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지구촌이 대선의 계절인 것 같다. 특히 한반도 이해관계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많이 선거를 치른다. 지난해 12월, 북한 지도자의 사망으로 지도부 교체가 시작되더니 올해 1월에 대만 총통선거가 있었고 3월에는 러시아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11월 6일에는 미국 대선이 있고, 11월 8일부터 중국 18차 당대회가 열린다. 11월에 이른바 G2 국가의 지도자를 다시 확정하는 행사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2월 19일 우리 대통령 선거가 있다. 2013년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경제적 지형이 다양한 방향으로 변화하거나 곡절을 겪을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되고 있다 할 것이다. 이렇게 상당한 환경변화가 예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대선 후보들 사이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새로운 정책 비전은 거의 나오지 않고 있어 유감스럽다.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가 4대 성장론 안에 ‘평화적 성장’이라는 화두를 넣어 놓고 있고, 안철수 후보도 ‘복지, 정의, 평화’라는 가치를 자신의 비전으로 제시하기는 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있다. 이 와중에 기껏 논쟁으로 부각되고 있는 한반도 이슈가 북방한계선(NLL) 관련 ‘선거용 북풍’이라는 것이 한심스럽다. 지난 10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새 천년을 열면서 6.15공동선언이 발표되고 남북사이의 교류와 협력이 크게 신장한 것도 중요한 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동아시아가 중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확립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일단 남북한이 그러하다. 10년 전만 해도 절반이 안 되던 북한의 대중무역 의존도는 2010년 처음으로 80%를 넘어섰고 작년에는 무려 89.1%를 기록했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숫자다. 남쪽도 예외가 아니다. 10년 전까지는 수출의존도가 10%정도에 머물렀지만, 지금은 홍콩을 포함하여 30%가 중국수출이다. 미국과 유럽, 일본을 합친 숫자보다 많다. 지금 한국경제 성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것은 중국에 대한 수출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경제가 중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 전체도 마찬가지다.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나 유로 통화권처럼,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공식적인 경제 공동체는 아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서 역내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40%가 넘는다. 한국의 경우도 중국 수출 30%에 아세안 수출 15%이상 등을 합치면 절반의 수출은 동아시아에서 소화된다. 또한 이미 3조 달러가 넘어선 중국 외환보유고와 일본의 1조 달러, 그리고 우리의 3천억 달러 외환 보유고 등 5조 달러가 넘는 막대한 외환도 동아시아에 있다. 사실상의 위력적인 자연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의 협력과 통일을 향한 길은 이제 미국 이상으로 중국과의 관계라는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고립적인 남북 경제협력과 통일로의 발전은 이제 점점 더 비현설적 전망이 되고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의 형성과, 남북 경제 공동체의 형성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경제 협력과 중국을 핵으로 한 동아시아 경제 협력이 상호 보완적으로 동시에 추진될 때 현실적이고 의미 있는 실행 전략들이 도출 될 것이다. 이는 이제까지의 남북경제 협력 구상이나 동아시아 협력 구상을 다시 재검토해서 새로운 구상과 전략 틀을 짜야 함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아직 대선 후보들이나 정당들에서 새로운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새로운 전략 틀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서 최근 유로 통합과 위기는, 21세기의 국가 간 공동체 형성과 연방 구성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상당히 다양한 시사를 던져준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짚어보자. 첫 번째는 민주주의 문제다. 각 국가 사이에 경제, 정치, 사회적 통합과정을 밟아가면서 얼마나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할 것인가와 함께, 각 국가의 시민들이 유럽의회나 유럽 집행위원회와 같은 통합된 대의기구를 통해 민주적 의사를 수렴하는가 하는 문제다. 특히 독일 시민과 프랑스 시민, 그리고 그리스를 포함한 남유럽 시민들의 민주적 의사를 어떻게 유럽연합 차원으로 수렴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유럽위기 상황에서 그리스나 스페인 등 남유럽 시민들의 민주적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고 독일과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 있는 유럽연합 집행위나 유럽 중앙은행이 일방적으로 남유럽 시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유럽에서는 재정적자가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적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 유럽 통합이 아니라 각 국가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유럽 통화동맹의 해체로 이어지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비판적인 안목으로 세계화를 접근해온 선두주자이자 하버드 대학 케네디 스쿨 국제정치경제학 교수인 대니 로드릭(Dani Rodrick)은 유로 존이 당면한 구조적 문제를 ‘세계화와 민주주의, 주권의 트릴레마’로 분석하고 세 가지 모두를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상당히 다양한 시사를 주는 내용인데 그의 주장을 조금 길게 인용해보면 이렇다. “미국의 사례가 말해주는 것에 따르면, 플로리다, 텍사스, 캘리포니아, 그리고 다른 미국의 주정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주권을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시장통합을 하면서 민주주의를 살려내려면 (미국 연방정부처럼) 대표성과 책임성이 담보된 초국가적 정치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세계화가 각 국가의 국내적 정책을 우선 시행하는 권한을 제한하면서도 그를 보완할 수 있도록 지역과 글로벌 차원에서 민주적 공간을 확장해주지 않을 때, 민주주의와 세계화 사이의 갈등은 심화된다. 