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열심히만 살면 된다’는 착각

By | 2013-05-14T14:24:45+00:00 2013.05.14.|

창밖으로 봄볕이 따사롭지만 지난달만 해도 널뛰는 날씨에 아침마다 옷 고르기가 힘들었다. 이런 한가로운 투정이 무색하게 우리 모두 공유하는 지구는 몸살을 넘어 중병을 앓고 있다. 개인은 개인대로, 공동체는 공동체대로, 그리고 나라는 나라대로 지금처럼 에너지를 소비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면 인류는 21세기에 절멸할지도 모른다. 노벨 화학상을 받은 파울 크뤼첸의 제안으로 학자들이 현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로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불과 10여년 전 우리 모두 새천년의 희망에 들떠 있었는데 말이다.지구 온난화와 같이 각 개인이나 국가가 각각 자신을 위한 행동만 한다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사회적 딜레마라고 부른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보이지 않는 손”(경쟁 가격)이 자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경제학의 금언과 달리,우리 주위는 사회적 딜레마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사교육은 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에 속한다. 아이의 미래를 위한 경쟁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하다. 사교육비는 하늘로 치솟고 몇 년 전 까지는 학원가가 있는 지역의 집값도 함께 올라갔다. 상위 몇 퍼센트만 승자가 되는 이 경쟁에서 대다수 아이들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끝없는 경쟁은 사람들을 극도의 불안에 몰아넣고 개인의 방어기제가 이 스트레스를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면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로버트 프랭크의 책 <경쟁의 종말>에서는 이를 “무한 지위 경쟁”이라 부르는데, 개인뿐 아니라 종 전체를 자멸로 이끌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사회적 딜레마가 곳곳에 가득 차 있다는 데 있다. 공공재 문제, 공유지의 비극, 팀생산의 딜레마 등 개인의 무임승차가 전체의 안녕을 훼손하는 모든 문제가 여기에 속한다. 해법은 경쟁이 아닌 협동에 있다. 나의 협동은 남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눈이 벌건데 남을 믿으라니, 그건 자살 행위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보잘것없는 인류가 이다지도 번성한 것은 협동을 제일 잘하는 종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200만년 이상, 공유와 협동의 지혜로 위기를 헤쳐 왔다. 지난 200년만 사유와 경쟁을 강조했고, 특히 최근의 30년 동안은 아예 전 사회를 경쟁과 시장의 원리로 조직하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2008년 이래의 세계 금융위기, 그리고 생태위기라는 파국의 벼랑 끝에 서 있다. 협동의 경제학은 물론 시장에도 적용된다. 최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부쩍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예컨대 기후온난화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세를 매길 수 있고, 사교육을 금지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서 보편복지에 의해 경쟁의 폐해를 완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20세기는 시장과 국가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지금 한국에 불고 있는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열풍은 공동체, 또는 시민사회 차원에서 스스로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사회적 경제는 내수와 일자리 창출의 유력한 방식이며, 또한 양극화로 지친 사회를 끌어안는 따뜻한 공간이기도 한다. 요컨대 협동은 인간의 본성인 동시에 한국 사회의 위기를 치유하는 유력한 수단 중 하나이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기고된 글입니다.

   댓글을 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