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주한미군과 관련한 범죄가 또 다시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1달 동안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하더라도 2월2일 지하철에서 주한미군 6명에 의해 발생한 20대 여성 집단성추행 사건, 3월 2일 주한미군의 일명 “이태원 유사총기 난동 사건”, 3월 9일 미군 정비사 흉기 난동사건, 3월 14일 평택 아파트 엘리베이터 20대 여성 강제추행 사건, 3월 16일 동두천 미군과 한국인 칼부림 사건, 3월 17일 새벽 홍익대 앞 경찰관 폭행사건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주한미군과 관련한 강력범죄 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모두 다 알다시피 주한미군 범죄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사회문제가 되어왔다. 그리고 그 때마다 주한미군 범죄의 심각성이 논의되고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사건이 잠잠해지면 주한미군 범죄는 언론에서 사라져 버리고 동시에 사회적 논의도 실종되었다.
주한미군 범죄 사건의 사례들
우리 국민의 기억 속에 가장 깊숙이 남아 있는 주한미군 범죄사건은 “미군장갑차 신효순ㆍ심미선 압사사건”이다.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13일, 지방선거일을 맞아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가던 신효순, 심미선 두 학생이 갓길에서 부교 운반용 장갑차에 깔려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미군 측은 운전자의 시야가 가린 상황에서 통신장애로 관제병의 경고가 운전수에게 전달되지 않아 발생한 사고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통신장애가 쉽게 일어나지 않고, 두 명의 피해학생이 일렬로 누워 두개골이 깨질 정도로 완전히 밟히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가능한가 등의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 신효순·심미선 양의 사고 당시 현장을 수습하고 있는 사진. 당시 구급차 기사가 가지고 있던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2002.6.13)
여론이 점차 나빠지자 미군당국은 운전수와 관제병을 과실치사죄로 미 군사법원에 기소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최초로 미군당국에 신청한 법무부의 재판권 포기 요청은 거부하였다. 이 사고가 공무 중에 일어난 사고이고, 지금까지 미국이 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2002년 11월 18일부터 23일까지 열린 군사재판에서 운전수와 관제병 모두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재판장에서부터 배심원까지 모두 현역 미군으로 구성된데다가 사건의 진상조차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진행된 재판이었다. 이들 미군은 무죄 평결이 있은 지 5일 만인 11월 27일, 짤막한 사죄성명을 발표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결과는 우리 국민의 분노를 불러왔다. 당시 효순, 미선 학생을 추모하자는 네티즌 “앙마”의 제안에 의해 촛불집회가 기획되었는데 이 집회가 바로 지금 촛불집회의 원형이 되었다. 서울시청에 10만 명의 국민들이 모여 살인미군 처벌, SOFA 개정, 미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였고 미 대사관 앞까지 진출하여 미국을 규탄하는 집회를 벌였다. 이 사건은 2002년 있었던 16대 한국대선에서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미군장갑차 신효순ㆍ심미선 압사사건’ 이후에도 주한미군 범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산 음주 뺑소니 사망사건(2003), 신촌 미군 흉기 난동사건(2004), 동두천 미군트럭 압사사건(2005), 이발소 여종업원 강도, 강간미수사건(2005), 66세 여성 성폭행 사건(2007), 동두천 10대 여학생 성폭행 사건(2011), 홍대 앞 10대 여학생 성폭행 사건(2011)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최근에 일어난 주한미군 범죄 사건은 한미관계의 불평등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주한미군이 국가 공권력을 무시하는 일이 잦아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2012년에는 평택에서 미 헌병대가 주차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던 한국인에게 수갑을 채우고 린치를 가하고 이를 말리던 사람 2명까지 수갑을 채워 이를 막던 경찰까지 무시한 채 기지 정문까지 200m를 끌고 가는 일이 발생했다. 명백하게 주한미군의 권한을 넘어선 월권행위였다. 그러나 한국 검찰은 수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을 끌었고 결국 해당 미 헌병대원 전원은 출국해 버리고 말았다.
