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녹슬지 않은 것이 없다!” 2003년 봄, 나는 대통령의 동북아비서관 자격으로 국회 건교위 의원들과 버스로 휴전선을 넘었다. 여의도에서 1시간 남짓, 일산에서는 불과 30분이었다. 군인들이 동원돼 공사하는 도로를 지나 인가가 나타났을 때 내 첫 느낌이 그랬다. 키 작고 얼굴 까만 아이들이 하얀 이를 드러내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 가슴에서부터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당시 공단부지는 그저 논과 밭이었다. 안내를 맡은 북한 담당자는 “개성공단을 건설한다고 우리 농민들이 밭도 갈지 않았는데 이게 뭡니까?”, 하소연했고, 민화협 관계자는 “삼성은 왜 안 들어온답니까? 재벌들이 들어온다면 남포까지 공단을 확대할 것”이라고 했다.개성공단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 남북 정상회담’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70년대에 머물러 있는 나라가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을 터, 한나라당 의원들도 점심상의 대동강 송어회 앞에서 개성공단 사업을 앞장서 추진하겠노라 호언했다. 2003년 여름 개성공단은 첫 삽을 떴고 2004년 말 1호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성공단은 남북의 희망이 되었지만 2008년 이명박씨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모든 사업은 동결됐고 그예 영구 폐쇄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이런 결과는 이명박 정부의 상호주의 논리에 이미 내재돼 있었다.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분명히 남북관계를 이렇게 볼 수 있다)에서 최선의 전략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TFT전략), 즉 상호주의가 맞다. 처음에는 협력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협력하면 나도 협력하고 배반하면 배반으로 응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의 취약점은 어떤 계기로 양쪽이 모두 배반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 다음부터 영원히 상호 보복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하여 게임이론은 악순환을 막기 위해 어느 한쪽이 협력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가르친다(GTFT, 관대한 TFT). 아무래도 여유있고 잃을 게 더 많은 우리가 그래야 할 것이다.나는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잠정 폐쇄를 비판할 생각이 없다. 우선 국민의 안전을 생각해야 하니 당연하고, 어쩌면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북한의 배반을 응징하기에 적당한 전략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협력의 이익을 늘리지 않는 한 북한은 남북관계를 치킨게임으로 인식해서 ‘미친 놈’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적당한 시점에, 적절한 크기로 관대함을 보여서(GTFT), 서로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북한도 살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사슴사냥게임).그것이 바로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나아가서 북한 정권에 가장 큰 관대함은 정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미국이 존재하는 한 한국이 독자적으로 북한의 정권을 보장할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북한은 “우리 민족끼리”를 내팽개치고 미국과의 치킨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미친 놈’의 위협이 통하기에 워싱턴은 너무나 멀리 있다. 결국 우리 스스로 나서서 미국을 설득하고 중국이 동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남북이 먼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동시에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더 길게 보면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중립 지대가 돼야 한다. 중국의 패권도, 미국의 패권도 원하지 않는 나라들의 동맹을 남북이 함께 주도해야 한다. 일본, 아세안, 러시아, 나아가서 인도도 동의할 것이다.중국의 패권에 휘둘리지 않고 동시에 미국도 견제해야 한다. 남북이 G2의 어느 한편에 서서 대리 충돌을 하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과거 미국과 소련이 ‘제3세계’에 경쟁적으로 구애했던 것처럼 중국과 미국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돼야 비로소 열리는 길이다. 선죽교를 건너면서 북한 관계자를 넌지시 떠봤다. “역시 군부 강경파가 문제죠?”, “남한의 국회도 마찬가지잖아요?”가 그의 답이었다. 다시 어느 화창한 봄날에, 개성박물관에서 고려시대의 유물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고 싶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