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이끌어온 권영길 의원이 눈물을 흘렸다. “내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 향후 건설될 통합 진보정당에서 백의종군하겠다”는 선언까지 덧붙여 의지의 견고함을 확인했다. 가히 결자해지이자 요즘 말로 ‘대인’의 풍모다. 개인적으로 필자의 민주노동당 탈당을 합리화한 건 뻔한 ‘진보의 미래’를 내팽개치고 민주노동당 다수파의 사적 이익에 ‘진보의 산증인’이 타협했다는 혐의였다. 만약 지난 대선에서 심상정이나 노회찬이 진보정당의 후보로 나섰다면, 과연 3%의 득표에 머무르고 그예 분당 사태까지 벌어졌을까? 물론 일어나지 않은 역사에 대한 부질없는 가정은 허망할 수밖에 없지만 필자의 행동을 결정하기엔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권영길 의원의 눈물과 함께 조승수 의원의 사과는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에 얽힌 모든 혐의를 역사의 문제로 돌릴 수 있는 돌파구이다. 벌써 4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에 심상정 의원은 민주당의 ‘정권 교체’에 대응하는 말로 ‘시대 교체’를 내세웠다. ‘민주-반민주’의 시대를 넘어 ‘진보와 복지의 시대’가 열릴 것이니 이에 걸맞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복지 경쟁’의 프레임으로 짜여진 현재의 국면에 비추어 보면 실로 혜안이라 할 만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는 반 발자국이 아닌 서너 발자국쯤 앞선 선언이었다.루스벨트에 이어 고 김대중 대통령의 언급으로 유명해진 얘기지만 그 ‘반 발자국’을 실천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니, 실은 그 반 발자국 앞을 안다는 게 서너 발자국 앞을 내다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지난 15년은 한마디로 ‘투기의 시대’였다. 두 민주 대통령은 자신들이 지난한 투쟁 속에서 배운 삶의 원칙, 즉 서민의 삶을 향상시키려고 나름의 모든 힘을 다했지만 장기적 통계는 지난 15년간 투기와 양극화가 가파른 기울기로 기승을 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앞으로 객관적 역사가라면 누구나 1980년대부터 30년간의 자본주의 역사를 ‘신자유주의 시대’ 또는 ‘시장만능의 시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그 중반쯤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이뤘지만 영민한 두 대통령도 시장만능이라는 당시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따른 금융 자유화, 민영화, 규제 완화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도입이나 건강보험의 확충을 압도했고 금융과 부동산 투기를 막으려 애썼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시는 그 모든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시대착오였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한탄한 대로 그는 시대의 막내였고, 그의 회한대로 복지 예산에 빨간 줄을 좍좍 그었다고 해도 가파른 양극화의 기울기는 그다지 누그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 양극화를 촉진하는 거시 정책을 쓰면서 복지로 서민의 삶을 향상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한나라당도 ‘반값 등록금’과 같은 교육 투기의 결과를 마냥 외면할 수 없게 되었고, 부동산 투기의 결과인 가계부채는 눈덩이로 불어나 시한폭탄의 초침처럼 째깍거리고 있다. 요즘 여러 글에서 누누이 강조했지만 이들 투기는 죄수의 딜레마 구조를 가졌고, 대통령들뿐 아니라 그들을 비판하는 우리 모두 적어도 소극적인 범죄자들이었다.우리 아이들을 절망에 빠뜨려 자살에 이르게 한 것은 다름아닌 우리 모두였다. 불과 3년 전인 지난 2008년 총선을 한번 되돌아 보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핵심 공약은 ‘뉴타운’과 ‘특목고’라는 양대 투기 정책이었고, 유권자인 우리의 압도적 다수는 기꺼이 두 정책에 표를 던졌다.역사만큼 관성의 법칙이 도드라지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 이미 시대가 교체되었다고 단언했지만 세계는, 특히 월스트리트의 미국은 시장만능의 관성에 기대다가 또 다시 대위기를 맞을 것이다. 이런 전환기에는 반 발자국이 아니라 서너 발자국을 앞서 가야 한다. 그래야 보통 사람들의 고통, 아니 우리 아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리트머스 시험지는 간단하다. 양극화를 촉진하는 거시정책, 예컨대 감세나 규제 완화, 민영화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또는 등 뒤에 숨겨 놓은 채 어떤 어떤 복지를 하겠다는 정치인은 가짜다. 한·미 FTA나 사교육, 또는 부동산 투기와 복지를 양립시킬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한치의 어김도 없는 사기꾼이다. 부동산 가격을 내리고 사교육을 없애는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은 정치인만이 시대 교체의 적임자이다.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