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과 경제발전, 그리고 박정희의 유산

By | 2010-05-24T14:20:21+00:00 2010.05.24.|

이때 경제개발은 과학기술 중심지대의 이동을 정당화해주는 핵심 이데올로기로 쓰였다.-김근배, <과학기술입국의 해부도>중에서과학의 이중적 의미현대에 이르러 과학과 기술은 구분하기 어려운 용어가 되었다. 영어로는 ‘Science and Technology’, 접속사로 분명히 구분되어 있는 말이 대한민국에서는 ‘과학기술’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진다. 과학과 기술, 혹은 과학과 공학은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는 공동운명체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문화 속에는 ‘과학’이라는 단어에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가 공존한다.먼저 우리는 과학에서 아인슈타인이나 다윈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해마다 노벨상 시상식이 다가오면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에겐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가 없다. 하지만 국가의 존망을 걸고 노벨상을 타야만 한다. 이미 노벨상은 국가적 강박관념이다.황우석 사태를 거치면서 분명해진 사실 중 하나는, 과학에 대한 대중과 언론 그리고 정부의 인식이다. 우리는 과학을 일종의 국가경쟁력으로 사고한다.원천기술이라는 용어가 일상화 되었고, 새튼 교수는 산업스파이로 몰렸다. 황우석 사건이 터지기 전에 언론은 줄기세포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다는 기사를 연일 터뜨렸고, 친히 대통령과 국무총리,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그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논문조작으로 물러나는 황우석 박사의 앞길에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흩뿌렸다. 그는 사기꾼으로 밝혀졌지만, 지지자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그가 사기를 당한 셈이었다. 국가경쟁력은 후퇴했다. 21세기 국가발전의 보고, 줄기세포는 황우석 박사의 추락과 함께 태평양 너머로 떠나갔다.박정희의 유산박정희의 유산 중 진보세력이 맞닥뜨려야 하는 가장 큰 과제는 ‘경제개발’에 관한 그의 업적이다.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먹고 사는 것이 당면과제였던 전후의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를 거치며 먹고 살만해졌다. 일본과의 비밀협약으로 받은 자금과 미국의 원조라는 변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변수를 고려해서 더 나은 역사가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해도, 상관관계에 불과할 뿐인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일반 대중들에게 여전히 인과관계로 인식될 뿐이다. 무능한 좌파정부라는 말에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가 어려있다. 잃어버린 10년을 말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박정희 시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의 국교는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아닌 자본주의가 되었다. 돈을 버는 것만이 신앙이 되었고, 이는 그 어느 종교도 감히 넘보지 못할 강력한 신념체계로 굳었다. 대한민국에서 자본주의는 종교다.박정희의 유산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1966년 미국의 원조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하면서 적극적으로 과학기술을 정치에 동원했다. 그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정책의 기저에는 박정희 시대의 철학이 그대로 배어 있다. 정치적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했던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과학기술 발전 없이는 경제성장이나 근대화가 이룩될 수 없다”라는 인식을 심는데 성공했다.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을 업고 재현된 것이다. 과학기술은 박정희 시대에 자본주의와 한 몸이 된다. 자본이 투입되면 반드시 이윤이 창출되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을 분리해서 생각해보면 완전히 오류인 이런 생각이 여전히 우리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박정희 시대는 한마디로 ‘정치권력의 전성기’였다. 김근배에 따르면, 박정희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과학기술 제도(과학기술의 내적 측면), 과학기술과 사회의 연결, 대중의 과학기술적 동원(과학기술의 외적 측면) 등의 한가운데 정치권력이 웅크리고 있었”으며, 당시의 정치권력은 “과학기술을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뇌이자 과학기술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독특하게 연결하는 신경망”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과학은 경제적으로 번역되었다. 초창기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대부분의 과학기술정책은 이승만 정권의 것을 계승한 것이었다. 1965년까지 박정희의 연설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당시 박정희 최대의 관심사는 경제발전이었다. 과학기술에 관한 5개년 계획은 ‘기술진흥5개년계획’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과학’은 경제적 유용성이 없는 순수학문분야로 여겨졌다. 애초에 박정희의 관심사는 ‘과학기술’이 아니었다. 경제적 유용성과 맞닿아 있는 ‘기술개발’이 정부의 최대현안이었을 뿐이다.이러한 흐름은 박정희가 1965년 중순 미국을 방문하면서 완전히 뒤바뀐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쟁 참전과 한일수교의 대가로 연구소 설립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박정희는 존슨의 제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연구소 설립에 관한 많은 과학기술자들의 성토가 있었지만 박정희는 무시했었다. 그리고 금속공학자인 최형섭을 주축으로 한 ‘파이클럽’이 정치권력과 손을 잡는다. 이제 박정희의 과학기술 정책은 ‘기술’에서 ‘과학기술’로 탈바꿈한다. 그는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미국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욱 큰 규모의 KIST를 설립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과학기술 대통령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유산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사로잡고 있다.과학과 기술해마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계절이 오면, 대한민국은 들썩거린다. 올해는 그 명단에 한국 과학자의 이름이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다. 그냥 때가 되었기 때문에 뭔가 말을 해야 하는 것 뿐이다. 그런 기대를 하기엔 갈 길이 너무나 멀다. ‘노벨상에 근접한 한국인 과학자’라는 명단도 해마다 빠지지 않는 단골주제다. 하지만 선정기준이 불투명하고 폐쇄적인 노벨상 선정위원회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과연 대한민국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우리는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노벨상 수상자들이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대한민국의 과학자들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없이 노벨상은 없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노벨상이 기초적인 연구가 실용적인 결과로 연결되었을 때 시상된다고 해도, 기초연구와 실용연구의 상호관계는 그 둘을 고루 발전시킨 국가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엔 그 반쪽만이 존재한다. 