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직감하고 있다시피 지금 우리는 대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한반도 지형이 혁명적으로 재편될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기업 중심의 국민경제가 수명을 다하면서 혁신적 전환이 불가피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환이 패착 없이 이루지려면 30여 년간 진보적 흐름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절감했다시피 진보와 보수를 오가는 널뛰기를 반복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수 있다. 과연 문재인 정부가 당면한 난관을 극복하면서 ‘진보 시대 30년’을 열 수 있는 비책은 무엇일까? 자유롭게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한국경제 호 열차, 기관차를 통째로 갈아야 하는 상황
요란스런 경고음과 함께 빨간 불이 연신 번쩍거리고 있다. 고용 쇼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용 상황이 외환위기 이후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자영업 상황 역시 매한가지이다. 일부 정부 관계자는 생산가능 인구 감소와 폭염에 원인을 돌리고 있다. 보수 매체는 무리한 최저임금 인상과 주52시간 추진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고 있다. 부분적으로 맞는 이야기일수 있다. 하지만 옹색하기 그지없는 진단이다. 폭염이 물러가면 상황이 개선될 수 있다는 말인가? 최저임금 인상과 주52시간 적용 속도를 늦추기만 하면 한국 경제가 소생하고 일자리가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
문제의 핵심은 성장 동력 소진이다. 말하자면 한국경제 호 열차의 기관차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대기업이 담당해 왔던 주력산업 대부분 경쟁력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다. 후발 주자로 여겼던 중국이 가격경쟁력과 기술력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조선,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철강 등 주력산업 대부분에서 한국을 추월하고 있다. 최근에는 부동의 1위였던 LCD마저 중국에 내주고 말았다. 남은 것은 반도체뿐인데 이마저 반도체 굴기를 외치는 중국의 공세로 불안하기 그지없다. 대기업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중소 협력사들도 덩달아 나자빠지고 있다. 구미, 창원, 울산 등 산업화 1세대를 이끌었던 도시들의 중소기업 가동률은 50% 아래로 떨어졌다. 국민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면서 일자리가 늘어나기를 기대하는 게 도리어 이상할 지경이다.
대기업의 기관차 역할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 때이다. 경제성장률 등에서 이명박 정부의 경제 성적표가 앞선 정부보다도 못했던 것은 그로부터 빚어진 결과였다. 이명박 정부부터 기존 대기업 중심에서 벗어나 한국 경제의 틀과 기조를 완전히 바꾸는 일대 혁신에 착수했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그러한 작업은 철저하게 외면되었다. 지금의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직무 유기 덤터기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역발상의 지혜를 발휘해야할 때이다. 전통적 처방이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은 한국 경제의 근본적 재구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고 있다. 방향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인다. 이미 세계적 추세는 ‘대기업 기반의 낙수 효과’가 아닌 ‘벤처기업 기반의 분수 효과’를 노리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기관차를 종전의 대기업에서 벤처기업으로 바꿔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 전략은 ‘진보 시대 30년’을 여는 비책
국민 경제의 기관차 교체는 연쇄적 변화와 혁신을 요구한다. KTX로 기관차를 교체했는데 무궁화호 객차를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한국 경제의 틀과 기조 모두를 바꾸는 총체적 혁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의 변화와 혁신은 결코 정부 정책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광범위한 국민의 동의와 협력을 수반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사회적 합의는 정치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는 국민을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문제 해결의 능동적 주체로 상정한다. 국민 스스로 문제의 근원을 직시하고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결심하는 과정이다. 정부 재정 정책에만 매달리는 기존 방식과 전혀 다른 접근을 요구한다. 더불어 압도적 다수 국민의 동의와 협력을 전제로 한다. 협소한 진영 논리를 완전히 뛰어넘는다.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보면 고비에 직면할 때마다 국민들이 힘을 모아 돌파해 왔다. 사회적 합의는 바로 그러한 국민의 힘을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전략이다.
꿈이 있으면 배가 고파도 참을 수 있다. 당장의 어려움을 견디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할 수 있다. 지금 절실한 것은 바로 그 꿈이며 사회적 합의는 그 꿈을 공유하는 과정이다. 작금의 한국 경제는 단기 처방으로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상황이다.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사회적 합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것이다.
사회적 합의는 반대 진영의 의제를 소화해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진보 입장에서 보수 의제를, 보수 입장에서 진보 의제를 소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다수의 동의와 협력을 이끌어냄으로써 안정적인 정국 운영이 가능해진다. 장기 집권을 바탕으로 일관된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새로운 모델 정착도 가능하다. 사회적 합의 전략이 진보시대 30년을 여는 비책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대표적 사례로서 스웨덴 사회민주당 정부와 독일 메르켈 정부를 들 수 있다.
