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의료는 커다란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알다시피 변화를 촉발시킨 것은 정부의 의료민영화 정책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 의료민영화 정책을 둘러싸고 전개된 지루한 찬/반 논쟁에서 한국 의료의 희망을 찾기란 쉽지 않다. 새사연 보건복지분과는 한국 의료의 새로운 밑그림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앞으로 4회에 걸쳐 ’OECD 보건통계’(OECD Health Data)로 본 한국 의료의 현실’을 주제로 대담을 진행하고자 한다. 이는 향후 한국 의료의 밑그림을 새롭게 그리기 위한 훌륭한 재료이자 근거가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OECD보건통계로 본 한국 의료의 현실’ 목차 ■① 한국은 왜 뇌졸중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을까 ② 한국 남성과 여성 중 누가 더 건강하게 오래 살까③ 병실은 남아도는데 입원은 어려운 이유④ 고가의 의료장비가 의료의 질을 높여줄까⑤ 한국 의료의 새로운 길을 찾다대담 참여(새사연 보건복지분과)박유원 | 간호사, 새사연 회원이은경 | 한의사, 청년한의사회 정책국장, 새사연 연구원정달현 | 예본치과 원장, 새사연 운영위원조남선 | 은평연세병원 외과과장황지원 | 소화아동병원 간호사,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정책위원장, 새사연 운영위원윤찬영(진행 및 정리) | 새사연 미디어센터장 사회 : 이번 시간에는 우리 국민의 의료이용 실태와 인프라 현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병상(입원용 침대)의 수와 고가 의료 장비의 수는 OECD 평균보다 높지만 활동 의사와 간호사, 의대 졸업자의 수는 평균보다 낮다. 특히 총 병상 수와 급성기병상 수는 OECD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높은데 이것은 무엇을 뜻하나.이은경 : 우리 의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병상 수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총 병상 수도 OECD 평균에 비해 많지만 특히 급성기병상 수는 평균의 두 배에 달한다. 게다가 다른 나라들은 점차 병상수가 줄어드는 추세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오히려 매우 큰 폭으로 늘고 있다.* 급성기병상과 장기요양병상급성기병상은 우리가 통상 병원에 치료나 수술을 위해 입원할 때 쓰는 병상을 말한다. 반면, 장기요양병상은 노인, 또는 만성질환자들이 요양을 위해 장기 입원하는 병상이다. 노인요양병원을 생각하면 된다.우리나라 의료는 치료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탓에 급성기병상의 비중이 매우 높다. 그러다가 2004년 경부터 요양병원에 세제 지원 등의 혜택을 주기 시작하면서 장기요양병상 수도 급격히 늘었다.사회 : 병상이 많으면 어떤 점이 문제가 되나.황지원 : 급성기병상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고가의 진단기기와 응급실, 중환자실 등 반드시 필요한 시설 및 장비가 많다. 일정한 수 이상의 의료 인력도 필요하다. 따라서 필요 이상으로 급성기병상이 많으면 국민 의료비가 늘어나게 된다. 박유원 : 단순한 보살핌이 필요한 환자는 장기요양병상에서 요양을 받는 편이 훨씬 저렴하면서도 안정적이다. 과거에는 이런 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비싼 비용을 부담해가며 급성기병상에 머물러 왔던 것이다.황지원 : 장기요양병상이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요양병원들 역시 고비용 구조로 가고 있어 급성기병상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러다보니 장기요양보험이 도입되고나서도 의료기관에 있는 노인들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재정이 부족한데다 요양병원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시설이나 집에서 보살핌을 받는 노인들만 지원해주는 것이다.장기요양에 관한 제도와 인프라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급성기병상과의 연계가 이뤄지지 못하면서 사각지대와 낭비가 발생하고 있다. 사회 : 급성기병상과 장기요양병상 모두가 과잉인데다 역할 분담도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조남선 : 좀 다른 측면도 살펴봤으면 한다. 언젠가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한 의사가 나와 대형병원과 중소병원의 진료비 차이에 대해 지적한 걸 들었다. 진료비 차이는 입원 기간의 차이 때문이었는데, 환자들이 몰리는 대형 병원은 다른 환자를 받기 위해 빨리 퇴원을 시키는 반면, 환자들이 많이 찾지 않는 중소 병원은 입원비라도 벌기 위해 오랫동안 붙잡아둔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어떻게 해도 욕을 먹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하고 싶은 말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재원일수, 즉 입원 기간이 길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재원일수가 길면 그만큼 많은 병상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박유원 : 재원일수가 긴 건 사실이다. 집에서 요양을 하라고 해도 ‘집에 가면 쉴 수 없다’며 입원을 고집하는 경우도 많다. 돌봐줄 가족이 없기 때문이다. 또 교통사고를 당해봤다면 알겠지만 사고 뒤에는 더 많은 보험금을 받기 위해 무조건 병원에 입원한다. 병가를 내도 꼭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한다. 집에서 쉬는 건 회사에서 용납이 안 되기 때문이다.황지원 : 사보험 문제도 짚지 않을 수 없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이들 탈장수술을 입원 없이 해내던 의사가 있었는데, 부모들이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입원을 하지 않으면 수술로 인정이 안 돼 건당 50~100만 원인 보험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부모들의 원성에 못 이겨 지금은 입원을 원하면 입원을 허용하고 있다. 