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여의도’를 본다

By | 2013-10-15T10:58:36+00:00 2013.10.15.|

경북 안동 병산서원의 부드러운 곡선과 여위어가는 강줄기, 그리고 영주 부석사 안양루의 날렵한 기와, 욕심을 한껏 부린다면 봉정사까지 그리운 때가 왔다. 단풍이 짙어지는 만큼 선량들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보좌관들은 부산해진다.바야흐로 국정감사와 예·결산 심의의 계절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다. 지난 9월30일 미국 의회는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셧다운, 즉 정부 폐쇄다. 10월17일까지 정부 부채상한선 인상에 합의하지 않는다면 미국 정부는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진다.17년 전, 미국의 마지막 정부 폐쇄가 있었던 그때 나는 미국에 있었다. 실리콘밸리를 연구하기 위해 국가로부터 돈을 받은(문민정부의 ‘세계화’ 전략의 일환이었다), 버클리 대학의 방문학자였다. 비자 문제로 이민국에 들락거려야 했던 나는 그 수많은 창구 중 단 두 개 열려 있는 창구 앞에 온종일 줄을 섰다. 바쁘고 돈이 없기도 했지만 국립공원마저 문을 닫아서 짬짬이 여행을 한다는 건 그저 꿈이었을 뿐이다. 이것이 정부 폐쇄다.1980년대 이래 11차례의 정부 폐쇄, 또는 그 위협은 정부·여당의 상당한 양보를 끌어냈다. 2011년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굴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1995년의 마지막 폐쇄는 호경기 때 일어났다. 경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나아가 공화당의 과잉 행동은 클린턴의 재선으로 이어졌다. 지금 미국 경제는 침체의 수렁에서 깔끔하게 벗어나지 못한 채 양적 완화라는 대량 수혈에 기대고 있다. 오바마 또한 이미 재선에 성공했기에 자신의 업적인 건강보험 개혁법(오바마케어)의 예산을 줄일 리 없다. 따라서 만일 이 사태가 상당 기간 지속된다면 당장 정부 지출의 축소부터 미국 경제의 숨통을 죄기 시작할 것이다.디폴트는 바깥 사람들한테 빚 얻어서 흥청망청 잘살고 난 뒤 “나 돈 없으니 배 째라”고 하는 선언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마치 29만원밖에 없다던 한국의 어느 노인처럼 돈 없다고 나자빠지는 꼴이다. 위력이 현저히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달러는 여전히 세계의 기축통화이고 미국 재무부 증권은 마이너스 실질금리일 때도 너도나도 구입할 만큼 안전하다. 디폴트 사태는 이런 믿음을 뒤흔들 것이고 세계경제라는 배의 닻은 바다를 떠돌게 된다. 도대체 세계경제를 담보로 공화당, 더 정확히 말해서 공화당의 일부 과격파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들은 재정건전성을 내세워 오바마의 의료개혁을 원점으로 되돌리려 한다. 과연 이런 행동을 미국 유권자들, 나아가서 세계의 시민이 용납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런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다. 티파티의 지지에 힘입어 상원에 처음 입성한 테드 크루즈 의원도 그중 하나라고 영국 <텔레그래프>의 존 애블런은 말한다. 정치는 이렇게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아끄는 형국이다. 물론 정치와 경제는 언제나 얽혀 있다. 경제는 정치의 일부일 뿐인데 시장의 1원 1표 원리는 부자 편 결론을 내기 마련이다. 지난 30년 동안 시장에 모든 걸 맡겨놓자는 주장이 세상을 지배한 결과, 즉 사실상 지배계급의 전횡을 방치한 결과 대다수 나라에서 불평등이 극심해졌고 세계는 위기에 빠졌다. 정치의 1인 1표 원리가 부와 권력의 집중을 막아서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공약보다 축소된 복지 예산, 여전히 많은 ‘토건 예산’한국에서는 국회가 정치 본연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보면 한국 정치 역시 경제를 살리는 쪽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역대 최초로 100조원 복지시대(105조9000억원)를 열었다고 자랑하지만 절반 이상이 공적연금 증가, 건강보험 국고 지원 등 자연증가분이다. 오히려 기초연금과 4대 중증질환 본인부담액, 반값 등록금, 무상보육 등 복지 관련 정책들의 예산은 대선 공약에 비해 줄줄이 축소됐다.한편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은 금년에 비해 4.3% 감소했다고는 하지만 액수로는 여전히 23조3000억원에 달한다. 2008년 본예산 19조6000억원이었던 SOC 예산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23조~25조원으로 정착한 셈이다. 국토와 강을 얼마나 더 훼손해야 경제가 활력을 찾을 수 있다는 걸까?한국이나 미국 어디에서나 예산안 공방은 경제와 정치가 직접 어우러지는 현장이다. 특히 장기 침체 속에서 헤매는 지금, 정치는 더욱더 경제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병산서원·부석사·봉정사의 가을은 여의도에서 국민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을 만큼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 *본 글은 시사인에 게재된 원고임을 밝힙니다.

   댓글을 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