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구의 일선 공무원 대상으로 강연을 갔을 때다. 역에 내려 강연장까지 택시를 탔다. 어느 지역이든 택시노동자―흔히 ‘택시기사’가 예의 갖춘 말이라고 한다. 이해할 수 있다. 나도 택시노동자와 대화할 때 ‘선생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는 아니다. 노동자가 ‘기사’보다 결코 낮춤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은 신성하지 않은가―와 대화를 나누면, 민심의 흐름을 조금은 짚을 수 있다.일상으로 승객과 이야기하거나, 승객 사이의 대화를 자연스레 듣는 택시노동자의 말에는 한 개인의 의견보다 더 많은 사람의 생각이 담겨있다. 택시 노동자의 날카로운 통찰 50대 후반의 택시노동자에게 요즘 경기가 어떤가를 정중하게 물었다. 그 분은 아예 말하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앞만 보며 가다가 귀찮다는 듯이 내뱉었다. “죽지 못해 삽니다.” 그래서다. 곧장 질문의 강도를 조금 높였다.“대구는 한나라당 정부가 들어서서 경기가 좋아지리라고 기대했었을 텐데요.” “그랬죠. 그런데 나아지는 게 전혀 없네요.” 그렇게 대답한 뒤부터 그는 나를 다소 경계하는 눈치였다. 서울 말씨 쓰는 ‘외지인’ 앞에서 자신이 한나라당을 비판한 게 옳았을까를 스스로 짚어보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 분의 불신감을 풀어주려고 최대한 편안한 말투로 덧붙였다. “누가 들어서도 잘 사는 사람들은 더 잘 살고, 못사는 사람들은 더 못사는 것 같죠?”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대뜸 그는 맞장구쳤다. 이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요즘은요. 돈이 돈을 버는 시대입니다.” 요즘은 “돈이 돈을 버는 시대” 나는 그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신자유주의 대안을 탐색하는 연구원 원장으로서 ‘신자유주의’를 쉬운 말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를 늘 고심해온 내게 50대 택시기사의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돈이 돈을 버는 시대, 바로 그것이 신자유주의 아닌가. 새삼 민중의 통찰력을 확인했다. 말문이 터져서일까. 그는 이명박 정부에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대구지역 공무원들에게 혹 하고 싶은 말씀이 없는가를 물었을 때도 더는 아무 기대가 없다는 듯이 시큰둥했다. 어느새 목적지가 다 왔다기에 마지막으로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한나라당이 들어서면 경제가 나아질 것 같았는데 나아지지도 않았고 잘 사는 사람만 더 잘 산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어디에 희망을 두고 계신가요?” ‘희망’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의 입술에 허탈한 미소가 그려졌다. “희망요? 그런 게 있겠습니까?” 절망 섞인 어조에 난 더 대꾸할 힘을 잃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덧붙였다. “내게 희망은 오직 하나입니다. 교회를 나가거든요. 죽어서 천국 가는 게 희망이죠.” 죽어서 천국가는 게 유일한 희망 그 순간 가슴 깊숙이 아픔이 밀려왔다. 천국. 과연 그래도 좋은 걸까. 택시가 떠난 뒤에도 난 한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같은 시대를 같은 50대로 살아가는 나는 저 분에게 어떤 희망을 주었을까. 물음이 꼬리를 물었다. 유일한 희망은 ‘천국’이라며 고통스런 현실을 참고 살아가는 분들 앞에, 참된 종교는 무엇이어야 옳은가. 현세와 내세를 2분법으로 나누어 절망의 현실엔 눈감고 희망을 내세의 일로 돌려도 과연 괜찮은가? 진정한 종교인은 지금 저 고통의 바다에 잠긴 민중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옳은가? 아니, 나부터 출발해야 옳지 않을까. 민중이 마음 놓고 살아갈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며 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는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석고대죄라도 하고 싶었다. 손석춘 2020gil@hanmail.net * 이 글은 ’손석춘의 새로운 사회’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블로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