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의료는 커다란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알다시피 변화를 촉발시킨 것은 정부의 의료민영화 정책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 의료민영화 정책을 둘러싸고 전개된 지루한 찬/반 논쟁에서 한국 의료의 희망을 찾기란 쉽지 않다. 새사연 보건복지분과는 한국 의료의 새로운 밑그림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앞으로 4회에 걸쳐 ’OECD 보건통계’(OECD Health Data)로 본 한국 의료의 현실’을 주제로 대담을 진행하고자 한다. 이는 향후 한국 의료의 밑그림을 새롭게 그리기 위한 훌륭한 재료이자 근거가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대담 참여(새사연 보건복지분과) 박유원 | 간호사, 새사연 회원 이은경 | 한의사, 청년한의사회 정책국장, 새사연 연구원 정달현 | 예본치과 원장, 새사연 운영위원 정수창 | 새사연 회원 조남선 | 은평연세병원 외과과장 황지원 | 소화아동병원 간호사,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정책위원장, 새사연 운영위원 윤찬영(진행 및 정리) | 새사연 미디어센터장 사회 : ‘OECD 보건통계’를 살펴보기에 앞서 이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정달현 : ‘OECD 보건통계’는 OECD 30개 가입국가들의 국민 건강 수준과 의료 체계에 대한 다양한 통계를 비교 분석해 보여주는 자료다. 보건의료 연구자는 물론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 관료들에게도 굉장히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1996년부터 관련 통계를 OECD에 제출해왔다. 이은경 : 나라별로 사회·경제 여건이 다른 것은 물론, 통계를 산정하는 기준도 다를 수 있기 때문에 OECD에서는 각 회원국과의 협의를 통해 통계 항목과 기준을 설정한다. 또한 자료원(原)과 통계 산출 방식을 함께 제출토록 하는 등 국가 간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애쓴다.WHO(세계보건기구)에서도 비슷한 통계를 발표하지만 ’OECD 보건통계’는 같은 기준으로 만들어진다는 점과 경제선진국 자료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활용된다.황지원 : ‘OECD 보건통계’ 지표들이 상당히 훌륭하게 설계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각 나라별 사회·문화적 차이들을 완벽하게 배제했다고 보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신중한 해석이 필요한 부분들도 있다. 박유원 :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OECD 몇 위’하는 식의 순위 발표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나라별로 일관된 기준이 적용되었는지 의문이 드는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각각의 지표들이 단편적으로 인용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의료 체계의 장점, 또는 단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 맞는 자료들만을 공개하는 식이다. 조금 더 넓은 시각에서,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이은경 : 동의한다. 지표들에 숨어있는 의미를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 : 그럼 지금부터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한 나라의 건강 수준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사망 관련 지표들을 살펴보자. 우리 국민들의 사망 원인부터 살펴보면, OECD 다른 나라들과 달리 허혈성심질환(심근경색 등)보다 뇌혈관질환(뇌졸중 등)에 의한 사망률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뇌혈관질환에 의한 사망률이 10만명당 77.0명으로 OECD 평균인 54.6명보다 월등히 높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조남선 : 안타깝지만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줄 연구 결과는 없다. 바로 그런 점이 문제다. 동서양의 식습관 차이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런 식의 추정만으로는 충분한 대책을 세울 수 없다는 데 있다. 뇌혈관질환이 많이 발생하면 이에 대한 역학적 조사를 통해 그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이은경 : 그나마 뇌혈관질환과 관련된 중요한 지표인 ’24시간 내 병원이송률’과 ’30일 이후 생존율’을 통해 그 원인을 유추해볼 수 있다. 뇌혈관질환은 대단히 긴급한 처방을 요구하는 질환이어서 이 두 가지 지표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두 가지 모두 상당히 떨어진다.24시간 내 병원이송률이 낮은 것은 의료전달체계가 미흡한 탓이다. 다시 말해 농촌지역 거주자나 독거노인 등 위험도가 높은 분들이 바로 응급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24시간 안에 제대로 된 처치가 이뤄지지 못하면 당연히 30일 이후 생존율도 낮을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질환의 발생률에서 나타나는 차이보다 사망률, 즉 실제 사망에 이르는 비율의 차이가 더 크다는 점이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한다. 황지원 : 노인들이 양방병원에 가지 않고 한방병원으로 달려가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웃음) 이런 식의 추정을 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리가 없다. 박유원 : 뇌혈관질환의 발생률이 높은 원인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시간에 따른 과로와 스트레스를 꼽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입증되지 않은 가설 수준이다. 이에 대한 연구도 아쉽다.정달현 : 앞으로 뇌혈관질환 발생률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뇌혈관질환은 대체로 60대 이상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우리 사회는 급속히 고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화는 뇌혈관질환 외에 암과 같은 다른 질병의 발병율도 높이겠지만 암의 경우는 긴급한 치료를 요하지 않기 때문에 대도시 큰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실제로도 암 사망률은 높지 않은 편이다.사회 : 그렇다면 거꾸로 허혈성심질환(심근경색 등)이 낮은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허혈성질환은 OECD 국가 가운데 두 번째로 낮다.이은경 : 아무래도 비만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뇌졸중은 고혈압과 연관이 되고 심근경색은 비만, 콜레스테롤 수치와 관련이 있으니 식습관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사망률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보다 면밀한 역학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박유원 : 모든 지하철역마다 심장제세동기(심장마비에 대비한 응급처치용 장비)가 설치된 것을 보고 놀랐다. 응급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뇌혈관질환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대처가 필요하다. 우선 국가 차원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길 기대한다.이은경 : 답답한 것은 이러한 지표들을 보면서도 의문을 품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건 왜 낮고 이건 왜 높은지에 대해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유전학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차원의 역학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사회 : 앞서 의료전달체계, 특히 응급치료체계의 미비를 지적했는데 우리나라의 병원 밀도가 꽤 높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대도시뿐 아니라 농어촌지역에도 적정한 수준의 의료시설이 확보되지 않았나?