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 아이들과 영어 공부 하는데 글 중에 ‘swap’단어가 보였다. 어린 아이들이 전화번호를 주고받는다는 문장에서 나온 건데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swap이란 말을 아이들 책에서 보니까 이상했던 게지.
나도 철학이나 신념으로 정리된 건 아니지만 성에 관한 부분에서는 도덕, 사회 규범의 기준으로 막고 있을 뿐이지, 절대 선, 절대악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도덕적 잣대로 비난한다든지 하는 것은 옳은 행위는 아닐 듯…
그래서 이런 문제가 나오면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버리는 편임.
그래도 사회에서 악으로 규정하고 벌을 준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그 사회의 잣대에 따른 거니까….
2003년 반년동안의 잠입수사끝에 적발한 스와핑 사건은
연일 모든 언론사의 탑뉴스와 사설을 도배했지만
결론은 장소 제공자에 대한 식품위생법위반 적용으로 끝났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와핑을 처벌할 법률은 없거든요.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살면 될 듯 합니다.
철학으로 수다떨기 연재를 끝내면서
다음에는 무슨 내용을 기획해 볼까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열화와 같은 성화에 화답하여
철학은 엿바꿔먹고 허리하학적인 욕망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써볼까
아니면
그간의 선정성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글을 써볼까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독자분들께서 좋은 의견을 주시면
기획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듯 합니다.
글을 읽고 배운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의문이 생깁니다. “서로의 삶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통찰이고 한편으로는 무기력의 표현같습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는데 건장한 청년이 노인체를 두들겨 패고 있습니다. “서로의 삶을 인정하면 그만이다”이러기는 힘드네요.
서로의 삶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 서로의 삶에 파고 들어가는 무엇이 필요해 보입니다.
글로벌 시대에 노예없이 잘 사는 방법을 택한 국가로서의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정보화로 인해 ‘나는 이렇게 해서 편하게 산다’, ‘편법’, ‘그렇게 살면 힘들어’의 노하우들이
개개인에게 속속들이 들통나는 이 시대에 단순노동의 존재가치는 대다수에게서 떠나간듯 합니다.
자원없고 기술없는 이 나라에서 돈을 굴리며 살아가려면 섹스, 마약, 범죄로 인한 소송비용
, 세금, 스와핑과 불륜, 몸매열풍과 성형수술을 부추켜 이혼률 올려라 재혼장려해
목돈지출로 인한 셋쑤 늘리기, 짝퉁명품과 성형외과같은 고부가가치산업장려
, 쥐도새도모르게 투기사업 장려하여 숨은돈에 후랏쉬 비추기
등등등등과 같은 잔대가리성 정책들이 필요한듯 합니다.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에 철학이 필요할까요?
조선왕조의 500년 철학도 일반에게 철저히 개무시당하게 하는
이 분위기를 보면 아직은 때가 아닌듯 합니다.
역사가 정돈되지 않은 이 나라의 철학과 정책은 아무래도 앞으로 많은 피를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정말 너무하네요. 절대악이니 절대선은 없다는 그런식의 궤변으로 논리를 세우는 것이 참 우습게 느껴집니다. 바른 양심하나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를 구구절절 저런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죠? 양심빠진 철학이 저런 어이없는 글을 만드는 겁니다. 철학이라는 것이 무슨 쓰레기포장하는 악세사리인가요? 저런 쓸모없는 언어유희가 너무싫네요. 한마디로 니멋대로 사는게 진리다. 세상이 썩어서 냄새가 나도.. 뭐 이런건가요?
맞습니다. 각자가 바른 양심 하나로 판단하면 되는 것이죠.
님의 바른 양심에 따른 판단과 저의 바른 양심에 따른 판단이 많은 부분 일치하겠지만
아주 가끔가다 다르게 판단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절대악이니 절대선이니 하는 말로
개인의 바른 양심에 따른 판단을 억압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철학이란 것이 쓰레기포장하는 악세사리여도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삶과 다른 삶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삶과 다른 삶을 부정하는 것보다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을 보고 인정하는 것과 불인정하는 것이 있을 때, 그 내용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도둑질을 했습니다. 이 때 인정과 불인정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겠지요. 그리고 그러한 도둑질은 나쁘다는 것도 인정해야겠지요. 인정하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고정불변한 도둑놈이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그 사람도 도둑질을 안하고 살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서 무엇을 행함으로서 도둑놈이 아닌 다른 삶을 살도록 도외주는 것이겠지요. 도와주는 마음이 댓가를 바라거나, 우월감을 증명하기 위해서거나 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무런 댓가도 바리지 않고 오로지 타자가 좋은 사람이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행위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마음이 어떻게 하면 생기는가?입니다. 철학으로도 교육으로도 과학으로도 이런 마음을 생기게 하기는 부족해 보입니다.