스페인과 그리스에서의 정치적 불안정이 말해주듯이 유럽에서는 이미 이런 한계를 넘어서 잘못 접어들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정치적 트릴레마가 착목하려는 지점이다. 우리는 세계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국가 주권을 동시에 확보할 수 없다. 우리는 셋 중에 두 개를 선택해야 한다. 유럽 지도자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싶다면 정치적 동맹이냐 경제통합 해체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들이 명시적으로 경제 주권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자국 국민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경제주권을 사용하든지 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 (주권을 유로 차원으로 위임한다는 사실을)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설명을 해주고, 민족국가 수준을 넘어선 유로 차원의 민주적 공간을 구축하는 것을 수반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각 국가들이 통화와 재정 정책을 펴도록 하기 위해 유로 통화 동맹을 포기하는 것이다.”(대니 로드릭, “주권에 관한 진실:The Truth About Sovereignty”, 2012.10.8) 우리의 경우라고 예외가 될까? 남북한 협력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는 남과 북의 각 정치 지도자들이 민의를 충분히 반영하고 민주적 의지를 수렴해서 협력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직 남남 갈등을 조성하는 유치한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현재의 우리 모습이지만 향후에 통일기구와 같은 것이 만들어지게 되면, 그런 기구가 남과 북의 민주적 의사를 어떻게 공평하게 반영할 것인지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가 될 것임을 지금 유럽의 경험에서 읽을 수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국가 사이의 공동체 형성에는 민주주의와 주권의 문제가 민감하게 다가온다. 두 번째로 신자유주의와 경제 공동체에 대한 문제다. 효율적 시장가설에 따라 오직 시장의 원리와 수익의 원리만을 가지고 사회를 조직하고 경제 공동체를 조직하려는 것이 신자유주의다. 이미 체결된 한.미 FTA, 그리고 추진 중인 한.중 FTA가 전형적으로 신자유주의 논리에 따른 경제 협력 모델이다. 그런데 사실 유로 통화동맹 형성도 이런 맥락의 산물이었다. 물론 지금의 유로 통합 구상은 2차 대전 직후부터 시작된 오래된 것이었다. 그 동안 유럽의 경제 공동체나 통화협력, 그리고 정치 군사적 차원에서의 다양한 실험들을 축적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동구 사회주의 붕괴 이후 추진된 유로 통화동맹 형성 자체는 철저히 신자유주의적 발상의 산물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통화체제에 관한 세계적인 전문가인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은 유로 통화동맹이 기본적으로 ‘하나의 시장, 하나의 통화’라는 구호아래 상품, 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유럽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이었다고 평가한다. 실제 1980년대 이래 약화되어온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유럽은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유럽연합을 결성하기로 하고 1999년 통화동맹을 만들면서 유로화 체제를 출범한다. 그 결과 현재 27개국이 유럽 연합에, 17개국이 유로 통화동맹에 가입했다. ‘하나의 시장, 하나의 통화’라는 구호아래 상품, 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유럽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는 ‘유럽 연방주의’ 이상을 실현하여 전쟁을 방지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자유 시장’을 통해 경제를 도약시키려는 의도가 컸다. 그러나 규제 없는 자유시장과 시장의 자기조절 메커니즘이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에서 붕괴된 것처럼, 상품과 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에 의해 유로 회원국가들 사이의 경제력 격차를 줄이고 하나의 통화로 경제권을 묶으려던 유럽식 자유 시장 실험도 기본적으로는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의 유럽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우리도 향후 남북 경제협력이나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 모두에 있어서, 시장의 효율 논리만을 앞세운 접근법에서 기본적으로 탈피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새사연(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은 한.미 FTA나 한.중 FTA와 같은 신자유주의적이고 구시대적 통상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리고 “공공경제와 사회경제에서의 교류도 함께 일어나야 한다. 각국의 공공성과 민중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국가 간의 소득격차, 기술격차, 문화 격차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새사연, 『리셋 코리아』, 350쪽) 남과 북의 민의를 잘 수렴하는 협력과정, 그리고 시장 논리보다는 양자의 공익적 논리를 존중하는 협력과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면 너무 상식적일 수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에서 각 국가가 민주적 절차를 밟아서 동아시아 공동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럽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실제 과정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이런 원칙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유럽 통합의 위기를 여러 모로 살펴서 교훈을 얻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이글은 통일뉴스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