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의 죽음, 이진선의 권총

By | 2010-10-14T11:13:45+00:00 2010.10.14.|

황장엽. 2010년 10월10일 운명한 그가 오늘 국립묘지에 묻힌다. 이명박 정부가 고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할 때부터 찬반 논란이 불거졌다.황장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온전한 평가는 좀 더 시간이 흘러 그와 관련된 정보가 모두 공개된 뒤에 가능할 터다. 다만,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평가에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도 있다.가령 소설『아름다운 집』에는 황장엽의 오랜 ‘친구이자 동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신문기자로 살고 있던 이진선이 그에 대해 쓴 일기 대목이 제법 많이 나온다. 『아름다운 집』의 이진선은 황장엽이 이남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평양에서 듣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쓴다.1997년 2월 15일참으로 느닷없이 황장엽 동지가 남쪽으로 날아갔다. 공화국에서 그나마 그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홀연히 서울로 간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용서할 수는 없다.황장엽은 당연히 여기서 노선투쟁을 벌이고 순교의 길을 택해야 했다. 역시 사상은 투쟁의 용광로에서 벼려지는 것일까. 항일지하투쟁에도, 조국해방전쟁에도 참전하지 못했던 그의 세계관은 지나치게 관념적이다.그가 걸어온 삶의 행태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황의 졸렬한 행위로 인해 공화국의 사상적 분위기는 한층 경직될 것으로 보인다. 공화국도 공화국이려니와 그가 과연 남반부에 가서 올바르게 자신의 사상적 역할을 놀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다.(이하 생략).『아름다운 집』에서 이진선은 일본 유학시절 황장엽을 처음 만난다. 이진선이 황장엽에 대해 쓴 일기를 몇 대목 소개한다.1942년 3월 5일 목요일철학과 수업에서 처음 보는 조선 청년 하나가 들어와 눈길을 끈다. 출석부에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청강생인 듯하다. 메마른 모습과 달리 학구열이 진지하다. 나보다 두서너 살 아래인 것 같다. 성실성이 묻어나는 깨끗한 모습 때문일까. 관심이 쓸린다. 다음 시간쯤엔 한 번 말을 붙여보아야겠다.1942년 3월 9일 월요일청년의 이름은 황장엽. 평안남도 강동이 고향이란다. 내가 연상임을 확인하자 선뜻 형이라 부르는 자세가 다부지다. 야간 전문부 법과에 입학했는데, 평양상업학교 시절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았단다.황 군에게 일본 철학계의 동향을 간단히 들려주었다. 일본도 사상통제가 점점 심해지고 있으며, 독일관념론에 치우쳐 있어 강단철학의 한계가 뚜렷하다고 말했다. 학교 수업에 기대를 크게 가지면 그만큼 실망도 클 것이라고 일러주었다.정녕 철학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스스로 마르크스와 레닌 사상을 공부하라고 충고했다. 칸트의 경구를 빌려 철학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또한 외로워서였을까. 내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훌륭한 후배를 만나 흐뭇하다.1952년 3월 10일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연구원에 입학했다. 먼저 소련어부터 배워야 한다. 한 가지 기록해둘 것은 모스크바의 조선인유학생위원장이다. 환영대회에 나온 위원장은 뜻밖에도 황장엽이 아닌가. 얼마 만인가. 그도 몹시 놀라워했다. 황 동무는 일본 츄우오오 대학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기품 있어 보인다.재회. 그것도 모스크바에서일까. 한결 반가웠다. 헤어지면서 그는 김일성 수상 동지의 친동생인 김영주 동지가 얼마 전까지 이 대학에서 유학했다면서 편지로나마 나를 소개시켜주겠다고 말했다. 그로서는 상당한 호의―아마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일 터이다―였지만 난 거북스러웠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말에 그가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1957년 5월 10일열 달 가까이 기록을 전혀 못했다. 지난해 ‘8월종파사건’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 전반에 사상검토작업을 불러왔다. 소련에서 온 동지들은 물론 중국 연안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동지들도 전면적으로 비판받았다. 언론계도 상당한 변화가 잇따랐다. 살아남은 남로당 동지들에 대한 사상검토가 다시 벌어지면서 쏘개질이 극성을 부리기도 했다.