아마도 이런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기적일 겁니다. 기적을 바라고 살아야겠지요.
자신과 다른 삶을 인정하는 것을 보통 ‘관용의 윤리’ 내지는 ‘똘레랑스’라고 합니다. 흄이나 롤즈의 윤리학이지요. 우리나라에는 홍세화선생님의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광범위하게 소개된 윤리이론입니다.
자신과 다른 삶을 인정하자는 ‘관용의 윤리’ 내지는 ‘똘레랑스’에서 논쟁이 되는 지점이 있지요.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도 바로 그 지점입니다. 바로 어느 선까지 인정해야 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살인’이나 ‘도둑질’을 자신과 다른 삶으로 인정하는 순간 ‘관용’ 내지는 ‘똘레랑스’는 파괴됩니다. ‘살인’이나 ‘도둑질’ 그자체는 이미 자신과 다른 삶에 대한 침해이니까요. ‘관용의 윤리’나 ‘똘레랑스’에서 관용의 기준이 생기는 것이지요.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이 바로 그 기준입니다.
자유의 인정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인정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삶에 대한 인정도 그 삶이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범위에서만 인정될 수 있겠지요.
똘레랑스. 홍세화씨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을 보면서 처음 알게된 단어입니다.
삐라를 뿌리는 기구를 날리고 프랑스에 망명을 해서 택시 운전기사로 생활하게 된 홍세화씨를 보며 참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부러움에 자면서 택시운전을 하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저 서로를 인정하고 마는 똘레랑스에 대해 뭔가 마음 한구석 불편함이 있습니다.
대동단결, 하나됨, 진리, 진실을 추구하던 나에게 똘레랑스는 서구유럽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 일종의 적당한 타협이거나 불의를 못 본척 하고 마는 비겁함에 대한 합리화로 느껴졌습니다.
그 후 삶의 현장에서 깨어지면서 노자의 드러내지 아니하는 말없는 실천을 추구하던 나에게 다시 공자의 “화이부동”이라는 말이 들어왔습니다. 화합하되 나를 강요하지 않음이라고 해석하면 될까요? 역시 또 똘레랑스의 불편함을 느꼈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나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관조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싸움의 연속이며 싸움은 깨어짐과 부서짐입니다. 나 하나의 안락을 위한 삶이 아니라, 적당히 타협하고 즐기는 삶이 아니라 깨어지고 부서지며 단련되는 삶,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부단히 반성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형은 부단히 실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기에 형의 철학이 실천을 위한 철학이 되기를 바래요^^
그간 자극적인 소재 찾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마지막까지 실망시키지 않으시네요!ㅎ
억, 이제 시작이구나 생각했는데 끝나다니….
안 됩니다. 맛뵈기만 보이고 가버리면 길들여진 우리 입맛은 어떻게 합니까?
조금씩이라도 써주세요.
철학하는 사람들과 이렇게라도 말 나누는 게 쉽지 않잖아요.
사부님, 제발 끝내지 마세요.
어제 저녁에 아이들과 영어 공부 하는데 글 중에 ‘swap’단어가 보였다. 어린 아이들이 전화번호를 주고받는다는 문장에서 나온 건데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swap이란 말을 아이들 책에서 보니까 이상했던 게지.
나도 철학이나 신념으로 정리된 건 아니지만 성에 관한 부분에서는 도덕, 사회 규범의 기준으로 막고 있을 뿐이지, 절대 선, 절대악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도덕적 잣대로 비난한다든지 하는 것은 옳은 행위는 아닐 듯…
그래서 이런 문제가 나오면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버리는 편임.
