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재로서의 방송과 민주주의 “조중동매”. 요즘 언론계에 회자되는 이름이다. 종합편성채널을 따낸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를 한꺼번에 부르는 약어다. 재작년 말부터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종편’ 문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정부는 글로벌 미디어 산업의 환상적 그림을 내걸었지만 현재의 광고시장 추세나 앞으로의 경제 상황에 비춰 볼 때 이 중 어느 하나도 살아남는다고 장담할 수 없기에 이들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서 안달이다. 광고시장 자체를 넓히기 위해 이미 간접광고가 나가고 있고, 전문약품과 같은 음의 가치재(남용할 경우 문제를 일으키는 재화)의 광고를 허용한다든가 광고의 배분을 위한 미디어렙에서 종편채널을 제외하려는 시도들이 그것이다. 시청자들은 치열한 경쟁이 자아낼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프로그램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종편 문제가 제기됐던 재작년말, 작년 초에 방송의 경제학에 관해서 간단하게 소개한 바 있지만 이번에는 광고까지 포함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자. 우선 (공중파) 방송은 전형적인 공공재(public goods)이다. 새뮤얼슨의 고전적 논문 이래로 현재의 표준적 교과서는 공공재를 비경합성(non-rivalry)과 비배제성(non-excludibility)으로 정의한다. 이 중 비경합성이 더 중요한 요소인데 이는 “집합적 소비”(collective consumption)에서 비롯된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나는 가수다”를 내가 소비한다(본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소비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흔히 공공재의 예로 드는 국방과 마찬가지이다. 이름하여 비경합성인데 이는 내가 사과를 사서 먹으면 다른 사람이 동시에 그 사과를 절대로 소비할 수 없는 일반 재화와는 대조적이다. 흔히 이런 재화의 경우에는 공급자가 돈 안 낸 사람을 배제할 수 없다(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안 낸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켰는데, 예컨대 수량이 풍부한 마을 공동우물은 공공재지만 계량기가 달린 상수도는 “클럽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재의 공급과 소비에는 무임승차(free riding)의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이기적인 소비자(‘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경제학의 기본 가정이다)에게 현재의 방송에 얼마를 낼 용의가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백해무익한 TV를 보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낸 돈으로 방송이 나온다면 나는 언제든 공짜로 “나가수”를 즐길 수 있다. 모두 이런 생각을 한다면 아무도 방송사를 경영할 수 없을 것이다. 돈을 벌기는커녕 나가수 제작에 드는 그 엄청난 비용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따라서 시장에서는 방송이 공급되지 않는다. 한편 비유하자면 민주주의도 공공재이다. 내가 민주주의를 한껏 누린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민주주의의 덕을 보는 걸 방해하지 않는다. 전두환 같은 희대의 독재자에게만 민주주의가 적용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도 없다. 당연히 민주주의는 시장에서 만들어지지도 않고 돈으로 살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모두 이기적이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까지 거는 비용을 치러 민주주의가 달성된 후 그 과실은 전체가 골고루 누린다면 아무도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동물이 아니라 때론, 또 어떤 사람들은 전체를 위해 희생하고 협력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민주주의는 공공재이고 따라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한다. 언론과 광고의 경제학 지금 방송은 거의 하루 종일 나가고 있으며 방송3사, 나아가서 유선방송, 인터넷, 신문과 잡지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방송이 공공재라는 것은 방송의 한계비용(한 사람이 더 방송을 보는 데 드는 비용)이 0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일반적인 시장 원리에 따른다면 방송의 시청 가격 역시 0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럴 경우 사회의 후생이 최대가 된다고, 즉 파레토 효율이 달성된다고 경제학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슨 돈으로 프로그램을 생산해내는 것일까? KBS1은 시청료로 운영한다. 나머지 방송3사는 광고 수입으로 운영하고 유선방송은 돈 낸 시청자에게만 방송을 내보내고 이와 함께 광고수입도 챙긴다. 한편 신문과 잡지는 구독료와 광고에 의존한다. 