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무엇 때문이라고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나는 국회에 가는 걸 싫어한다. 내 세금으로 지은 건물인데도 나를 움츠리게 하는 으리으리한 건물 때문일까, 아니면 웬만큼은 차려 입어야 하는 불편함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지난 6년간, 아니 한·미 FTA의 추진에서 비준까지 공청회, 청문회, ‘끝장토론’ 등에 시달렸기 때문일까?지난달부터 부쩍 국회 출입이 늘었다. 그 중 한 번은 또다른 거대경제권인 중국과 FTA 협상을 개시한 탓이고, 두 번은 요즘의 화두인 ‘경제민주화’ 때문이다.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준비위가 이곳에서 탄생을 알렸고, 7월 5일에는 야당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경제민주화포럼’이 발족했다. 나는 시민연대 준비위의 공동대표이고 동시에 포럼의 자문위원이다. 지난 총선의 복지경쟁에 이어 경제민주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전 대표는 총선에서 누린 톡톡한 재미를 못잊었는지 대선에도 김종인 박사를 끌어들였다. 그는 현행 헌법 제197조 2항의 입안자이니 경제민주화의 원조라고 선언할 태세다. 이에 포럼의 창립기념 강연을 한 유종일 교수는 “자연산 경제민주화와 성형 경제민주화를 구별해야 한다”고 맞불을 놓았다. 한마디로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는 가짜란 얘기다. 그에 앞서 축사를 한 문재인 의원은 ‘줄푸세’야말로 경제민주화의 적이라고 핵심을 짚었다. ‘줄푸세’란 5년 전인 2007년 이맘 때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 후보가 들고 나온 경제정책기조로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는 뜻이다. 전형적인 ‘시장만능주의’인데,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 한국에선 곧 ‘재벌만능주의’를 의미했다. 박근혜씨 대신 대통령이 된 이명박씨가 집권 첫 해에 쏟아낸 정책들이 바로 ‘줄푸세’였다. 하지만 1년도 되지 않은 2008년 가을 세계 금융위기가 폭발했고 작년부터 불은 유럽으로 옮겨 붙었다. 세계적 ‘줄푸세’의 귀결이요, ‘시장만능론’의 파산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두 지역에서 모두 금융이라는 만병통치약을 믿은 부채주도성장(debt-led growth)이 문제였다. 아무리 빚을 내도 효율적인 금융시장이 위험(병균)을 분산시켜서 큰 병(위기)에 걸리지 않을 것이란 광신이었다. 똑같은 믿음으로 인한 병은 한국 내부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났으니 지금 초읽기에 들어간 가계부채가 바로 그것이다. 줄푸세는 국내외 경제위기의 근원인 것이다. 경제민주화란 단순히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의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누누이 강조했듯이 ‘밖으로부터, 위로부터’의 성장(수출과 낙수효과)은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다. 이제 ‘안으로부터, 아래로부터’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해야 하는데, 재벌이 주역인 ‘줄푸세=시장만능론’이야말로 가장 큰 걸림돌이다. 또 지난 겨울부터 다섯 번에 걸쳐 연재했듯이 경제민주화의 핵심 과제가 ‘재벌개혁’이니 줄푸세와 경제민주화는 물과 불처럼 어울릴 수 없다. 분명 헌법 제119조 2항은 시장만능을 견제하는 조항이요, 재벌규제를 함축하고 있다. 과연 박근혜 전 대표는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줄푸세의 포기 선언을 할까? 만일 그게 아니라면 박근혜씨의 경제민주화는 이번 대선 최대의 거짓말이 될 것이다.지난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한·미 FTA로 민주당을 몰아붙였다. 미국식 FTA는 ‘시장만능론’의 통상분야판 정책이니 당연히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대답해야 할 민주당은 우물쭈물 얼버무렸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궁극적 뜻이 복지에 있었다며 은근슬쩍 복지 의제를 가로챘던 박근혜씨가 과연 이번에도 끼어들기에 성공할까? 민주당은 자신의 정책이 ‘자연산 경제민주화’임을 증명하려면 먼저 ‘시장만능론’의 폐기, 재벌 주도 성장전략의 폐기를 명확히 선언해야 한다. 먼저 눈 안의 티끌부터 제거해야 박근혜씨가 어디를 고치고 분칠을 했는지 환하게 보이지 않겠는가?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