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의료봉사 현장서 자주 들은 그 말 “I have no money…”

By | 2013-12-13T09:59:52+00:00 2013.12.13.|

지난11월 8일 필리핀 중부를 강타해 셀 수 없는 사상자와 이재민을 만들어낸 태풍 하이옌. 초기 긴급 구호팀이 들어가고 지금은 부서진 도로와 전신주 등을 고치는 일과 필요한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비교적 순탄한 도움이 제공되고 있다. 태풍 발생 20일만인 지난 11월 28일,본인을 단장으로 한 6명의 의사와 그외 의료진 및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열린의사회 일원은현지에긴급 투입됐다. 중서부의 섬에 있는 아클란(Aklan) 주에서 칼리보(Kalibo)시 인근의 바탄(Batan), 알타바스(Altavas), 발레떼(Balete), 리바카오(Libacao), 방아(Banga) 5개 재난 지역을 돌면서 긴급 구호 및 일상 진료를 실시했다. 아파도 병원 가기 두려운 이 곳낮 12시를 넘기고 점심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도 대기 환자가 70여명이 남았단다. 이러다가 오늘은 10분 밥 먹고 진료해야 하는 것 아닌지 걱정이다. 나야 다이어트 한다고 안 먹어도 되지만 다른 어린 친구들은 어떨까 모르겠다. 재빨리 점심밥을 먹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내가 소아 환자들을 맡았는데 아기들이 오래 기다리는게 안쓰럽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보다 먼저 진료를 시작하게 된다. 이 지역은 유난히 소아 진료가 많아서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물 마실 틈도 없고 의자에서 일어날 여유도 없이 일을 하다보니 엉덩이에 벌써 땀띠가 났다.”기침을 계속 해요.””얼마나 됐어요?””한 달이요.””한 달? 그러면 병원 갔었어요?””아니요.”두 돌이 채 안 되는 남자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와 대화를 하고 여기저기 살피고 나서 청진기를 댄다. 가슴 양쪽에서 분명하게 폐렴을 의심하게 하는 염발음(crackle)이 들렸다. “그럼 한 달이나 심하게 기침 하는데 왜 병원 안 갔어요?””I have no money.”심각한 내 말투에 비해 대답은 간결했다. 이런 곳을 여러 번 다녔던 경험으로 이제는 나도 대수롭지 않게 응하고 처방을 한다. 수 년 전 처음 개발도상국 진료를 갈 때만 해도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병원도 안 가고 가만 있었냐, 돈이 없어도 죽느냐 사느냐인데 왜 방치했느냐 따졌을 것이다. 이제는 안다. 가족 한 사람의 병을 고친다는 게 자기 가족 전체의 생계를 위협한다는 것을.해외 진료를 하다보면 아직도 이런 폐렴이나 지역 풍토병들이 생명 위협의 제1요인이다. 그래서 나는 열린의사회 사무국에서 준비하는 것 외에 아이들에게 쓸 약들을 따로 더 준비하게 된다.”폐렴은 위험한 병이니까 절대 약 끊지 말고 끝까지 복용시키세요.”신신당부하면서 아이를 안은 엄마를 보낸다. 왜냐하면 증상이 좋아지면 아껴서 나중에 먹이려고 중단해버리기 때문이다. ▲ 현지에서 진료하는 장면. 하루 6명의 의사가 500여 명씩 진료해야 한다.가장 걱정되는 것은 아이들과 산모들다른 열대지역 진료를 할 때처럼 이곳도 감염병이 많지만, 피부질환도 너무 많다. 특히 아이들이 오염된 손톱으로 살을 긁다보니 세균 감염으로 고름집이 잡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런 아이들이 올 때마다 나는 우선 작게 살을 째서 배농시키고 단단히 드레싱 처치를 한 후 항생제와 소독약을 준다. 하루에도 5~6명 아이들의 고름을 짜내야 했다. 발에 생긴 찢어진 상처, 소독이 안 돼서 생긴 고름집, 피부 염증 등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율라(필리핀에서는 태풍을 이렇게 부름)’가 불어닥친 이후에 생긴 것들이라고 한다. 이후 20여일이 지나도록 치료받을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고.한 아이의 피부를 째서 고름을 짜내고 나서 허리를 펴 땀을 닦으려고 일어나 보면 저 멀리에서 환자들 수술로 고개 돌릴 시간도 없이 바쁜 정형외과 박영근 선생이 보인다. 오전에 수술 몇 번 했더니 인근 지역 사람들이 다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한 명 돌려보내지 않고 계속 봐주는 박 선생님이 이번 진료 기간 중에 가장 힘든 일정을 보내는 것 같다.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 한방 진료 쪽은 쉴 새 없이 몰려드는 환자들로 정신없긴 하지만 그래도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쯤이면 어느 정도 일을 마치게 된다. 하지만 산부인과 진료는 우리가 짐을 다 꾸리고 나도 계속 진료를 봐야 한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진료과목이다. 초음파로 태아 상태를 봐야 하는 산전진단을 여기서는 꿈도 꾸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번 봐주면 이 곳 산모들이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가곤 한다. 