사회 : 급성기병상과 요양병상 모두 심각한 과잉 상태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재원일수가 많은 만큼 병상수도 많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있다. 조금 더 얘기를 해보자.정달현 : OECD는 우리나라의 급성기병상 수가 많은 원인을 두 가지로 본다. 첫째, 급성기병상과 요양병상의 구분이 모호한 점, 둘째, 이윤을 좇는 민간의료 공급체계인 점이다.재원일수가 많은 이유도 병상의 구분이 모호해 만성기 환자들이 급성기병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조남선 : 공감한다. 물론 의료 공급이 지나친 측면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공급이 부족해 의료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과잉 공급만큼이나 과소 공급의 문제도 심각하게 볼 필요가 있다.모든 사람이 지금보다 의료 서비스를 더 원활하게 이용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표가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OECD 평균에 맞추기 위해 재원일수나 의료 공급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OECD 평균은 결코 절대선이 아니기 때문이다.황지원 : 재원일수를 줄이는 것이 꼭 옳은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나도 의문이다. 적정 재원일수의 기준으로 미국을 삼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미국은 입원비가 우리나라의 몇 배다. 따라서 의료비를 낮추기 위해 재원일수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가령 위 수술을 해도 미국은 3~5일 만에 퇴원시킨다. 우리나라 대학병원도 점차 이런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러면 2주 이상 집에서 요양해야 한다. 집에서 요양이 어려운 환자들은 대학병원을 나와 다시 중소병원으로 가기도 한다.무슨 병으로 병원을 찾든 일상에 복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회복한 뒤에 퇴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나.이은경 : 맞는 얘기다. 그런데 한 가지 통계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바로 사용하지 않는 병상의 비율이다. 우리나라는 병실수도 많지만 사용하지 않는 병실의 수도 많다. 즉, 대형병원의 병실은 부족할 정도로 늘 만원이지만 중소규모 병원, 또는 지방병원의 경우는 병실이 남아도는 경우가 태반이다. 의료자원이 효율적으로 이용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우리나라 평균 병상이용율은 71.6%로 OECD 평균인 75.3%보다 낮다).정달현 : 그렇다. 어쩌면 병상 문제의 핵심은 불균형이라고 볼 수 있다. 대형병원은 몇 달을 기다려야 겨우 며칠을 입원할 수 있고, 지방병원은 환자가 없어서 억지로 장기입원을 시킨다는 의심을 받는다.이은경 : 지역별 편차는 심각한 수준이다. 종합전문병원은 다 대도시에 몰려있고 지방 중소도시의 병원들은 대부분 경쟁력이 떨어진다. 심지어 필수 인력이 없어 운영조차 힘든 병원도 많다.박유원 : 그러다보니 수도권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가족들이 병원 옆 여관에서 생활하며 간병을 하는 일도 허다하다.정달현 : 병상 수에 대해 논할 때도 그런 부분들을 함께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원래 한 사회의 적정 병상 수는 그 사회의 인구와 인구 구성 등의 추계에 따라 조직되어야 되고 제대로 활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영리적 의료, 즉 수익성이 높은 의료 서비스는 지나치게 많이 공급되는 반면, 돈이 안 되는 서비스는 부족한 실정이다.이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의료 자원을 만들고 이용하는 방식이 이윤을 추구하려는 경제적 동기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의료 자원이 수도권에만 몰리는 것도 그런 이유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병상 수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영리적 영향력을 계속 줄여나가면서 의료 자체의 요구에 충실한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이은경 : 병상을 만들면 반드시 채워진다는 법칙이 있다. 수도권 대형 병원들이 급성기병상을 지나치게 많이 짓고 있는데 이는 어떻게든 환자로 채워진다. 그러면 지방 중소병원은 환자가 계속 줄게 되고 결국 제대로 된 진료를 하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이런 무분별한 병상 확충 경쟁은 결코 시장 기능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는다. 의료 영역은 환자가 합리적 선택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공공의 조절과 규제, 전달 시스템이 필요하다. 병상이 무분별하게 늘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규제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런 규제가 전혀 없다. 조남선 : 동의한다. OECD 평균과 비교해 재원일수나 병상 수가 많은가 적은가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큰 의미가 없다. 한쪽에서는 병상이 남아도는데도 다른 한쪽에서는 입원실을 잡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또 다른 나라에 비해 재원일수가 많은 이유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사회 :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OECD 평균과의 수치 비교를 떠나 한국 사회의 의료 이용 현실에 대해 조금 더 깊이 파헤쳐보기로 하자.이은경 : 의료 이용을 둘러싼 오랜 논쟁 가운데 하나가 과연 의료 공급자와 수요자 중 어느 쪽이 의료 이용에 대한 결정을 내리느냐 하는 것이다. 공급자인 의료인들의 지나친 이윤 추구 행위 때문에 의료 이용이 늘어나게 된다는 주장과, 입원과 치료를 선호하는 우리의 독특한 문화 탓에 수요자인 환자들 스스로가 병원을 많이 이용한다는 주장이 부딪히고 있다.