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제도적 수준의 민주주의에서 평등해야 할 것은 ‘접근 가능성’이 아닌가 합니다. 국가운영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의 평등. 물론 고위 관료나 전문가들은 일반인보다 접근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또한 인정해야 겠지요.
다만, 보통 사람보다 접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의 결정이 다수의 의사와 괴리되어 있을 때, 이를 통제할 수 있느냐가 현실적인 접근 가능성의 관건이라 봅니다.
그럼 역시 다수의 지배가 옳으냐의 문제가 다시 등장하는데요, 다수의 지배가 옳다기 보다, 정치경쟁은 다수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겠네요. 오늘날 진보와 보수의 경쟁을 보면, 다수의 의사가 옳든 그르든 보수는 다수를 획득하는데 성공했고, 진보는 실패했다는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결국 진보는 헤게모니경쟁에서 패배한 것이죠. 그렇다면 대안도 역시 다수를 획득하는, 헤게모니 경쟁에 화두를 돌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주주의의 어떤 권리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흘린 투쟁으로 쟁취해왔다는 것
그 쟁취의 역사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 이라는 것
국가운영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결코 평등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평등하지 않다는 것
합리적 토론이란 것도 사회적 강자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여러 가지 답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완변한 답이라도 한 구석에는 문제점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영원히 인류 정치사의 과제일 수도 있죠.
그래서 저는 오히려 그러한 설득과 합의를 존중하면서도 추상적이지만 사람들의 감동을 주는 것도 포함해 보고 싶습니다. 포퓰리즘이 아닌 감동, 만족….
적어도 제도적 수준의 민주주의에서 평등해야 할 것은 ‘접근 가능성’이 아닌가 합니다. 국가운영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의 평등. 물론 고위 관료나 전문가들은 일반인보다 접근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또한 인정해야 겠지요.
다만, 보통 사람보다 접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의 결정이 다수의 의사와 괴리되어 있을 때, 이를 통제할 수 있느냐가 현실적인 접근 가능성의 관건이라 봅니다.
그럼 역시 다수의 지배가 옳으냐의 문제가 다시 등장하는데요, 다수의 지배가 옳다기 보다, 정치경쟁은 다수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겠네요. 오늘날 진보와 보수의 경쟁을 보면, 다수의 의사가 옳든 그르든 보수는 다수를 획득하는데 성공했고, 진보는 실패했다는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결국 진보는 헤게모니경쟁에서 패배한 것이죠. 그렇다면 대안도 역시 다수를 획득하는, 헤게모니 경쟁에 화두를 돌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주주의의 어떤 권리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흘린 투쟁으로 쟁취해왔다는 것
그 쟁취의 역사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 이라는 것
국가운영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결코 평등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평등하지 않다는 것
합리적 토론이란 것도 사회적 강자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현실이며 우리가 출발할 입각점일 듯 합니다.
자본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합리적 토론이라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효과가 있는지 요즘 의문이 많이 듭니다. 자기 정체성이라는 한계 내에서 이 합리적 토론은 대체로 구조화된 문제점을 은폐하고, 기존의 권력/헤게모니를 유연하고도 강고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설명은 아주 훌륭해서 눈물이 나옵니다.
하지만 후반 ‘설득과 합의’에서는 역시나 어려운 문제인 듯…
답이 없군요. 열심히 해 보자 아니겠습니까?
여러 가지 답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완변한 답이라도 한 구석에는 문제점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영원히 인류 정치사의 과제일 수도 있죠.
그래서 저는 오히려 그러한 설득과 합의를 존중하면서도 추상적이지만 사람들의 감동을 주는 것도 포함해 보고 싶습니다. 포퓰리즘이 아닌 감동, 만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