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사태. 대한민국 국민에게 깊숙이 각인된 사건입니다. 1968년 1월21일 이북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었지요. 흔히 ‘김신조 사건’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서울까지 들어온 이 사건은 그해 일어난 울진-삼척의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맞물리며 한국 정치사를 바꾸는 큰 요인이 되었습니다. 박정희가 이듬해 대통령 3선 개헌을 이루는 데도 1.21사태와 울진-삼척사태가 ‘분위기’를 잡았지요. 고백하거니와 당시 초등학생이던 저 또한 공포에 질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민족통일 문제를 공부하면서 궁금했었지요. 왜 그런 무모한 일을 저질렀을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북만이 아니라 이남에서도 ‘무장간첩’을 보냈었다는 외신을 인용한 논문의 한 구절만 접했을 뿐입니다. 남북 무장간첩 주고받으며 보복 악순환 그런데 그 의문을 단박에 풀어줄 증언이 나왔습니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진삼 자유선진당 의원이 국회에서 진실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국회 국방위 간담회 문답 과정에서 이진삼은 국방장관 김관진에게 “내가 이북에 세 번 들어가서 보복 작전한 걸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어 “알고 있다”는 답에 “몸으로 때려 부순 거다. 33명이 사망했다”고 과시했습니다. 보도를 종합하면 두 사람이 거론한 ‘보복 작전’은 1967년 가을에 이뤄진 이른바 ‘필승공작’입니다. 당시 이진삼은 제609 방첩부대장으로 육군 대위였습니다. 이진삼 대위가 지휘한 침투조는 인민군을 기습해 33명을 사살했답니다. 국회 문답이 <문화방송> 뉴스에 보도되면서 극우세력 일각에서는 이진삼을 ‘영웅’으로 추어올리는 분위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보복’했는지가 궁금할 터입니다. 이진삼 의원실에선 한 신문의 질의에 “무장공비가 요인 암살 등을 위해 100여 차례 휴전선을 침투하는 등 북한의 비정규전에 따른 피해가 극심했었다. 응사 수준으론 안 된다고 보고 이 의원이 나섰다. 북한은 이후 한동안 조용했다가 다시 침투를 재개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선 아직 청와대습격 사태도 울진-삼척의 무장공비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극우 쪽의 정보가 많은 <조선일보> 기사는 “당시 북한군이 미군 GP를 폭파한 데 대한 응징 보복작전”이었다고 단정해 썼습니다. 휴전선 넘어 33명 죽인 직후에 1.21사태 미군 경계초소를 폭파했다는 이유로 휴전선을 넘어가 33명을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잔혹한 무장공비의 상징으로 틈날 때마다 거론하는 울진-삼척사건에서 사망자는 민군을 합쳐 18명이었습니다. 이진삼이 밝힌 33명의 죽음 이후 석 달 만에 1.21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극우세력의 선동을 미리 막기 위해 명토박아 둡니다. 1.21사태나 울진-삼척 사태를 두남둘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밝혀진 진실을 바탕으로 냉철히 짚어야 옳다는 걸 강조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진삼이 자랑하듯 밝힌 ‘필승작전’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보복의 악순환을 막기위한 남북 대화, 평화 만들기의 중요성이 그것이지요. 2011년 2월8일로 예정된 남북 군사회담을 앞두고 44년 만에 공개된 ‘33명 사살 전과’는 남북 관계에 대해 민주시민들의 깨어있는 성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