이론적으로는 의료 공급자가 수요를 결정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환자들이 병원 치료와 약, 주사 등을 선호하게 된 문화의 이면에는 병원과 제약회사들의 계산된 공급 행태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조남선 : 그런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많이 바뀐 것도 사실이다. 이제 공급자가 멋대로 수요를 창출하기는 쉽지 않다. 가령, 요즘은 처방이나 입원일수에 대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심사를 하지 않나. 불필요한 의료 행위는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의료 공급자들이 자신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억지 수요를 만들고 있다는 주장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실제로 의료 수요가 늘어난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이은경 : 물론 모든 나라가 의료 이용의 확장기를 경험한다. 우리나라 역시 경제 성장과 전국민건강보험의 도입으로 의료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가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시스템이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에는 의료 공급을 확대해 의료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 핵심 과제였다면 지금은 적정한 의료 지침을 마련해 낭비를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정달현 : 가령, 각각의 증상에 따라 적정한 수준의 처방과 입원에 대한 가인드라인을 마련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홍보도 필요하지만 공급자의 공급 행태에 대한 규제도 필요하다. 외국에서도 항생제 사용에 대한 가이드라인, 폐렴 치료를 위한 가이드라인, 입원일수 제한 등의 조치를 통해 의료 문화를 바꿔나가고 있다.박유원 :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부의 규제에 대한 의료인들의 저항이 너무 크다. 병상 총량 규제, 지불제도 개선 등의 개혁 방안들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2020년이면 고령인구가 지금의 두 배로 늘어날 텐데 현재의 문제들을 그대로 둔 채 고령사회가 된다면 의료 수요와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황지원 : 의료 전달 체계가 왜곡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중하고 위급한 진료를 담당하는 병원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 감기를 비롯해 흔히 접하는 질병에 대한 치료는 동네의 1, 2차 병원에서 하면 되는데 우리는 감기, 고혈압, 당뇨 치료를 위해서도 수도권의 대형 병원을 찾는다.이은경 : 중증 환자를 담당해야 할 종합전문병원에 1차 환자가 몰리니 수도권 대형 병원은 늘 환자로 넘치고, 지방 중소 병원은 살아남기 위해 비만, 성형 등 특화 진료로 전환하고 있다. 결국 왜곡된 의료 전달 체계를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규제가 필요하다. 주치의 제도, 지불제도 개선 등의 정책 도입이 시급하다. 사회 : 적정한 수준의 의료 공급을 위해 의료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다. 그밖에 또 어떤 과제가 있나.황지원 : 선진국의 경우는 의료가 사회복지라는 큰 틀에서 통합적으로 관리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따로국밥이다. 가령, 독일은 환자가 급성기병상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시기와 집에서 요양해도 되는 시기를 구분하고, 만일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간병인의 수당을 정부가 대신 지불해준다. 정달현 :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는 병원들에 대한 구조조정도 필요하다. 이를 통해 병원들이 수도권에 몰려있는 현실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시장 논리로만 풀어서는 안 된다. 정부가 나서 공공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지방 중소 병원에 대한 구조조정을 이끌 필요가 있다.이은경 : 환자들이 이른바 빅(Big) 4로 불리는 수도권 대형 병원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시설이나 의료진이 우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 대형 병원은 가족이 없어도 입원이 가능하도록 높은 수준의 간병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결국 이런 현상도 간병ㆍ간호, 요양 등이 개인 부담인 의료 현실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의료 체계라고 하면 홈 케어(Home-care)까지를 포함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여전히 치료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정달현 : 사실 재원일수와 급성기병상의 증가, 간호사 수 감소 등의 구조적인 문제들도 모두 의료 자원의 편중에서 비롯된다. 흔히들 얘기하는 3시간 대기 3분 진료, S병원에 가기위해서는 몇 달 전에 예약하고 그마저도 인맥이 없으면 가기 힘든 상황, 의사들은 피 말리는 경쟁 속에서 경영인으로 내몰리는 현실 등. 결국 이런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종합적 정책이 필요하다.사회 : 지금까지 병상의 수와 국민의 의료 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의료의 공급을 둘러싼 화두가 ‘더 많은 공급’에서 ‘합리적 공급’과 ‘효율적 의료 이용’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시스템 마련이 절실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핵심은 적절한 규제와 정책의 도입이다. 특히 수도권 대형 병원으로의 집중에 따른 지역 간 공급 편차의 해소, 그리고 고령사회에 대한 대책 마련 등이 중요한 과제로 꼽혔다. 모두들 수고하셨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