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탈북고아 송환이 여론의 집중을 받았다. 수전 솔티 북한자유연합 대표는 이들 탈북 청소년들을 두고 “라오스 정부는 북한에 돌려보내면 적어도 사형당하거나 고문당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보낸 것이다.”라며 라오스 송환 문제를 대대적인 북한인권문제로 제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특히 수전 솔티는 지난 5월 3일, 경찰이 주민안전을 고려, 임진각에서 예정된 탈북단체들의 대북전단살포를 원천봉쇄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진행하자’고 주장해 경찰측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미국이 자기나라의 인권문제 보다 중국의 인권문제, 이슬람의 인권문제, 북한의 인권문제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미국은 인권을 정치공세의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인권은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누리는 권리이지만, 미국에게 인권은 정치적 갈등을 빚는 국가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미국식 체제를 주입하는 방편으로 활용해왔을 뿐이다.
1. 소련에 대한 인권공세
미국은 1970-80년대 냉전시기에는 소련에 대한 인권공세에 집중하였다. 이 시절에도 중국, 북한, 쿠바를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 아프간, 이라크, 시리아 등 중동국가들이 엄연히 존재했지만, 미국은 소련의 인권문제 제기에 집중하였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소련의 시베리아 수용소이다. 1977년 3월 8일, 경향신문은 미국이 유엔 인권위원회의에서 소련에 대한 인권공세의 일환으로 소련에 체포된 반체제인권운동가들의 신변에 관한 정보의 제공을 요청하는 전문을 소련정부에 보내려 했다고 보도하였다. 소련측 유엔대표 발레리 조린은 미국의 인권개입은 명백한 내정간섭이며 냉전을 재발하려는 시도라며 강경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유엔 내에서 소련 뿐만 아니라 제3세계 국가들까지도 소련의 주장에 동조하자 미국은 대소인권공세를 일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집권한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쵸프는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을 전면화하며 소련사회에 자본주의화를 상당부분 목적의식적으로 용인하였다. 소련은 고르바쵸브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인권공세를 비롯한 내정간섭에도 이렇다할 반발을 못한 채 물먹은 담벼락처럼 무너지기 시작히였다.
1988년 6월 2일, 한겨레신문은 모스크바 미-소 정상회담을 앞두고 두 나라 지도자들이 인권문제를 놓고 날카로운 설전을 벌였다고 보도하였다. 기사는 인권문제는 미-소 정상회담마다 거론되는 단골메뉴라며 서방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항상 미국은 소련의 인권침해를 추궁하는 “검사”의 입장이고, 소련은 피고석에 서게 된다고 하였다.
미국이 이처럼 소련의 인권문제에 집중한 것은 당시 미국이 소련과 냉전 중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있어 인권문제 제기는 총력전의 일환에서 진행하는 심리전과 여론전의 틀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미국은 소련의 인권문제를 제기함에 있어서 반체제인사 문제, 유태인 이주허용 문제, 종교의 자유 등을 집중적으로 지적해왔다고 한다. 1980년대에 미국은 소련 반체제 인사로 “세르게이 그리고리안츠”를 내세워 반년 남짓 그를 이른바 “영웅”으로 집중조명하였다. 이 자는 <글라스노스트(개방>이란 잡지에 소련내 반체제 인사들의 활약상을 서방에 전달해 온 일을 하였다. 미국은 “세르게이”의 이같은 행동을 민주화의 시금석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1988년 3월, 미국 <네이션>지는 세르게이의 <글라스노스트>가 뉴욕에 있는 소련이민지구인 민주센터를 통해 미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아왔다고 폭로하였다. 미국의 소련인권문제 제기가 소련붕괴의 정치적 목적을 가진 대단히 불순한 의도였다고 분석할 수 있다.
2. 중국에 대한 인권공세
1989년 소련이 붕괴하자 미국의 인권공세는 그 다음 목표인 중국으로 넘어갔다. 무엇보다 1989년,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발발하자, 미국은 이를 십분활용하며 중국의 인권문제를 제기하였다.
천안문 사태란, 1989년 4월 15일, 중국 총서기 후오야방이 사망하자 베이징의 학생들과 인텔리들을 중심으로 개혁개방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가 중국정부의 여러 중재를 거부한 끝에 군대까지 출동하게 된 중국의 정치사태를 말한다. 베이징의 학생과 인텔리들은 중국 지도부에 중국도 소련의 고르바쵸프처럼 개혁개방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단식과 집회가 1달간 이어지자 중국지도부는 5월 16일에는 고르바쵸프와 회동에 들어갔으며 5월 20일에는 자오쯔양과 원자바오 등 중국 핵심 정치인들이 천안문 시위대를 찾아 단식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국당국의 중재노력이 결국 불발되자 당국은 계엄령을 선포, 군대로 진압하였다.
국제 엠네스티는 천안문 사태 당시, 약 1000여명의 중국인들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뉴욕타임즈의 니콜라스 D.크리스토프에 의하면 400 ~ 800명이 사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중국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사망자는 군인을 포함해서 241명이었다.