2013년 3월 16일 일어난 “이태원 유사총기 난동 사건”의 경우에는 이태원에서 유사총기를 시민들에게 난사하던 미군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것도 모자라 차로 치는 사실상의 살인미수라 할 수 있는 만행을 저질렀다. 3월 17일 마포에서는 주한미군이 난동을 부리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을 폭행하는 일이 하루에 두 건이나 발생해 주한미군의 공권력 무시행위가 언론에 공개되었다.
만약 미군이 미국에서 위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면 현장에서 사살되었을 정도의 심각한 범죄행위로 처벌받았을 것이다. 반대로 한국인이 한국경찰에게 위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면 그 한국인은 구속되어 수사를 받을 것이고 중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미군은 기지로 돌아가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고 있다.
▲ “이태원 유사총기 난동사건” 당시 도주하는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 캡쳐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박정경수 사무국장은 팟캐스트 방송 “라디오반민특위”에 출연해 최근 CCTV가 많아지면서 주한미군의 난동이 영상으로 공개되는 일이 잦아진 것이지 주한미군의 공권력 무시 행위는 예전부터 있었던 행위였다고 밝혔다. 특히 “이태원 유사총기 난동 사건”의 경우 일반적으로 주한미군 범죄자들이 기지영내에 들어가면 한미 SOFA의 특성상 한국이 수사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을 악용하려 무리하게 기지로 도망가려고 했다는 점 때문에 주한미군이 경찰까지 치는 일이 벌어진 것으로 분석했다.
뿌리 깊은 주한미군 범죄행각
주한미군의 범죄행각은 어쩌다 일어나는 우발적 사고라 보기 어렵다. 주한미군 범죄는 한국현대사와 더불어 뿌리깊게 존재해 왔다. 주한미군은 주둔하는 그 순간부터 이른바 “미군범죄”를 양산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9월 8일이다. 미군은 1949년 일부의 고문단을 남기고 일부 철수했다가 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한국에 들어와 지금까지 68년째 주둔하고 있다. 1945년부터 SOFA가 발효된 1967년 전까지는 미군범죄에 대해 일체의 수사나 재판을 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얼마나 많은 미군범죄가 벌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이 발효된 첫해 11개월 동안 발생한 미군범죄가 총 1,710건(1967.2.9. ~ 1967.12.31.)이었던 것을 보면 1945년부터 1966년까지 최소한 연간 2천 건 가까이 미군범죄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여연대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얻은 ‘미군의 한국인 상해사건 관계철–외무부 미주국 북미과(1954~1958)’라는 문서에 따르면 1954년 한 해 동안 총기를 난사하거나 폭행으로 인한 치사상 사고가 25건이 일어나 29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957년 7월 6일, 송유관을 지키던 미군이 인천에서 당시 3살이던 김모군을 총으로 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해 8월 25일에는 미군이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사람들을 향해 이유 없이 돌팔매질을 하다 총을 발사하여 사람을 사살한 사건도 일어났다. 한겨레 고경태 기자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미군 총격으로 사망한 한국 민간인 숫자가 70여명이라는 통계가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히기도 하였다.
또한 2012년 8월 10일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1962년 상반기에만 충북 옥천에서 한국군 2명 사살(1월 3일), 파주 나무꾼 사살(1월 6일), 절도 혐의자 사살(2월 9일), 동침 여성 구타 낙태(2월 19일), 노상에서 소변보던 민간인 칼로 찔러 중상(3월 5일), 부대 출입 민간인 사격 즉사(5월 20일) 등 보도된 미군범죄사건만 20건이 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5월 28일 ‘파주 린치 사건’ 이 일어난다.