동경과 모스크바에서 유학할 때 묘한 인연을 맺은 황장엽 동지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김일성대학 철학강좌장을 맡은 황 동지가 내 이야기를 김영주 동지에게 해준 덕택이다. 지난해 봄 소련 유학생들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보도한 내 기사도 충분한 ‘증거’가 되었다. 과거 <로동신문>에 쓴 내 기사에 대한 비판이 일부 있었으나 ‘사상 재검토’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었다. 황 동지가 없었다면, 나 또한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별생각 없이 붓 가는 대로 쓴 기록들이 언제 내게 죽음의 칼날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솔직히 들었다.어제 점심식사 뒤 산책길에서 만난 신문사 선배 김미옥 동지가 ‘왜 재혼하지 않느냐’, ‘예쁜 처녀 동무를 원하냐’는 등 호기심 어린 눈길로 던진 짓궂은 질문에 갖가지 상념이 들어 불현듯 잊었던 수첩을 다시 펼치고 있다.김 동지의 말에 빙긋이 웃고 말았으나 사실 재혼 문제는 사회적 현안이다. 전쟁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이 실로 막대한 가운데 홀어미들과 결혼적령기 처녀들의 문제가 사회적 해결과제인 것도 사실이다.(이하 생략).1961년 7월 27일김일성 동지가 제기한 주체 문제를 내 나름대로 남조선에 적용해 분석한 논평기사에 대해 황장엽 동지가 관심을 보였다. 일본 츄우오오 대학 유학 시절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를 형이라 불렀다.묘한 인연으로 모스크바에서 다시 만났던 황 동지는 학위를 받고 귀국해 이미 나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당 고위간부다. 지난 1958년부터인가 중앙당 비서실에서 수상 동지의 이론서기로 활동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늘 겸손했다. 평당원에 지나지 않은 내게도 말할 때마다 이 동지라 불렀다. 나 또한 깍듯하지 않을 수 없어 서기 동지라고 불렀다.편집국으로 찾아온 황 동지에게 주체를 사상적 수준으로 깊이 파고들어 철학으로 정립하는 과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민감한 반응을 보여서일까. 조선혁명의 독자적 사상에 대해 오랫동안 흉금을 터놓고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황 동지는 동지가 남로당 출신만 아니었어도 소환되지 않고 계속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몹시 미안해했다. 그에게 기대가 크다.1961년 7월 28일황 동지가 다녀간 뒤 신문사 안에서 나에 대한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낀다. 되레 거북스럽다. 남조선에서 올라와 용케 살아남은 삭다리쯤으로 멸시의 눈길을 감추지 않던 주필 동지가 오늘 집무실로 나를 살그니 불렀다. 공산주의교양부를 떠나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묻는다.허탈하다.쓸쓸하게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주필 동지, 고마우신 제안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이 자리가 제가 당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괜한 사양심이 아니었다. 그랬다. 진심으로 난 그렇다. 자라나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올바르게 공산주의교양을 심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아니, 만족해야 한다!1972년 12월 15일황장엽 동지가 상설회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지난 12일 치른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결과다.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이은 그의 눈부신 성취가 새삼 놀랍다.혹 내가 불평불만분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시기하는 것은 아닐까. 나 자신을 정면으로 다시 응시해야 할 때다.내면의 어둠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다면 모두 혁명의 햇살로 물리쳐야 한다.『아름다운 집』에서 황장엽의 ‘남행’을 날카롭게 비판한 이진선은 1998년 10월10일 권총을 쏘고 죽음을 맞는다. 소설『아름다운 집』은 2001년 출간되어 14쇄를 찍으며 2009년엔 일본어로 옮겨졌다. 2010년 10월3일 ‘세계문학 선집’으로 판형이 바뀌어 재판이 출간(들녘출판사)된 일주일 뒤, 이진선이 죽은 바로 그날인 10월10일, 같은 날에 황장엽은 죽음을 맞았다.『아름다운 집』은 ‘반북 아니면 종북’의 흑백논리로 분단시대를 바라보는 ‘경박’한 시선을 잔잔하게 고발하고 있다.

   댓글을 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