조남선 : 각 도마다 대학병원이 하나 이상씩은 있으니 그런 주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편차가 대단히 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 구마다 500병상 이상의 병원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에 비춰본다면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농촌지역이나 도서지역에는 응급의료체계 자체가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단순히 인구수 대비로 볼 것이 아니라 지리적인 측면까지를 포함해서 봐야 한다.정달현 : 알다시피 국토면적이 큰 나라들은 환자수송용 헬기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응급의료체계라고 하면 이런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질 좋은 의료시설, 응급운송체계 등 모든 면에서 상당히 낙후한 수준이다.박유원 : 그나마 구급차가 가더라도 적절한 처치를 할 수 있는 의료진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 있지만 인프라가 부족해 제대로 시행이 안 되는 실정이다.이은경 : 질의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 실제로 병원에 따라 항생제 처방률이 거의 세배 가까이 차이가 날 정도로 의료 질 측면에서도 병원별 차이가 크다. 단순히 병원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는 없다. 결국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느냐 여부가 중요하지 않겠나.사회 : 정리하자면, 우리나라의 뇌혈관질환에 의한 사망률이 다른 나라보다 유독 높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발생률 자체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4시간 내 병원이송을 보장하는 등의 응급의료체계가 미비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발생률이 높은 이유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역학조사를 실시해 한국적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건강관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물론 응급의료체계도 시급히 구축할 필요가 있다.조남선 : 암이나 허혈성심질환에 대해서는 OECD 평균 이상으로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으며 꾸준히 나아지고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2009년 데이터를 보면 허혈성심근경색의 관리율과 자궁경부암 등의 생존율이 최고수준으로 보고되었다.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이 급성기질환의 관리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 : 이번에는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특히 10대와 20대 여성, 노인의 자살률이 높다.정달현 : 지난해에 있은 두 전직 대통령의 자살 이후 자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적이 있다. ‘모든 자살은 타살이다’라는 뒤르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살은 사회 현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이미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에 더해 꾸준히 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조남선 : 처음으로 중학생 건강검진을 나갔을 때의 일인데 문진표에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세 번째 학생의 문진표에 ’그렇다’라고 표시가 돼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서 정신과로 보내야 하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그런데 다시 몇 명 더 받아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다’라고 답을 해놓았더라. 문진표에 그 문항이 있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박유원 : 자살 부추기는 사회라는 말이 맞다. 알고 보면 자살 관련 보도지침이라는 것도 있는데, 가령 자살수단을 보도하면 안 된다와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다들 봐서 알겠지만 이런 지침들은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 왜 자살을 선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먼저 던저야 한다. 이은경 : 우리나라의 자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노인의 자살이 빠르게 늘고 있고, 둘째, ‘가족 동반자살’이 늘고 있으며, 셋째, 자살의 증감이 우리 사회의 경제 상황 변화와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점이다. 가령, 실업률이 높아지면 자살률도 높아지는 식이다. 무서운 일이다.정수창 : 공부방 교사를 하며 만나본 10대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절망감이 무척 컸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사회안전망이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평범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 속에 극단적 생각까지도 하는 것을 보았다.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힘겨운 여생을 버텨낼 그 어떤 희망이 없어보였다. 이은경 : 노인의 자살은 ‘합리적 선택’이라고까지 말한다. 절대 빈곤 상태에 놓인 노인들의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자살을 감행했던 10대나 여성들의 경우는 우울증 치료를 통해 많은 효과를 볼 수 있지만 노인들은 그렇지 않다. 결국 노인에 대한 복지를 강화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셈이다.박유원 : 자살 관련 세미나에 가면 논의되는 내용의 절반이 ‘유해독극물 구입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옥상에 펜스를 설치해야 한다’, ‘긴급전화를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들이다. 본질적인 해결이 쉽지 않은 점은 이해하지만 이런 식의 대응을 보면 답답하다.정수창 : 절반의 해결에 불과하다고 본다. 저소득층 아이들이 세상과 담을 쌓는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이 아이들에게는 우리 사회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며, 조금 더 노력하면 얼마든지 가치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이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이은경 :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오늘날의 세태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사람이 살 만한 사회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현실을 바꾸지 않고서는 자살도, 저출산도 막을 수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박유원 : 사회적 안전망과 더불어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동네마다 소규모의 공동체들이 형성돼서 사람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장들이 만들어진다면 좋을 것 같다. 동네 골목길 모임 같은 작고 따뜻한 모임들 말이다.사회 : 지금까지 한국인의 주요 사망원인인 뇌혈관질환(뇌졸중 등)과 자살률에 대해 살펴보았다. 몇 가지 지표를 통해 두 가지 모두 단순히 의학적 차원의 문제이거나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여러 문제들이 얽혀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결국 한 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을 넘어 그 사회의 의료시스템은 물론 사회 전체의 건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다음 대담에서는 ’남녀 성별에 따른 건강의 차이, 또 사회적 계층에 따른 건강의 차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건강성에 대해 조금 더 심도있게 파헤쳐보도록 하자.
사회자님이 말씀하셨듯이 건강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은 영역입니다. 의료업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건강한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눌수 있는 계기와 모임이 있었으면하네요^^