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면을 벗을 때가 됐다.” 상대를 이중인격으로 몰아세우는 무례한 언사다. 2011년 3월 <동아일보> 주필은 “입만 열면 인권을 외치는 이 땅의 이른바 진보 민주화세력”을 겨냥해 그렇게 썼다. 그는 무람없이 정죄한다. “당신들은 더 이상 민주화세력도, 진보세력도 아니다.” 그 칼럼을 읽으며 새삼 세월의 변화를 실감했다. 어느새 아득한 추억처럼 빛바랬지만 한 때 그 신문은 한국 언론의 희망이었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 용기 있게 맞섰던 기자들 130여 명이 대량 해직 된 사건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동아일보>는 전두환 정권과 맞서기 시작했다. 신문 지면에 ‘김중배칼럼’이 나오는 요일이면, 독자들은 감동에 젖어 읽었다. 다른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도 그 신문을 찾았다. <동아일보> 내부에서도 해직사태 이후 해마다 들어온 수습기자들 가운데 민주언론의 의지가 또렷한 젊은이도 많았다. 그 시기 <동아일보>는 전두환 정권이 서울대생 박종철을 고문해 죽인 사건을 집요하게 보도해갔다. 김중배 논설위원이 쓴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제하의 칼럼은 민주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들였다.대북 비판 칼끝 ‘종북 색깔씌우기’로그런데 어떤가. 작금의 <동아일보>는 전혀 다르다. 언론의 본령이 ‘권력 감시’에 있다는 언론학 원론을 새삼 조곤조곤 들려주고 싶을 정도다. <조선일보>보다 한 술 더 뜬다는 말은 이미 언론계 안팎의 상식이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그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는 대다수 기자가 1980년대 중반에는 적어도 지금처럼 글을 쓰진 않았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변했을까. 언론계의 ‘명가’로 불리던 신문사와 그 속에서 일하는 기자들이 조락한 모습은 언론과 대한민국의 내일을 위해 깊이 성찰해볼 사안이다. 더 말할 나위 없이 여기에는 가장 큰 원인이 똬리틀고 있다. 신문사 내부의 봉건적 구조가 그것이다. 뜻있는 언론인들과 민주시민들이 언론개혁운동을 벌여온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 사주의 ‘황제식 경영’은 바뀌지 않았고, 언론개혁은 여러 이유에서 명백히 후퇴하고 있다. 다만 구조적 문제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기사를 쓰는 기자 개개인의 책임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자시절 초기의 글과는 달리 진보·민주세력에게 날 선 칼날을 휘두르는 칼럼을 노상 쓰는 언론인들의 글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진보·민주세력=친북·종북세력’이라는 등식이다. 들머리에 소개한 <동아일보> 주필이 쓰는 칼럼은 거의 모든 주제가 ‘김정일 체제’ 비판이다. 언론인으로서 그의 거주지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인가 싶을 정도다. 물론, 그의 대북 비판이 국내 상황과 무관하진 않다. 비판의 칼끝은 진보·민주세력을 겨누고 있다. 그는 2011년 3월 현재 “한국의 민주화세력이 눈을 돌려야 할 곳이 어디인지는 자명하다”며 “북한이다”라고 단언한다. 이어 “그럼에도 남한의 진보라는 사람들은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어떤 행동도 할 생각이 없다”고 개탄하며 공격한다. <동아일보> 주필은 물론, 진보세력을 ‘훈계’하는 칼럼을 즐겨 쓰는 <조선일보><중앙일보>의 언론인들에게 명토박아 둔다. 대한민국의 모든 진보·민주세력이 ‘김정일 체제’를 찬성한다는 판단은 너무 거칠고 사실도 아니다. 터놓고 말하면, 기자로서 공부를 하지 않는 데서 오는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무릇 무지는 만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어떤 행동”을 촉구하는 언론인들은 자신들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으면 서슴지 않고 ‘종북세력’으로 몰아친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그런 식의 황당한 딱지붙이기는 신자유주의를 거론하는 어느 언론인의 칼럼에서도 확인된다. 가령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세력을 겨냥해 ‘주체사상이 더 좋은가, 신자유주의가 더 좋은가’라는 황당한 질문을 던진다. 솔직히 궁금하다. 과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만 보기엔 젊은 시절에 본 그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다. 새삼 말할 가치도 없지만, 신자유주의와 주체사상 사이에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다. 수많은 대안들이 있다. ‘멸공’ 아니면 ‘종북’이라는 논리도 마찬가지다. 상대에게 색깔을 들씌우는 반민주적 사고의 연장이다.극우수준 논리의 논객들 자성의 거울 보라더러는 그 또한 ‘표현의 자유’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넘기기엔 현실이 너무 엄중하고, 언론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 보라. 휴전선 앞에서 김정일 체제를 무너뜨리자고 선동하는 유인물을 대량으로 풍선에 실어 보내고, 대규모 화력을 집중한 한미합동 군사훈련이 곰비임비 이어지면서 북은 ‘불바다’를 위협하고 나섰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 민주화를 위한 어떤 행동’을 마구 선동하는 행태가 과연 성숙한 자세인가? 저마다 언론사를 ‘대표’하는 논객들이 극우단체 수준의 거친 논리를 칼럼으로 써대는 모습을 보며 혹 그들이 ‘알리바이’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삼성 재벌의 비리나 비정규직의 고통,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양극화를 거론하지 못하거나 짚을 생각도 없으면서, 그 이유를 한국 사회에 ‘발호하고 있는 종북 세력’탓으로 돌리려는 ‘합리화 심리’가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지금 여기서 우리 사회가 풀어가야 할 문제를 애면글면 의제로 설정하며 동분서주하는 사람들 앞에 그들이 조금이라도 겸손한 자세를 보이기를 진심으로 당부하고 싶다. 진보·민주세력을 싸잡아 ‘종북주의’ 따위의 색깔을 살천스레 들씌우거나 가면을 벗으라며 부르대는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거울에 비춰보라. 누가 보이는가? 젊은 날의 순수한 영혼은 어디로 갔는가? 그만하면 많이 누렸다. 이제 가면을 벗을 때가 됐다. *이 글은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