부인과 질환도 마찬가지다. 산부인과 박정화 선생이 대기 중인 사람들 진료를 마치고 정리를 하려는 순간 한 여자가 찾아와서 자기도 봐달라고 사정을 한다.“무슨 일로 오셨어요?”“배에 혹이 있어서 왔어요.”내가 우선 그 여자의 배를 만지면서 간이나 다른 쪽의 문제는 없는지 살핀 후 천막이 처진 진찰실로 보냈다. 아랫배 쪽에 겉으로도 크게 만져지는 큰 혹이 있어서 산부인과 박선생은 다시 장비를 풀어서 초음파로 그 여자의 배를 훑었다. 우리가 추측한 것은 자궁근종이거나 부인과쪽 암이었지만, 대장에 생긴 혹이었다. 진찰은 하더라도 여기서 우리가 더 할 일은 없다.“언제부터 혹이 만져졌어요?”“1년쯤 돼요. 점점 커졌지만 병원에 가면 너무 비싸서 검사도 못해봤어요.”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I have no money.’이다. 초음파 결과를 말해주면서 힘들더라도 꼭 종합병원에 가서 CT 등 검사를 받아보시라고 신신당부하고는 마저 짐을 꾸렸다. 주섬주섬 의료장비를 챙기는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지만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한 때 우리나라에 장충체육관을 지어 주거나 여러 지원을 할 정도로 동아시아의 선진국이었던 필리핀의 현실을 눈앞에서 보고 있노라니 무엇이 문제인지 혼란스러웠다.현지 책임자들과의 인터뷰나는 의료 지원을 나가게 되면 항상 그 나라, 그 지역의 의료체계에 관심이 많아서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자세히 현장의 상황을 조사하는 버릇이 있다. 어제와 오늘은 현지에서 짬을 내어 책임자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각 지역의 피해 상황과 어려움 및 이번 태풍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소중한 기회가 됐다.필리핀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그 섬들을 크게 3지역으로 나누는데, 수도 마닐라가 있는 북부는 루손(Luzon)섬 지역, 섬들이 많이 모여 있는 중부는 비자야(Visayas) 지역, 남부는 민다나오(Mindanao) 지역이라고 부른다. 이번 11월 8일 불어 닥친 태풍 하이옌은 바로 중부의 섬들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필리핀은 일 년에 20~30개의 태풍이 발생하지만, 거의가 북태평양을 건너며 강해지는데 발생지인 이곳에서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아서 처음 태풍이 생겨났을 때 모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단다. 발생하자마자 엄청난 세기로 돌변하게 되어 지금처럼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우리가 여행지로 잘 알려진 세부, 보라카이가 모두 중부 지역에 있다. 태풍이 휩쓸고 가자마자 세계 언론은 모두 태풍의 첫 도착지인 레이테(Leyte)섬의 피해 상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 도시인 타클로반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곳이 되었고, 자연스레 많은 구호물자와 의료 지원도 그 곳을 중심으로 보내지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간 중부 지역의 섬들 중에 레이테 섬뿐만 아니라 제주도보다 훨씬 큰 4개의 섬들이 모두 치명적인 피해를 받았고, 그 중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곳은 레이테 섬이 있는 동부 비자야 지역과 우리가 의료지원팀으로 오게 된 서부 비자야 지역이다. ▲ 필자와 인터뷰하면서 현지 상황을 주고 받는 아클란주 콰천 보건의료국장.필리핀 현지 진료를 하는 것도 이제 이틀 후면 끝나게 된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가 가고 나면 이들은 또 어떻게 병을 이겨낼 것인가 걱정이 된다. 우리의 현지 진료를 도우면서 다니는 곳마다 진료 장소나 물품들을 잘 준비할 수 있게 총 지휘해준 이 곳 섬의 아클란(Aklan)주 보건의료국장을 만나 상황도 듣고, 이후 대책도 들어보기도 하였다. 필리핀은 행정 조직이 17개 지방(Region), 80개 주(Province), 117개의 시(City), 1,501개의 지방 자치체(Municipality, 한국의 군(郡) 수준), 41,982개의 마을(Barangay, 바랑가이)로 나뉘는데, 우리가 다니는 곳은 아클란 주에서 피해를 많이 본 지방자치체 5곳이라고 한다. 각 지방자치체마다 약 2만 5천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있고, 전부는 아니지만 각각 보건소격인 병원이 있으며 4~5명의 의사와 여러 조산사들과 간호 인력들이 있다고 한다. 지방자치체는 또 5개 안팎의 보건지소와 같은 곳이 산재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의사가 없이 조산사와 간호사만 있다. 우리 같으면 제주도에 보건소 하나와 의사가 없는 보건지소 5개 정도 있는 셈이니 가뜩이나 길이 안 좋은 이들에게 의료 접근성이란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였다. 