반도체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기술계의 발전은 눈부시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계열사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삼성전자의 결산보고서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이마저도 흔들리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미흡했다는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평가하기엔 구조적 상황이 열악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말하기 전에, 과학계는 과거의 유산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에서 하나라도 배운 것이 있다면, 박정희 시대로부터 정치적 민주화를 쟁취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과학기술행정의 모습을 직시해야만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기대할 수 없다. 경제개발이라는 이념 속에 과학기술이 갇혀 있는 한,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민족은 망한다고 했다. 거창하게 민족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과학기술계는 과거를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우리의 과학기술은 여전히 박정희 시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과학기술의 자율성파이어아벤트는 그의 책 <방법에의 도전>에서 서구사회에서 정교분리가 진행되었던 것처럼 과학도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의 근원에는 그의 아나키즘적 정치철학이 녹아 있다. 비록 과학에 단 하나의 방법론은 없다는 주장을 했던 그였지만, 과학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권력에 맞서는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 과학을 정치와 동등한 위치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파이어아벤트의 주장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조건 속에서, 나아가 과학기술이 정부의 지원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현대에 이르러 낭만주의적인 견해는 조금 양보해도 좋다. 우리가 박정희 시대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과학을 정치와 동등한 반열에 올려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다른 선진국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기술자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유산은 그런 것이다. 과학기술의 목표와 방향은 정부의 의지대로만 발전한다.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이 발 디딜 곳은 없다.박정희와 철학을 공유하던 최형섭에 의해 과학기술정책이 짜여지던 1960년대 중반 이전에 이미 그런 목소리가 있었다. 적어도 과학이라는 학문 안에서 진지하게 자신의 위치를 고민해본 학자라면, 과학이 정치에 이끌려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해 이미 과학자들 사이에는 과학과 정치에 관한 심각한 고민이 공유되고 있었다. 나아가 과학자들은 천성적으로 반항적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의 권영대 교수나, 동물학자 강영선을 비롯한 일본유학파 과학자들은 경제개발의 이념으로부터 독립적인 학문적 분위기의 ‘종합과학연구소’의 설립을 주장했었다. KIST가 설립된 이후에도 많은 이공계 대학 교수들은 대학과의 긴밀한 교류 및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었다. 그런 목소리들은 박정희의 비호 속에 모조리 묻혀버렸다.이러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대학과 연구소의 학자들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외치고 있고, 경제논리에서 조금 자유로운 자율적 연구를 지원하라고 호소한다. 중장기적 안목을 가진 프로젝트를 더 늘리고, 쓸데 없는 분기별 연구보고서로 연구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는 말은 이제 연구자들 사이에선 일종의 농담이 되어버렸다. 현장의 연구자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노벨상을 위해서 국가의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모르는 것은 과학기술정책을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정신 속에서 기획하고 있는 정부관계자들 뿐이다.노벨상인가 경제발전인가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단기간에 실용적인 연구로 이어지지 않는다. 기초과학이 발전해야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발전한다는 단선적 논리는 신화에 불과하다. 산업혁명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것이라는 착각은 2차 산업혁명, 그것도 일부에 국한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기술의 발전은 자체동력을 지니고 있다. 조지 바살라는 <기술의 진화>에서 이러한 기술과 과학의 상호작용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초대형가속기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은 현재에도 이러한 분석이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로 박정희 시대에도 과학기술은 경제개발에 실질적으로 크게 기여하지 않았다. 그 효과는 몇 십 년 후에나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근배의 말처럼 오히려 “경제개발이 과학기술을 특정 방향으로 관심 기울이고 진흥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따라서 만약 아이폰과 같은 돈벌이를 원하는 것이라면 국가는 기초과학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의 공학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다. 청년실업에도 불구하고 공학계열 졸업생의 진로는 순탄한 편이다. 물론 보수도 의학계열을 제외하곤 상위에 속한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견인차는 공학기술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이쳐와 사이언스에 한국과학자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실제로 그런 논문이 산업과 연계되는 경우는 드물다. 연계가 된다고 해도 아마 수십 년이 지난 후에나 가능할 일이다. 어쩌면 과학자들은 공학자들에게 기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는 결정해야 한다. 노벨상인가 아니면 경제발전인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정리하는 철학적 성찰은 기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자들은 그러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되었다. 만약 경제발전을 원한다면 아이폰의 성공을 배우면 될 일이다. 아이폰은 엄청난 과학적 성과물이라기 보다는 나와 있는 기술들에 철학과 아이디어를 접목한 상품이다.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내고 싶은 정부는 아이폰을 과학으로 포장하며 투자를 결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노벨상을 원하는 정부라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진다. 우선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 기간 내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구조를 뜯어고치고 장기적인 투자를 집행하는 작업이 성과를 맺는 데에만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집권 기간 내에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정부가 이런 투자를 하겠는가. 노벨상은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과학이 없어도 대한민국은 그럭저럭 잘 먹고 잘살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김우재 korean93@postech.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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