그래도 사회에서 악으로 규정하고 벌을 준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그 사회의 잣대에 따른 거니까….
긍께..결론은 스와핑?
2003년 반년동안의 잠입수사끝에 적발한 스와핑 사건은
연일 모든 언론사의 탑뉴스와 사설을 도배했지만
결론은 장소 제공자에 대한 식품위생법위반 적용으로 끝났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와핑을 처벌할 법률은 없거든요.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살면 될 듯 합니다.
철학으로 수다떨기 연재를 끝내면서
다음에는 무슨 내용을 기획해 볼까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열화와 같은 성화에 화답하여
철학은 엿바꿔먹고 허리하학적인 욕망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써볼까
아니면
그간의 선정성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글을 써볼까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독자분들께서 좋은 의견을 주시면
기획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어쨌든 기획과 준비가 어느 정도 필요할 듯 합니다.
그렇잖아도 이플이 너무 딱딱하다는 평이 많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글들은 넘쳐나니까 크시님이 아니더라도 누가 마구 쓸 겁니다.
대신 ‘허리 아래에 대한 오해와 진실(와, 너무 제목 죽인다.)’이라는 주제로 써보면 좋지 않을까요?
부탁입니다.
30, 40대들도 성교육, 여성교육이 필요합니다.
교육을 빙자해서 허리 아래를 드러냄! 괜찮지 않아요?
의과대학 다닐 때 생각납니다.
정신과 주임교수님 전공이 성정신의학인데 항상 첫 강의 때는 3시간짜리 애로비디오를 보여주는 겁니다. 물론 의상비는 전혀 안 들어간 거고….
언젠는 또 비디오 2개를 들고 오셔서는 유럽 학회 갔다오다가 세관에 걸려서 좋은 거 2개는 뺏기고, 겨우 이거 건졌다면서 다시 보여주기도 했죠.
그 때 감동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크시님도 열렬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셔서 우리 그런 쪽으로 한번 시도해 보죠?
검열에 잘리면 말고….
글을 읽고 배운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의문이 생깁니다. “서로의 삶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통찰이고 한편으로는 무기력의 표현같습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는데 건장한 청년이 노인체를 두들겨 패고 있습니다. “서로의 삶을 인정하면 그만이다”이러기는 힘드네요.
서로의 삶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 서로의 삶에 파고 들어가는 무엇이 필요해 보입니다.
모든 문제를 개인의 선택의 문제를 돌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는 도덕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자유’를 제한해야 합니다.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자유의 한계선이 존재하는 것이죠.
타인의 삶에 대한 인정도 같은 논리안에 들어 있습니다.
‘타인의 삶에 대한 불인정’을 타인의 삶으로 인정하는 순간
‘타인의 삶에 대한 인정’은 파괴되고 맙니다.
‘타인의 삶에 대한 인정’도 그 한계선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님은 진화심리학 관련 책들을 읽어 보지 않은 모양이네요?
글로벌 시대에 노예없이 잘 사는 방법을 택한 국가로서의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정보화로 인해 ‘나는 이렇게 해서 편하게 산다’, ‘편법’, ‘그렇게 살면 힘들어’의 노하우들이
개개인에게 속속들이 들통나는 이 시대에 단순노동의 존재가치는 대다수에게서 떠나간듯 합니다.
자원없고 기술없는 이 나라에서 돈을 굴리며 살아가려면 섹스, 마약, 범죄로 인한 소송비용
, 세금, 스와핑과 불륜, 몸매열풍과 성형수술을 부추켜 이혼률 올려라 재혼장려해
목돈지출로 인한 셋쑤 늘리기, 짝퉁명품과 성형외과같은 고부가가치산업장려
, 쥐도새도모르게 투기사업 장려하여 숨은돈에 후랏쉬 비추기
등등등등과 같은 잔대가리성 정책들이 필요한듯 합니다.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에 철학이 필요할까요?
조선왕조의 500년 철학도 일반에게 철저히 개무시당하게 하는
이 분위기를 보면 아직은 때가 아닌듯 합니다.