한국의 인터넷 언론은 미미한 광고수입과 자발적 기부금으로 수지를 겨우 맞추고 있다. 결국 언론은 자발적, 또는 강제적 요금(시청료나 구독료)과 함께 주로 광고에 의존한다. 상업방송으로 분류되는 SBS은 물론, 공영방송이라는 MBC나 KBS2도 거의 전적으로 광고에 의존한다. 각 방송이 시간대 별로 치열한 시청율 경쟁을 하는 것은 이 지표에 따라 광고의 양과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방송사는 시청자와 광고주 양 쪽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양면시장(two-sided market)이라고 부른다. 신용카드회사는 소비자와 가맹점을 매개하면서 수수료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방송사는 시청자와 기업을 매개하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방송사의 비용과 이익을 기업이 광고료로 지불하고 시청자는 공짜로 방송을 보는 것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시청자는 채널을 선택함으로써 특정 프로그램에 투표하고 동시에 광고된 물건을 선택함으로써 특정 상품에 돈으로 투표한다. 만일 기업이 광고료를 물건 값에 전가할 수 있다면 기실 시청자는 소비자로서 프로그램 가격을 지불한 것이 된다. 티비에 광고하는 기업은 대부분 독과점이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있으며 실제로 광고료는 기업 회계에서 비용으로 처리된다. 방송사는 시청자의 (한계)짜증비용(nuisance cost, 광고가 너무 많이 나온다면 시청자는 채널을 돌려 버릴 것이다)과 (한계)광고수입을 비교해서 광고의 양과 가격을 결정할 것이다. 다른 한편 광고주는 광고로 인해 상품이 더 팔려서 생기는 한계수입과 광고비용을 비교해서 광고할 프로그램과 가격을 결정할 것이다. 결국 광고의 양과 가격은 두 시장의 균형이 일치하는(또는 적절히 협상되는) 지점에서 결정될 것이다. 이제 방송은 마치 시장에서 거래되는 일반 상품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언론과 광고, 그리고 민주주의 공공재와 관련한 골치아픈 문제가 해결된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한 결함은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즉 이런 시스템이 언론의 ‘공공성’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학술적으로 정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지만(개인 견해로는 각 재화나 서비스의 기술적 특성과 시장구조, 그리고 사회가 합의하는 공공의 가치를 동시에 고려해야 그 재화의 공공성을 정의하는 동시에 가장 적절한 조달 방식을 결정할 수 있다) 언론의 공공성이 민주주의의 유지와 발전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면 언론은 그런 의미에서 체제재(system goods)에 속한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이라는 인식 하에 “거시건전성 규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론도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에 의한 규제”가 필요하다. 하버마스와 롤즈가 (숙의)민주주의의 실현 조건으로 언론의 공정성, 특히 견해의 다양성(viewpoint diversity)을 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굳이 시장에 빗대어 말한다면 언론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양면의 시장”을 넘어 “삼면의 시장”(three-side market)의 플랫폼이다. 이런 체제재의 공급 비용을 광고로 충당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방송사의 사활이 결린 시청율 경쟁은 언론의 공공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모델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다양한 결론이 나올 수 있지만 고전적인 주장들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예컨대 스타이너(Steiner)는 이미 1953년에 인기있는 프로그램 유형이 과도하게 복제될 것이라고 예측했고(최근 한국의 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라) 노벨상 수상자인 스펜스와 오웬(Spence & Owen, 1977)은 특정 프로그램 유형은 공급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정했다(황금시간 대에 시사 프로그램은 결코 방영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광고로 운영되는 방송사들은 시청료로 유지되는 방송사에 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 놓지 않는다. 광고주는 잠재고객의 호주머니에 관심이 있으므로 시청자의 연령과 성별, 직업을 고려하게 될 것이고 그런 시선에 부응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될 것이다. 예컨대 가전제품은 3-40대 여성이 주로 구매 결정을 한다면 이들을 타겟으로 한 드라마가 방송될 것이다. 광고가 뉴스의 내용마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은 더 심각하다. 