의료보장성도 20% 수준(선진국 85%, 한국 61%)이며, 의사 수도 현저히 부족한 상태로 넓게 퍼져 있는 섬나라 필리핀의 보건의료를 만족시키기는커녕 필수 의료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대화를 나누던 말미에 보건국장은 필리핀이 계속 보건의료 발전을 위해 노력을 하겠지만 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지속적으로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부탁을 하였다. 나는 얘기를 나눈 후에 우리가 필리핀 전체를 담당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지역을 맡아 의료 지원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게 된다. 한국도 7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지원을 했었고, 더욱이 많은 의사들이 강화도나 거제도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지역 보건의료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도우지 않았던가?봉사, 그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곳에 가는 것뿐대단한 의료 인력이 온 것도 아닌데, 멀리서 찾아오고는 몇 시간씩 기다리다가 진료 받고 가면서 너무 고마워한다. 그 이유가 병원 가서 진료 받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이다. 사람들은 연고 하나, 영양제 하나 주는 것만도 너무 좋아한다. 피부병이 많은데 긁다가 고름집이 잡혀도 약을 못 쓴다. 우리나라 같으면 작은 뾰루지만 생겨도 당장 병원 가서 싼 값에 진료 받고 약을 얻었을 텐데…..죽을병이 있어도 병원 가기 두려운 사람들이 널렸다는 것이 현재 필리핀뿐만 아니라 지구의 절반 넘는 인구가 겪는 고통이다. 의료 수혜의 형평성을 이루자고 선언(알마아타 선언)한 것이 35년이 지났는데 말이다.여기는 태풍 하이옌이 휩쓸고 간 지역 섬 중 하나이다. 이제야 전기 복구니, 도로 보수니 움직이고 있지만 부서진 집들은 모두 개인이 복원해야 한다. 밥도 자신 가족들이 해결해야 한다. ▲ 필리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대나무와 야자잎으로 덮은 집들은 대부분 형체도 없이 날아가버렸다.특히 우리가 간 지역인 중서부 섬은 언론에 많이 알려져서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해외 지원이 많이 되고 있는 타클로반과 달라 지원도 없고, 의료진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피해를 입었는데.그래서 필리핀 정부에서도 한국 공병대 500여 명이 파견될 때 우리가 온 지역으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우리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도 같은 지역인 아클란(Aklan) 주에 오게 됐고.태풍이 급습한 지 한 달이 지나면서는 긴급한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결되고 있는 듯 하나, 많은 주민들이 파괴된 집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돌아올 지, 안 돌아올 지는 모르겠으나 이동하며 눈에 들어오는 상황들을 보면 복구 자체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한 것 같다.여기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을 지라도 온 힘을 다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가고 싶다. 진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쉴 때 자원 봉사자로 온 대학생이 물었다. 그의 손에는 어디선가 얻은 산 미겔(San Miguel) 맥주가 들려 있었다.“단장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데를 오세요? 진료봉사를 자주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글쎄. 국내건 국외건 정말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일을 하고 싶은 거겠지. 사실 봉사라는 것은 별거 아냐. 내가 잘 나서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원하고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내 마음이 참지 못 하는 것 뿐. 그럴 땐 참지 말고 질러야 하는데 용기가 없어서 그래. 한 번 하면 마약 같아서 계속 가게 돼. 환청처럼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정말이다. 난 아직도 몽골의, 스리랑카의, 캄보디아 아이들의 눈망울과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필리핀으로 긴급 의료지원을 오게 돼서 이번에는 내 마음에 불을 당기는 나라가 하나 늘었다. * 본 글은 보건의료 대안매체 라포르시안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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