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맞아 각 언론사가 여론조사를 했다.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복지에 관한 설문도 물론 포함됐다. 어떻게 물었느냐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지만 놀랍게도 국민의 2/3 가량이 “증세를 해서라도 복지를 늘려야 한다”고 대답했다.
가히 경천동지요, 상전벽해라고 할 만하다. 2002년 정초에 탤런트 김정은씨가 “부자 되세요”라고 외친 것이 신호탄이었을까? 우리 대부분은 그동안 투기에 목숨을 걸었다. 주식과 부동산시장에서 나만은 승리해서 떼돈을 벌 것이라고, 우리 아이만은 특목고를 거쳐 일류대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어느 재벌의 황당한 선동에 따라 우리 모두 정상을 향해 온갖 경쟁을 다 벌였고, 거기서 복지란 패자의 구질구질한 구걸일 뿐이었다.
2008년 4월의 총선이 최악이었다. 서울과 경기도의 모든 선거구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선거공약은 똑같았다. “뉴타운”, 그리고 “특목고”. 이런 낯 뜨거운 공약을 내걸지 못한 진보-개혁 후보는 하나 같이 “지못미”가 되었다. 드디어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나도 패자가 될 수 있다, 아니 패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일까?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이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40대 남자들은 샌델의 “정의론”을 뒤적이고 장하준의 “23가지”를 들춰 본다.
하여 정치권에서 복지 논쟁이 뜨겁다. 야권의 “모두에게 복지를”(보편복지)에 맞서 한나라당은 “필요한 사람에게 복지를”(선별복지)를 내세웠고 민주당 내에서는 “증세없는 복지”와 “증세를 통한 복지”가, 그리고 진보진영에서는 “부자들의 증세”(내라)와 “우리 모두의 증세”(내자)가 맞서고 있다. 복지의 백화제방, 아름다운 풍경이다. 굳이 내 생각을 말하라면 “우리 모두의 증세에 의한 보편 복지”라고 대답하겠지만 지금은 단번에 정답을 내 놓는 경쟁을 할 때는 아닌 듯 하다. 예컨대 OECD 평균에 도달하려면 약 100조원이 필요하므로 증세를 해야 한다는 건 분명 맞는 말이지만 어떤 복지부터 늘려 나가야 하는지, 증세 이전에 국민들의 복지에 대한 믿음을 높일 방법은 없는지도 논의해야 한다. 그런 우선순위나 방식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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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들여다 보는 방법은 수없이 많겠지만 여기서는 지난 10년간 빛나는 성과를 거둔 행동/실험경제학, 그리고 진화심리학이라는 안경을 써 보자. 그간의 연재를 통해 “작은책”의 독자들은 이런 논리에 익숙할 것이다. 보편복지 역시 공공재나 공유자원(common pool reource)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딜레마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가장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가 밝혀 냈듯이 이기적 인간이라면 최적의 답을 찾을 수 없다.
다행히 이들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관찰하듯, 아니 우리 스스로 그러하듯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한다. 맹자의 ‘측은지심’은 하이예크나 프리드만이 주장하듯 원시적 감정이 아니라 지금도 엄연히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인간 본성 중 하나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은 상호적(reciprocal)으로 행동한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내가 대접받기 원하는 것처럼 남을 대접”하려고 한다. 나아가서 눈에 띠게 공정함을 벗어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가까운 미래에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기꺼이 응징을 한다. 이런 속성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협력이 이뤄져온 이유이며 그렇게 우리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해 온 것이다. 예컨대 인간이 정말로 이기적이기만 한 존재라면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없을 것이다.
이런 협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 즉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게 말한다면 남의 선의를 이용하려는 내 탐욕(greed)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남에게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fear)이다. 복지에 관한 한 후자가 더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세금은 내지 않고 복지의 이익만 누리려 한다면 아무도 기꺼이 세금을 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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