좌파 정당인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보수 의제로 여겨졌던 성장 동력 관리를 자신의 과제로 적극 소화했다. 이를 위해 세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1938년 살트셰바덴협약을 통해 노사대타협을 성사시켰다. 파업 발생은 최소화되었고 산업평화가 정착되었다.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재편을 추진했다. 철저한 개방 경제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했다.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은 가차 없이 퇴출시켰다. 그 결과 자본주의 황금기 무렵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모델에서 최고 수준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사회민주당은 1932~1976년 동안 장장 44년에 이르는 장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우파 기독민주당 주도의 독일 메르켈 정부는 보수적 입장에서 진보적 의제를 잘 소화한 경우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메르켈 정부는 ‘사람 얼굴의 자본주의’로 사회적 합의를 성사시킨 뒤 사람의 창조적 능력을 키워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학습 강화와 노동 시간 단축, 일자리 창출을 유기적으로 연계시켰고 이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 산업4.0 정책을 통해 사람과 로봇의 협업을 고도화함으로써 4차 산업혁명의 기술 효과를 일자리의 양과 질을 함께 개선하는 방향으로 활용했다. 진보의 전유물로 여겨진 노동 의제를 융합시키는 방향에서 경영 전략을 구사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 결과 독일 경제는 유럽 최강의 경쟁력을 구사할 수 있었고, 2007년 63% 수준이었던 고용률은 7년 뒤 10% 상승할 수 있었다. 메르켈 정부는 이 같은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4차례 연임이라는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협력을 진보의 전통으로!
표현은 사회적 대타협으로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그동안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은 여기저기서 수도 없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현재 사회적 합의 기구로 노사정위원회가 있다. 문제는 노사정위원회가 은연중 대기업 프레임 위에서 작동해 왔다는데 있다.
정부 관료 상층부는 이해관계에서 대기업과 일체화되어 있다. 그들은 퇴임 후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억대 연봉을 받으며 편안한 노후를 보장받는다. 사용자 단체인 경총 또한 큰손인 대기업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 노동계의 주축인 대기업 정규직은 대기업을 환경으로 자신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데 익숙하다. 모두가 생래적으로 대기업 프레임에 결박되어 있다. 대기업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이익 추구에 집착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 합의를 주도하기 쉽지 않은 이유이다.
노사정위원회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본연의 역할을 되찾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떤 경우도 노사정위원회의 존재 이유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합의를 노사정위원회가 홀로 감당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노사정위원회의 한계를 보완할 별도의 프로그램이 요구된다.
첫째 상생 가능한 모델 도출.
사회적 합의는 이해당사자 모두의 이익이 증대될 때 성사될 수 있다. 그동안 경험해 왔던 것처럼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상대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식으로는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 쉽지 않다. 앞으로의 사회적 합의는 ‘사람 중심 경제’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요체는 좋은 일자리 창출을 위해 협력함으로써 함께 이익을 보는 것이며, 좌표는 ‘사람 중심 노동 존중’이다. 사람 중심 경제는 벤처기업과 중소기업을 중심 무대로 삼으며, 보수가 재배해 왔던 기업 경영을 진보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 제기해 왔던 다양한 형태의 ‘시장의 역습’도 극복할 수 있다.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다룰 예정이다.
둘째 일차 이해관계자들의 네트워크 형성.
사람 중심 경제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합의에 가장 깊은 이해관계를 갖는 주체들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할까? 당연히 대기업 밖에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좀 더 많은 검토와 검증을 요구하지만 그들은 벤처기업과 중소기업의 현장 경영 주체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우선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현장을 기반으로 사회적 합의 여론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협력.
문재인 정부가 사회적 합의 성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게 모든 것을 떠넘겨서도 곤란하다. ‘현재 권력’은 현재의 과제를 감당하기도 벅차다. 급변하는 정세에 부응해 외교 안보 이슈를 관리하는 것 하나만도 만만치가 않다. 현재 과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차기 주자들이 사회적 합의에 필요한 여론 조성을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한다. 바로 이 때 필요한 것이 ‘현장 밀착형 덩샤오핑 리더십’이다. 지난 회에 다소는 뜬금없이 차기 대선 주자의 브랜드 가치를 다룬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미래 권력’은 미래지향적 이슈를 다룸으로서 현재 권력을 보완해 주어야 한다. 거꾸로 현재 권력은 미래 권력의 활약을 적극 지원하고 그 성과를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협력을 시스템화하고 전통으로 만들어야 한다. 진보 시대 30년을 원활하게 이어갈 핵심 장치가 될 수 있다.
적폐 청산, 한반도 평화 정착, 미래 권력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합의 도출 (최소한 그 교두보 역할만 하더라도) 등 세 가지 과제를 무난히 소화해낸다면 문재인 정부는 능히 성공한 정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현재의 위기가 반전의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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