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드라마광’이다. 그렇다 해도 어떤 탤런트나 작가의 작품 연보를 줄줄이 외거나 드라마의 형식이나 내용을 분석하는 매니아 수준은 아니고 집에 있으면 그저 드라마를 보는 정도다. 원래는 김은숙류의 달달한 드라마를 좋아하지만(지금도 ‘응급남녀’를 빼 놓지 않고 시청 중이며 최근에는 ‘밀회’도 보기 시작했다) 요즘은 ‘정도전’에 빠졌다. 지난 일요일엔 최영과 이성계-사림 연합이 요동정벌을 놓고 본격적인 대결을 벌였다. 이인임을 몰아내기 위해 건곤일척의 연합을 이뤘던 두 세력이 분열한 것이다. 또한 정도전과 정몽주는 이성계에게 각각 ‘사(史)’와 ‘충(忠)’을 권함으로써 이후, 그들의 끈끈한 우정도 고려의 운명을 놓고 대립으로 돌변하리라는 것도 예고했다. 오호, 이합집산의 정치 세계로고…보통 역사드라마가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은, 온갖 고난을 뚫고 결국 승리할 역사적 주인공을 현재의 어떤 이,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14년 한국의 “정도전”은 누구고, 고려 말은 지금과 어떤 점에서 유사할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상당히 비슷하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를 추진할 때 난 병자호란을 떠올렸다. 명청 교체기에 ‘재조지은(再造之恩,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함)’을 내세워 명나라 편을 들다가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 때문이었다. 한편 드라마 정도전이 다루고 있는 시기는 원명 교체기이다. 이런 발상을 단순하게 반복한다면 이성계-사림의 외교론이 더욱 그럴 듯해 보일 수 있다. 또한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짓이라지만, 최영의 주장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검토해 볼 일이다. 어쨌든 양쪽 모두 격변하는 세계정세를 국내 정치에 이용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세계경제의 장기 침체와 글로벌 헤게모니가 흔들리는 가운데 유럽에서 극우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것도 그 때문일 테다. 지금 세계를 또 다시 ‘신냉전시대’로 몰고 갈 것인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 역시 이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EU와 러시아라는 양 강대국 사이에 있다. 이 사건은 EU를 향해 발길을 옮기던 우크라이나를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급격하게 러시아 쪽으로 방향을 돌린 데서 비롯됐다. 격분한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야누코비치를 러시아로 내쫓았고, 러시아가 크리미아 반도 인근에 군대를 출동시킨 가운데 크리미아 시민들은 압도적 지지로 러시아 합병에 찬성했다. 우크라이나 남쪽 끝에 있는 크림반도에는 러시아인들이 70%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스탈린시대에 쫓겨났던 타타르인들이 되돌아와 살고 있다. 1956년까지 소련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는 동쪽에는 러시아인들이, 서쪽에는 체코나 폴란드 쪽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여차하면 러시아가 동 우크라이나까지도 넘볼 수 있는 상황이다. 하여 우크라이나군은 혹여나 러시아에게 빌미를 주게 될까봐 순순히 크림반도에서 물러났다. 푸틴이 러시아 의회에서 크림반도의 합병을 선언하자, 미국이나 EU는 대러시아 경제봉쇄를 모색하고 있다. 과연 경제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 러시아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가 앞으로의 상황 전개를 좌우할 것이다. 러시아 쪽에서 보기에 시민봉기로 탄생한 키예프(우크라이나 수도)의 새 정부는 친미괴뢰정부일 테고, 미국이나 EU는 크리미아 사태에서 그 옛날의 ‘쉬데텐 위기’를 떠올릴 것이다. 1938년 나치가 ‘쉬데텐 지방’을 합병했는데 영국의 챔벌레인 수상이 뮌헨회담에서 이를 추인한 사태 말이다. 이후 나치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엉뚱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 촉각은 중국의 반응을 향했다. 브릭스의 일원인 푸틴의 러시아는 ‘유라시아공동체’를 내세워 서진하고 있고, 또 다른 브릭스 강대국 중국은 아시아의 동쪽에서 미국과 대립하고 있다. 이들은 아시아 대륙의 양 경계에서 기존 강대국과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 한 복판에 우크라이나도 있고, 한반도도 있다. 중국은 크리미아의 국민투표를 불법으로 규정하려는 UN 안보이사회 투표에서 기권을 했다. 중국이 티벳과 신장자치구를 고려한다면 크리미아의 국민투표를 인정해선 안 되지만, 미국과의 대립이라는 더 큰 구도를 생각한다면 러시아를 고립시켜도 안 되기 때문일 테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여차하면 중국이 개입할 수 있는 분쟁지역이 있다. 일본, 베트남 등과의 영토분쟁 뿐 아니라 아시아의 핵폭탄이 될 수 있는 한반도도 있으니 중국으로선 마냥 기존의 국제질서를 옹호할 수도 없을 것이다.물론 아시아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티벳이나 신장자치구가 중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강대국도 주변에 없고 일본이나 베트남이 우크라이나처럼 만만한 나라들도 아니며, 내부 개혁이 급선무인 중국이 한반도 상황의 급변을 바랄 리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우리 쪽에 약간의 시간이 있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10년 전에 푸틴이 다시 피터대제의 꿈을 꾸리라고 상상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TPP를 통해 중국을 압박하고 있는 미국의 경제력은 여전히 부실 투성이고(조만간 또 위기를 맞을 가능성마저 가지고 있다), 아베노믹스가 여지없이 실패로 드러날 경우 일본의 정치가 극우 쪽으로 더 기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베수상이 미국의 압력에 밀려 고노담화를 계승하겠다고 선언하고, 박근혜 정부가 베를린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것도 이렇게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한중 정상회담을 하기로 한 것은 정말 잘 한 결정이다. 지금처럼 어느 쪽 손도 쉽사리 들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일단 줄다리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원명 교체기, 또는 명청 교체기처럼 세계의 권력이 교체되는 시기이다. 적어도 미국의 경제력과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약화되는와중에 강대국들이 동아시아에서 암중모색하고 있는 상황임엔 틀림없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한미 FTA가 발효된 가운데 TPP에 가입하고 미국의 MD 구상에 찬성하는 것은 명백히 한 쪽의 손을 드는 짓이다. 러시아의 크리미아 합병에도 우크라이나의 EU 편입, 그리고 유럽의 MD 구상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미 수명이 끝난 규제완화에 목을 매는 박근혜 정부에는 기대할 게 별로 없다 쳐도 신생 ‘새정치연합’은 어떤 구상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의 정치, 그리고 학계에는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장조차 열리고 있지 않는 것일까? 원?명 교체기든, 명?청 교체기든 사건이 터져서야 갑론을박하는 우리의 선조들을 드라마로 보며 혀를 차다가 지금의 우리는 무에 그리 다를까, 한탄을 한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나라는 양 쪽이 다 동의할 수 있는 구상을 먼저 내 놓을 때만 자신의 시민들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글의 일부는 PD저널에 기고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