▲ “파주 린치 사건” 당시 동아일보 지면
파주 린치 사건은 미군 장교 데이비드 스완슨 중위와 토머스 와일드 중위가 부대근처를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피해자 이일용씨를 절도혐의자로 몰고 총기로 위협하며 이일용씨를 끌고 다니면서 발가벗기고 구타를 일삼고 심지어는 전선줄에 거꾸로 매달아 놓는 등 가혹행위를 저지른 사건이다. 심지어 스완슨 중위는 부대 안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종업원까지 불러 매질하는 장면을 구경하게 했다고 한다. 1962년 5월 31일 동아일보에는 “천장에 매달린 한국인은 온몸과 특히 두 손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열손가락을 돌 위에 깔아놓고 구둣발로 뭉개었다.”, “매 맞는 사람은 얼굴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실려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학생들이 행동에 나섰다. 6월 6일 현충일에 고려대생들의 시위에 나섰고, 6월 8일에는 서울대생 1천여 명이 동조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미군범죄자 처벌과 주둔군 지위에 관한 한미 SOFA 체결을 미국 측에 촉구했다. 미국은 결국 6월 15일 그동안 미뤄 왔던 한미행정협정 협상에 동의하고 협상을 시작, 1966년 말 한미 SOFA가 체결되었다.
1967년 한미 SOFA가 발효되었지만 미군 범죄의 심각성은 여전했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가 만든 ‘미군범죄 관련 주요 통계자료’에 따르면 1967년 1710건이던 미군범죄는 1975년 2383건으로 크게 늘어났다가 1987년에서는 1409건으로 약간 줄어들었다. 그나마도 1970년대 후반 미군 병력이 일부 철수하였기 때문에 미군 숫자가 줄어 범죄 숫자도 줄어든 것으로 미군 범죄가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 1993년 4월 케네스 마클 이병이 선고 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이러던 와중에 1992년 케네스 마클 이병의 윤금이씨 살해사건이 벌어진다. 윤금이 씨는 숨진 상태로 발견될 당시 나체 상태에서 자궁 속에 맥주병 2개, 질 밖으로는 콜라병 1개, 그리고 항문에는 27cm 가량 우산대가 박혀있는 참혹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온몸에는 피멍과 타박상을 입고 있었으며 윤금이 씨의 사체위에는 하얀 세제가루가 뿌려져 있었고 입에는 성냥개비가 물려져 있었다. 사체를 심각하게 훼손한 범죄의 잔악함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이보다도 국민들을 분노케했던 것은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주한미군이 범죄자의 신병인도 조차 거부했다는 점이다. 이로인해 한미 SOFA의 문제가 공론화 되었다.
그러나 윤금이씨 사건 이후에도 주한미군 범죄는 여전했다. 존 병장의 김미순씨 성폭행 사건(1993), 더프와 햄 병사의 한창열씨 택시강도사건(1993), 미군 헌병대의 세모녀 감금폭행사건(1994), 벤넷 이병의 천영숙씨 강간치상사건(1995), 에바다 농아원생 성추행사건(1996), 이태원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조중필씨 살해사건(1997), 헨릭스의 허주연씨 살해 방화서건(1998), 박순녀씨 살해사건(1998), 이정숙씨 살해사건(1999) 등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SOFA개정, 나아가 미군철수만이 해답이다.
현재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있다. 이제 국민들은 주한미군 범죄를 보면 이를 묵과하지 않고 용감하게 나서 범죄자들을 직접 붙잡는데 나서고 있다. 2월 2일 지하철 1호선 의정부–망월사 구간에서 벌어진 주한미군 성추행 사건의 경우 주한미군이 성추행을 자행하자 승객들이 나서서 이들을 붙잡았으며 이 가운데 3명을 억류해 경찰에 넘기는 용감함을 보였다. 3월 3일에 벌어진 총기난동을 부리고 경찰까지 치고 도망간 주한미군의 범죄도 길을 가던 서울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미군의 차를 막으려 하였으며 한 용감한 택시기사는 경찰과 함께 주한미군 범죄자를 끝까지 추격하기도 하였다. 3월 16일 일어난 칼부림 사건에서는 점주가 주한미군에게 집단구타를 당하자 주한미군을 흉기로 찌르기까지 하였다.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한미 SOFA를 개정한다고 해도 주한미군 범죄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1년과 2001년 두 차례 SOFA를 개정하였으나 주한미군 범죄는 감소하지 않았다.
국민들을 분노로 들끓게 하고 있는 주한미군 범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주국방을 확립해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정치적 입장이 절실하다
관련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