화는 또한 어떠한가? 과거 한국은 분단 체제를 배경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한 병영 통제 체제가 구축된 나라였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저항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던 나라에서 민주화대장정이 일어났고 마침내 위대한 승리를 일구어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부터 출발해 1987년 6월민주항쟁을 넘어선 민주화대장정은 세상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대한 드라마였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혼미 속에 빠져들 때 촛불시민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1990년대 접어들이 86세대는 본격적인 사회 진출을 시도했다. 당시 이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건 이른바 ‘고지론’이었다. 고지는 기존 질서의 상층부였다. 자신의 능력에 상층부가 제공하는 권력과 돈을 결합시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 고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기존 문법만 따라하며 체제 속으로 동화되어 갔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기득권의 포로로 전락했다.
최근 장관 후보들이 줄줄이 난타 당하자 여당 관계자들이 청와대 검증 시스템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에 대한 조국 민정 수석의 답변은 간명했다. “사람이 없다!” 후보 의뢰를 하면 대부분 손 사레를 치며 사절한다는 것이다. 어느 여당 국회의원이 장관 후보 지명을 수락하고 청문회에 나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처지라고 실토할 정도이다. 모 국회의원이 86세대에게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는 일반적 현상이라고 이야기했다가 구설수에 올랐지만 진실을 드러낸 발언이었다.
한 때 86세대는 저항하는 진취적 세대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86세대는 세태에 찌든 기득권 세력의 상징이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 모습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여기에 암울한 미래가 덧씌워지고 있다.
86세대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넉넉한 세대로 통했지만 50대에 접어든 그들의 처지는 빡빡하기 그지없다. 위로는 부모를 공양하면서 아래로는 자녀를 부양해야 한다. 자신의 노후를 걱정할 여유가 없다. 부고장과 청첩장이 덩달아 날아오는 상황에서 경조사비 부담이 무서워 단톡방을 도망치듯이 빠져나가기도 한다.
어쩌면 86세대는 역사상 자신보다 못한 환경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최초의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럴까? 2030세대는 86세대의 업적을 존중하지 않는다. 2015년 카이스트, 2016년 <경향신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세대의 절반 정도가 바람직한 미래로 ‘붕괴 후 새로운 시작’을 꼽았다. 2030세대 입에서는 대한민국은 이미 망했거나 망해가는 나라라는 푸념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역사적 성공의 절반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에서 비롯되었고, 실패의 반은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86세대가 곱씹어야 할 구절이 아닐까?
(이글은 <내일신문>에 함께 게재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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