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이었을 게다. 탤런트 지진희씨가 주연한 KBS 2TV <결혼 못하는 남자>가 ‘초식남’이라는 용어를 사람들 입에 떠돌게 만든 것은. 2006년 일본의 칼럼니스트 후키자와 마키가 처음 사용한 말이라는데 “마치 풀을 뜯는 사슴처럼 남자다움에 구애받지 않는 온화한 남자를 가리키는 신조어”란다. 한 쪽에서는 어린 아이돌의 ’식스팩‘ 복근에 환호성을 올리고, 그 반대쪽에선 훨씬 많은 초식남들이 늘어가고 있다.최근 영국 옵저버지 10월 20일자에 “젊은이들이 섹스를 중지했다면 그 나라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아비가일 하워스)라는 글이 실렸다. 이 르포가 소개한 일본의 한 연구에 따르면 현재 20대 초반의 일본인 4분의 1은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이들이 아이를 갖지 않을 가능성은 40%라고 한다. 이제 초식남’ 현상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일본 가족계획협회에 따르면 올해16~24세 일본 여성의 45%가 “성적 접촉에 관심이 없거나 경멸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니 말이다.정말 인간은 생물의 진화법칙을 벗어난 것일까.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생물은 자신이 살아남고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예컨대 서울의 대기오염이 심각해지면 남산 위의 소나무들은 솔방울을 주렁주렁 매단다.국제노동기구(ILO)의 이상헌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의 경우 1993년의 평균 임금 수준이 지난 20년 동안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더구나 노동자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비정규직은 30대에 받는 임금이 평평한 고원처럼 40대 까지 이어지다가 50에 못 미쳐 내리막 길로 접어든다.하여 “미래에 대한 약속은 접고, 결혼과 가족의 몽상은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초식동물 증후군은 ‘슬픈 합리성’의 결과라는 게다. 하지만 인간도 소나무의 법칙을 따른다면 이럴수록 아이를 더 많이 낳아야 하는 건 아닐까. 새로운 진화법칙이라도 생긴 것일까.<결혼 못하는 남자>가 그러하듯 한국의 드라마나 연예 프로그램은 일본 것을 베끼는 경우가 꽤 있다. 현재의 일본 사회는 대략 10년 후의 한국을 보여주기 때문일 게다(그 시차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서로 다른 사회로 갈라져 나가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지만). 일본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합계 출산율도 점점 떨어져서 1.2명 정도까지 떨어졌다. 두명이 한명 남짓한 아이를 낳는다는 얘기니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필연이다.이런 현상의 원인은 확실해 보인다. 과거처럼 가능한 한 많이 낳아서 설령 몇이 죽더라도 남은 아이의 숫자를 최대화하려는 전략은 이제 똘똘한 놈 하나로 승부하는 전략으로 바뀌었다. 예컨대 우리의 교육현실에서 셋을 낳으면 이들은 모두 대학 입시경쟁에서 실패할 지도 모른다. 만일 승자독식의 사회라면 세명의 자녀는 ‘사느니, 죽느니만 못한 루저’가 될 것이 틀림없다.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은 자연선택의 법칙이 아니라 자본의 운동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업은 ‘참조 수익률’(대략 평균 수익률)을 기준으로 자본 증식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다. 2000년대 초중반처럼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의 수익률이 높다면 실물투자에 대한 흥미는 반감될 것이다. 또 지금처럼 미래가 불확실할 때는 투자를 미루고 미뤄서 침체가 더 길어지기 일쑤다.만일 우리의 ‘생존 기준’이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손을 늘리는 게 아니라 ‘위너’가 되는 거라면, 그리고 부의불평등이 극심해서 그 위너의 기준이 평균 소득보다 훨씬 높다면 어떻게 될까. 존재해야 마땅한 그 자식을 위해서라도 섹스마저 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만일 공동체적 유대가 살아 있는 사회라면, 또 기본적인 사회복지가 잘 갖춰진 사회라면 ‘루저’가 존재하지 않거나 설령 그리 된다 해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사랑과 결혼, 출산을 위해서라도 사회의 불평등을 줄여야 하는 게 아닐까. 위너와 루저의 경계가 흐려진다면 우리는 자본의 법칙이 아니라 다시 자연의 법칙을 따르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위너와 캔디만 등장하는 드라마 또한 한번 더 생각해 볼 문제일 테다.*본 글은 PD저널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