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촛불

By | 2011-05-23T17:58:51+00:00 2011.05.23.|

“정말 몰라서 묻는 건데, 그날 왜 교정으로 돌아가자는 결정을 했죠?” 11년 전 내가 CBS의 <시사자키>를 진행하던 때, 5·18 특집에 출연한 유시민(현 국민참여당 대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1980년 5월15일 오후 우리는 서울역에 있었다. 관악에서 영등포로, 그리고 신촌으로 돌고 돌아 서울역 광장에서 농성했다. 회현고가도로 위에서 수많은 시민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시청으로 돌진하던 버스에 불이 붙었다. 이내 신군부가 효창운동장에 공수부대를 집결시켰다는 둥, 아니 관악산에 도착했다는 둥 각종 소문이 나돌았다.“어떻게 할 것인가.” 온갖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교정으로 돌아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아니 사실상 해산을 했다. 바로 ‘서울역 회군’이다.“무서워서 그랬죠.” 그는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중에 확인한 증언에 따르면, 당시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유시민은 “여기서 해산하면 끝이다. 여기서 신군부의 실상을 파헤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현 한나라당 의원)은 “잠시 물러나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움직이자”고 했다. 당시 배후세력이라 할 만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의장은 이해찬(전 총리)이었다. 이들을 비난하려 함이 아니다. 나 역시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저 깊은 속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았던가.80년 5월 ‘서울역 회군’의 한탄그리고 광주에서 학살이 시작되었다. ‘체계적인 계획’은 하나도 실행되지 않았다. 계엄령이 내려질 경우, 영등포 시장에서 모이자고 했지만 나 역시 그 시간에 약속장소를 버스 타고 지나쳤을 뿐이다. 또 한번 사람들이 모이지 않은 것을 한탄했지만 내 안에선 “살았다”는 속삭임이 흘러나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우린 정체불명의 체포 명단을 빌미로 각자 숨어들었다. 그 이듬해 정말 말이 없었던 동기, 그래서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는 김태훈이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세 번 외치고 도서관 6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광주일고 출신이었다.훗날 보고 들은 광주는 화엄의 공동체였다. 김밥을 나르고 물을 건네며, 저들이 기대했던 방화와 약탈을 간단하게 우스갯거리로 만들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승리의 공동체였다. 광주는 1987년 6월항쟁으로 군부독재를 영원히 종식시켰고, 위기마다 촛불을 일으켜 두 번이나 개혁정부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우리는 화엄의 공동체를 재현하기에 터무니없이 무능했다.치욕의 부끄러움은 2008년 5월 또다시 되살아났다. 여중생들이 “이제 15살, 살고 싶어요”를 외치며 촛불을 들었다. 모두가 하나 되는 ‘화엄 광주’가 서울 광화문에서, 대구 동성로에서, 광주 금남로에서, 전주 덕진로에서 그리고 강릉에서 한점 한점 촛불이 되어 피어났다. 그것도 어린아이들의 손에서 일렁이며 번져나갔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100일이 넘도록 그 뒤를 따랐지만 우리는 ‘명박산성’을 넘지 못했다.여전히 살아있는 우리는, 또한 여전히 무능하다. 광주의 학살자들 쪽에서 쇠고기 전면 수입 자유화를 받아들여 기어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준하려 하는데 일부는 ‘원죄’ 때문에, 또 일부는 힘이 없어서 입으로만 반대하고 있다.변혁 위한 ‘희망의 불씨’ 살려야어디 이뿐인가. 살고 싶다는 그 아이들을 죽음의 경쟁 속으로 더 깊숙이 밀어넣고 있는 것도 살아남은 우리다. 아이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남을 못 믿고, 가장 불행하다고 호소하는데도 그저 경쟁 교육의 내용만 이리저리 변주하고 있을 뿐이다.언제 화엄의 공동체를 꿈꿨느냐는 듯, 오로지 개인적 승리에 매달리던 우리가 이제서야 정신을 차린 것일까. 지방선거는 아직 희망의 불씨가 살아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단순히 정권을 바꿔서 될 일이 아니다. 진정한 ‘화엄 광주’를 이 나라에 되살리기 위해선 죽음으로 치닫게 하는 전 시스템을 바꿀 구체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실천하는 것만이 이 치욕에서 벗어날 길이다. 다시 한번 화엄의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야 한다.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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