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개혁의 목소리가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한나라당이 주도해 재벌개혁 의제를 퍼뜨리더니, 이달 들어서는 뒤늦게 야당인 민주당이 경쟁적으로 대열에 합류하는 모양새다. 최근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재벌들이 서민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것에 대해 제1 야당이 단호히 대처하지 못하고, 희망이 되지 못하면 우리에게 정권을 줄 리가 없다”며 “당에 경제민주화특위 구성하고 경제민주화 강령을 제정하자”고 제안했다.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대기업-중소기업 간 상생을 더 이상 대기업의 선의에 맡기는 게 아니라 법과 제도의 틀을 확실히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7월 중 틀을 만들고 8월 국회에서 입법절차를 밟겠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입법일정까지 제시한 것이다. 바야흐로 재벌 개혁이 외환위기 이후 14년 만에 사회개혁의 최대 이슈로 부상하려는 조짐까지도 보인다. 말로만 보면 현재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과 재계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분위기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이명박 정부 3년 동안 친기업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규제완화·감세·고환율이라는 대표적 3대 정책으로 재벌의 성장을 도와서 눈부신 실적으로 올렸지만 실제 국민의 체감경기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이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확산일로에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소장파 핵심의원이 “서민이 표 찍지 재벌이 표 찍느냐”며 “지금 민심으로 보면 누가 더 재벌을 때리느냐에 따라 표가 나온다”고 한 발언은 정치권에 투영된 민심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준다. 때문에 현재 재벌 개혁의 현실적 정당성은 재벌 대기업만의 ‘나 홀로 성장’, ‘적하효과 소멸’이라는 3년 동안의 역사적 결과와 현실적 경험에서 나오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과잉 차입과 중복투자·부실경영 등의 이유로 97년 외환위기 주범으로 몰렸던 재벌의 개혁 요구와는 사뭇 다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정치권의 ‘표를 의식한 립서비스 수준의 재벌 성토’가 아닌 진정한 재벌 개혁의 근거와 방향을 잡기 위해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지난 3년 동안의 또 다른 경험이었던 금융위기에서 배울 점을 찾자는 것이다. 위기가 시작된 지 4년, 미국 기준으로 보면 5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가장 많이 지적됐던 교훈의 첫 번째는 적어도 금융시장에서 보이는 손은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시장 지상주의 아래 자유화로 치달았던 금융시장은 스스로 각종 첨단 금융기법을 창조하고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한 무수한 파생상품을 개발했다고 자평하면서 엄청나게 팽창을 해 왔지만 스스로 붕괴되고 말았다. 금융시장의 중심지 월가만 붕괴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금융시장은 물론 실물시장도 무너졌고 세계경제의 대침체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래서 배운 것은 적어도 금융시장은 스스로 위험과 문제를 치유할 능력이 없으며 시장기능만으로는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규제가 필요하다는 교훈이다. ‘규제 자본주의가 대안’이라는 주장이나 금융산업은 원천적으로 ‘규제산업’이어야 한다는 발언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현실에서 금융시장에서의 시장실패가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교훈이 있었다. 바로 ‘너무 커서 파산시키지 못하는 대마불사’ 상황을 자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위기의 규모와 파장, 그 수습비용이 그토록 컸던 것은 씨티은행이나 리먼브러더스·AIG 같은 초대형 금융회사들이 부실에 빠지면서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에서 정부조차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져 버리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재벌 대기업집단한 바로 위의 두 가지 교훈을 그대로 새겨야 한다. 현재 한국의 재벌 대기업집단은 골목시장까지 계열사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수요독점을 기반으로 하청기업들에게 납품단가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으며, 독과점 시장지배력을 배경으로 주요 소비품목에 대한 가격을 임의로 올려 왔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경제에 ‘자유로운 경쟁에 의한 시장질서와 시장가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명백한 시장왜곡과 시장실패가 목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재벌 대기업집단은 엄청나게 집중된 경제력을 기반으로 주요 권력기관과 언론, 이데올로기까지 주무르려 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4대 그룹의 총 매출액은 603조원에 이르러 전체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50%를 상회하고 있을 정도다. 정부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대마불사가 된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재벌 대기업의 전횡을 자유로운 시장활동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길 것이 아니라 ‘보이는 손’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한국경제에 가장 극적인 시장실패, 보이는 손의 개입이 절실한 분야가 바로 재벌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이다. 정당한 이유에 근거해 사회적으로 규제를 시작할 때다.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