미국은 중국의 천안문 사태 진압이, 국민들을 향해 총을 겨눈 인권탄압의 극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중국측은 당국이 시위군중을 향해 여러 차례 중재안을 제출하였고 고르바쵸프와 회동도 진행하며 시위군중의 정서를 헤아렸으며 공산당 지도부라 할 수 있는 자오쯔양과 원자바오가 시위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설득도 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간에는 천안문 사태 뿐만 아니라 티벳문제도 산적해 있다. 미국은 티벳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중국에 편입되어 있는 티벳자치구의 분리 독립을 추구하고 있음에 주목하며 중국당국이 티벳독립운동을 진압하는 영상을 인권유린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1999년 3월 18일, <시사저널>은 “미국-중국 인권전쟁 돌입”이라는 기사를 개제하였다. <시사저널>은 기사에서 “두 나라의 인권공방이 마치 올브라이트 장관이 중국의 인권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중국에 간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불꽃을 튀겼다”고 하였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중국 지도자들에게 정치범을 석방하고 전국인민대표회의(全人代)에서 ‘유엔 인권 규약’을 비준하라고 촉구했다. 이는 80년대, 소련의 반체제인사들의 활동을 고무하면서, 인권을 앞세워 이들을 석방하라고 소련을 압박한 것과 놀랄만큼 유사하다.
미국과 중국이 이렇듯 인권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은 1999년 2월 28일, 미국이 <98년 국가별 인권 보고서>를 발표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 보고서에서 미국은 중국의 비합리적인 구금과 재판 관행을 지적하였고 이에 중국이 강력히 반발한 것이다.
중국 외교부는 미국의 보고서가 나오자 곧바로 반박 성명을 발표했고, 곧이어 중국 신화사(新華社)는 ‘미국의 인권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신문 한 면을 꽉 채우는 빽빽한 글을 발표해 미국 인권 문제를 신랄하게 꼬집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르바오(人民日報)>는 논설에서, 미국의 도덕 우월주의에는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속 좁은 손익 계산과 세계의 지도자로 군림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클린턴 대통령의 방중 때 중국내 인권과 기본 자유를 보호·촉진시킬 것을 약속하고 지난해 10월 ‘국민 권리와 정치 권리 국제 공약’에 서명하는 등 인권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는데도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구축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지금 미국이 중국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 의도를 순수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 중국측의 생각이다.
3. 중동에 대한 인권공세
미국이 제기하는 인권문제는 2000년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하면서부터는 중동지역의 인권문제로 집중하게 된다.
미국은 먼저 아프간 전쟁의 상대세력인 탈레반의 인권문제를 제기하였다. 2001년 11월 15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텍사스 크로퍼드 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정책 등을 볼 때 탈레반은 지구상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퇴보적인집단이라고 규탄했다. 탈레반은 여성의 사회활동을 원천적으로 용납하지 않는 성차별이 가장 심각한 국가라는 것이다.
로라 부시 여사가 영부인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11월 17일 행할 단독 라디오 연설을 통해 탈레반의 인권유린을 비난했다. 폴라 도브리안스키 국무부 차관은 딕 체니 부통령의 정치보좌관인 메리 매털린과 함께 의회에서 아프간 여성의 인권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11월 19일에는 이슬람 여성지도자들과도 만났다고 한다. 빅토리아 클라크 국방부 대변인도 여성 경제인사들과 만나 아프간 여성의 인권유린상황에 대해 설명했다고 한다.
미국 부시행정부가 이처럼 일사천리로 아프간 탈레반 세력의 여성인권문제를 집중 거론한 것은 2001년 10월 7일부터 시작되었던 “아프간 전쟁”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시행정부는 탈레반과 더불어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도 인권유린정권이라며 공세를 높였다.
미국의 소리방송에 의하면 조지 부쉬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군사개입을 정당화 할 때마다 사담 후세인의 잔혹함을 거의 매번 강조하곤 했다고 한다. “만약에 우리가 행동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독재자의 대량살상 무기 계획은 오늘 날까지 계속됐을 것입니다. 이라크의 고문실은 아직까지도 공포에 질린 무고한 희생자들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수 십만 명의 남녀들이 사막의 모래속에 사라져 버린 살륙의 현장은 여전히 살인자들만에게만 알려져 있을 것입니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겐 사담 후세인 정권이 없어진 오늘의 세계가 보다 안전하고 나아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즉, 사담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인들의 인권을 너무 유린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이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미국 내 인권단체 “휴먼 라이트 워치(human rights watch)”는 부시행정부가 제기하는 사담후세인 정권의 쿠르드족 학살은 1980년대에 발발한 일이라 이미 10년이 지나버려 이번 전쟁의 명분으로 맞지 않는다고 일갈하였다. 특히 이라크의 이야드 알라위 전 수상은 현재 이라크의 고문, 인권유린 상황은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과 유사하거나 이보다 더 심각하다고 폭로하기도 하였다.
4. 미국이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배경
인권은 정치적으로 흥정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천부적 권리이다.
그러나 미국은 다른 나라의 인권문제를 정치공세의 수단, 나아가 전쟁도발의 명분으로 활용해왔다.
오히려 미국은 매년 3만명이 총에 맞아 죽고, 300만의 노숙자가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자기나라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국 내 인권문제가 매우 심각하며, 자기나라 인권문제의 개선은 국제적 분쟁없이 당국의 독자적인 노력으로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나라의 참담한 인권유린은 외면하면서 남의 인권문제를 억지로 만들어내며 여론을 몰아가는 행위는 모든 인류에게 지탄받을 비열한 정치공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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