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개방의 소용돌이에 둘러싸인 중국의 단면을 묘사한 지아장커의 ‘플랫폼’이란 영화를 보면 정작 플랫폼은 등장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적소리를 들으며 여기를 떠나 어디론가 향할 수 있는 플랫폼을 꿈꾸는 사람들만 보여준다. 개방으로 인한 인민들의 혼란을 왜 ‘플랫폼’에 빗대어 풀어나갔을까?

<플랫폼, 또 하나의 아고라>
플랫폼에 오르는 사람은 주체다. 목적지가 있을 터이니 그렇다. 주체가 아닐 수도 있을까. 무작정 플랫폼에 오른 누군가를 떠올려 보더라도, 그는 차에 오를 것인지, 아니면 뒤돌아 밖으로 갈 것인지, 플랫폼에서 한 동안 미아가 될 것인지 선택을 해야만 한다. 결국 플랫폼에 오른다면 주체가 된다. 즉, 플랫폼의 매력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플랫폼의 또 다른 매력은 어떤 장소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면 또 다른 어디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주체가 개별적으로 길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깔끔하게 해결해주는 수단이 플랫폼이다. 그래서 플랫폼이 대중교통수단의 핵심요소이다. 따라서 싫든 좋든 플랫폼을 이용하면 군중과 마주하게 된다. 내리는 곳이 다르더라도, 그들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플랫폼은, 인파를 불러오기에, 많은 사람들의 이재(理財)를 자극하기도 한다. 한적한 승강장에도 하나 정도의 가판대는 마련되어 있고, 붐비는 역사의 윗공간에는 어김없이 판매시설이 들어선다. 자본만 눈독을 들이는 건 아니다. 무명예술가의 전시공간이나 공연장이 되기도 하고, 서명운동 같은 캠페인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정치의 장, 아고라의 재림이다.

역사가 흐르면서 플랫폼 자체에 직접적으로 정치적 의미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플랫폼(platform)의 어원을 좇아보면 라틴어인, 판(版)을 뜻하는 플라테(plate), 상(狀)을 뜻하는 포르메(forme)와 마주하게 된다. 말 그대로 판상(版狀), 평평한 것을 뜻한다. 여기에 점차 무대(stage), 연단(podium)이란 의미가 덧대어졌다. 움푹 파인 원형극장에서 유일하게 평평한 곳이 그 부분이기 때문이다.

무대와 연단은 무엇인가를 발표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공식적인 발표’라는 의미가 추가되고, 현대 영어에서 플랫폼은 ‘대외적 원칙, 정강, 정책’ 등의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승강장은 군중을 모으고, 무대와 연단은 청중에게 열린다. 플랫폼은 그 속성과 의미가 정치적이다.

<연구, 희망이라는 이름의 열차>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연구도 일종의 플랫폼이다. 앞에 놓인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어떤 연구자는 신자유주의라는 플랫폼에 올랐다가, 되돌아 나와서 사회적 경제라는 플랫폼에 올라 협동조합이라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표면적으로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연구라는 것은 어떤 플랫폼에 올라 궁금증을 해소해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그 속의 군중들과 부단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다.

연구가 대화라는 것은 그 결과물이 ‘논문(論文)’이라고 불리거나 ‘보고서(報告書)’라고 불리어지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들어줄 상대가 없는데 무엇을 논하고 알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인식을 하든, 못하든, 연구자는 결과를 가지고 플랫폼에 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연구자는 플랫폼 위 군중의 하나일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그의 성과는 애타게 기다리는 무엇일 수도 있다. 어디서 어떤 열차에 오를 것인가 만큼이나, 내 곁에 누구를 태우고 달릴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멀리서도 내 기적소리를 들으며 꿈에 부풀 사람들을 상상하며 연구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