역사가 정돈되지 않은 이 나라의 철학과 정책은 아무래도 앞으로 많은 피를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정말 너무하네요. 절대악이니 절대선은 없다는 그런식의 궤변으로 논리를 세우는 것이 참 우습게 느껴집니다. 바른 양심하나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를 구구절절 저런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죠? 양심빠진 철학이 저런 어이없는 글을 만드는 겁니다. 철학이라는 것이 무슨 쓰레기포장하는 악세사리인가요? 저런 쓸모없는 언어유희가 너무싫네요. 한마디로 니멋대로 사는게 진리다. 세상이 썩어서 냄새가 나도.. 뭐 이런건가요?
맞습니다. 각자가 바른 양심 하나로 판단하면 되는 것이죠.
님의 바른 양심에 따른 판단과 저의 바른 양심에 따른 판단이 많은 부분 일치하겠지만
아주 가끔가다 다르게 판단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절대악이니 절대선이니 하는 말로
개인의 바른 양심에 따른 판단을 억압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철학이란 것이 쓰레기포장하는 악세사리여도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삶과 다른 삶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삶과 다른 삶을 부정하는 것보다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을 보고 인정하는 것과 불인정하는 것이 있을 때, 그 내용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도둑질을 했습니다. 이 때 인정과 불인정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겠지요. 그리고 그러한 도둑질은 나쁘다는 것도 인정해야겠지요. 인정하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고정불변한 도둑놈이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그 사람도 도둑질을 안하고 살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서 무엇을 행함으로서 도둑놈이 아닌 다른 삶을 살도록 도외주는 것이겠지요. 도와주는 마음이 댓가를 바라거나, 우월감을 증명하기 위해서거나 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무런 댓가도 바리지 않고 오로지 타자가 좋은 사람이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행위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마음이 어떻게 하면 생기는가?입니다. 철학으로도 교육으로도 과학으로도 이런 마음을 생기게 하기는 부족해 보입니다.
아마도 이런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기적일 겁니다. 기적을 바라고 살아야겠지요.
자신과 다른 삶을 인정하는 것을 보통 ‘관용의 윤리’ 내지는 ‘똘레랑스’라고 합니다. 흄이나 롤즈의 윤리학이지요. 우리나라에는 홍세화선생님의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광범위하게 소개된 윤리이론입니다.
자신과 다른 삶을 인정하자는 ‘관용의 윤리’ 내지는 ‘똘레랑스’에서 논쟁이 되는 지점이 있지요.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도 바로 그 지점입니다. 바로 어느 선까지 인정해야 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살인’이나 ‘도둑질’을 자신과 다른 삶으로 인정하는 순간 ‘관용’ 내지는 ‘똘레랑스’는 파괴됩니다. ‘살인’이나 ‘도둑질’ 그자체는 이미 자신과 다른 삶에 대한 침해이니까요. ‘관용의 윤리’나 ‘똘레랑스’에서 관용의 기준이 생기는 것이지요.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이 바로 그 기준입니다.
자유의 인정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인정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삶에 대한 인정도 그 삶이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범위에서만 인정될 수 있겠지요.
똘레랑스. 홍세화씨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을 보면서 처음 알게된 단어입니다.
삐라를 뿌리는 기구를 날리고 프랑스에 망명을 해서 택시 운전기사로 생활하게 된 홍세화씨를 보며 참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부러움에 자면서 택시운전을 하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저 서로를 인정하고 마는 똘레랑스에 대해 뭔가 마음 한구석 불편함이 있습니다.
대동단결, 하나됨, 진리, 진실을 추구하던 나에게 똘레랑스는 서구유럽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 일종의 적당한 타협이거나 불의를 못 본척 하고 마는 비겁함에 대한 합리화로 느껴졌습니다.
그 후 삶의 현장에서 깨어지면서 노자의 드러내지 아니하는 말없는 실천을 추구하던 나에게 다시 공자의 “화이부동”이라는 말이 들어왔습니다. 화합하되 나를 강요하지 않음이라고 해석하면 될까요? 역시 또 똘레랑스의 불편함을 느꼈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나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관조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싸움의 연속이며 싸움은 깨어짐과 부서짐입니다. 나 하나의 안락을 위한 삶이 아니라, 적당히 타협하고 즐기는 삶이 아니라 깨어지고 부서지며 단련되는 삶,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부단히 반성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형은 부단히 실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기에 형의 철학이 실천을 위한 철학이 되기를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