이미 신문에서 드러났듯이 최대의 물주인 특정 재벌에 대한 비판은 아무래도 껄끄러울 것이고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에 관한 뉴스는 분홍빛 전망으로 물들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서 지방방송이나 종교방송 등은 다양한 견해, 특히 소수자의 견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필수적인데 광고는 시청율이 떨어지는 이 방송들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광고시장은 언론의 공공성을 위해서 규제되어야 한다. 과거 한국광고공사, 그리고 현재 논의되고 있는 미디어렙은 견해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규제 중 하나이다(더 정교한 광고규제와 방송 내용의 규제에 관해서는 다음에 논의하기로 한다). “조중동매” 등장의 의미 “조중동매”의 등장은 광고주의 협상력이 더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청율 경쟁이 격화되면 어쩔 수 없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게 될 것이다. 이미 “바보상자”로 불리고 있지만 바야흐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음의 가치재”가 될지도 모른다. 이미 신문시장에서 그러했듯이 재벌들이 밀어주는 “조중동매”가 보도 프로그램을 장악할 수 도 있다. 미국 폭스티비의 자극적인 “오라일리팩터”가 보수적인 시각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견해의 획일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미 국제 보도에서 미국 시각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국내 보도가 재벌 시각으로 획일화되지 말란 법은 없다. 따라서 나는 KBS의 시청료를 높이는 데 찬성한다. KBS1 뿐 아니라 다른 방송, 나아가서 인터넷언론에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보조금을 줄 필요가 있다. 우선 이들 언론이 공공재라는 기술적 이유때문에 그렇다. 어차피 광고료를 소비자가 부담하는 거라면 차라리 국민의 세금으로 언론을 보조하고 시민이 직접 언론의 생산과 평가에 참여하는 쪽이 올바른 방향이다. 그러나 지금 KBS의 시청료를 높이려는 것은 KBS2로 가는 광고분을 조중동매로 돌리려는 의도가 너무나 빤히 드러난다. 광고 배분의 역할을 하는 미디어렙에서 조중동매를 제외하려는 움직임 역시 이들 방송을 재벌이 직접 밀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청료 인상, 또는 보조금 지급은 광고 및 방송 내용의 시민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과 함께 결정되어야 한다. 모든 공공성 논의가 그렇듯 언론 공공성의 내용도 사회와 역사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특히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를 시민들이 결정해야 한다. 다양한 견해가 언론에 반영되어야 하며 언론은 그 토론의 장(하버마스의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 재벌과 조중동, 그리고 경제관료라는 삼각동맹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조중동매”는 현재의 심각한 불균형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높다. “북극의 눈물”과 “삽질경제”, 핵발전의 관계를 재계와 정부는 결코 밝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문화 역시 다양성이 중요하다. 그 누구도 1970년대의 ‘촌스러운’ 드라마나 뉴스를 원하지야 않겠지만 지금처럼 선정성 일변도로 나가는 것(불행히도 ‘막장드라마’의 시청율은 매우 높다) 역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순간 구질구질한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화면이 사라지고 온통 “까도남”과 “캔디”의 환상적 사랑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잊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을 것이다. 요즘 토요일자 신문에서 가장 먼저 펼쳐보는 서평란이 방송이라고 불가능할까. 광고로 유지되는 언론은 삼각형의 한 꼭지점인 시청자의 목소리를 사실상 빼앗아 갔다. 기업이 돈을 대고 시청자는 공짜로 방송을 본다는 외양이 시민으로서의 의무, 즉 민주주의와 언론 공공성 수호의 의무마저 잊게 만든 것은 아닐까. 물론 세금으로 언론을 보조한다고 해서 정부가 그 역할을 할 수는 없다. 국가권력 역시 언론이 견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국가를 동시에 견제해서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라면 시민이 그 주체일 수 밖에 없다. 이강택 언론노조 위원장이 한탄한 것처럼 언론인 스스로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린 ‘언론인 위기의 시대’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단순히 양면시장의 균형을 찾는 경제학을 넘어서 삼면의 균형을 꾀할 방법과 원리를 찾아야 한다. 현재와 같은 역사의 전환기에 언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깨어있는 시민”은 언론의 생산과 평가에 직접 참여하는 힘든 일도 감당해야 한다. 이 글은 ‘작은 책’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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